제87화. 타락신 (2)
상원은 분지 가운데로 걸어갔다.
뽀드득
누구의 걸음도 찍히지 않았던 만년설이 밟혀 부서졌다.
드디어 두 번째 별을 얻기 위해 필요한 아이템 세 개를 얻는 여정의 마지막에 다다랐다.
샤믹의 말마따나 아무것도 없는 공터로만 보이는 이곳에 그 마지막 아이템이 있었다.
"후우."
상원이 뱉어낸 한숨이 흰 입김이 되어 공기 중에 퍼졌다.
상원은 한쪽 무릎을 꿇고 만년설을 쓸어냈다.
만년설 아래로 두꺼운 빙하의 시퍼런 표면이 드러났다.
얼음 아래서 마나가 강렬하게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이 아래 용제의 마지막 유물이 있다.
상원은 브라이싱크론 지갑에서 짧은 쇠막대기를 꺼내 목에 걸었다.
세 아이템 중 첫 번째, 용제가 그의 고향 파이에벨에 맡겼던 유물인 <용제의 왕홀>이었다.
상원이 막대를 오른손에 쥐고 마력을 불어넣자 상원의 오른팔에 새겨진 지진 문신이 빨갛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용제의 왕홀도 불에 달구어진 것처럼 시뻘건 빛을 내뿜었다.
콱!
상원이 왕홀을 얼음에 박았다.
그러자 왕홀이 박힌 자리에서부터 강렬한 돌풍이 일어나면서 분지를 뒤덮고 있던 만년설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만년설이 돌풍에 쓸려 올라가자 분지의 바닥이 드러났다.
분지의 밑바닥은 하나의 거대한 얼음덩어리였고, 표면 아래로 시퍼런 빛이 흐르고 있었다.
이어서 상원은 브라이싱크론 지갑에서 빨간 염주를 꺼내 목에 걸었다.
용제가 블라드 가의 당주 발라딘 블라드에게 맡겼던 유품 <선지자의 목걸이>였다.
그러자 평범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상원이 있는 분지 가운데를 중심으로 하여 수십 겹의 동심원들이 겹겹이 뻗어나가고 있었고, 동심원들의 사이사이로 낯익은 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승천계시록이 쓰인 문자인 <하늘의 문자>였다.
상원은 그 문자를 하나하나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상원이 새하늘교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배운 게 이것, 바로 하늘의 문자를 읽는 방법이었다.
"오이소프, 르 리기어 이여 니 시응 나사오."
상원이 외우는 주문은 얼음 아래로 들어가는 길을 여는 주문이었다.
마법진에 새겨진 수많은 문자들이 상원의 입을 통해 소리로 형상화되었다.
"라홉."
마침내 상원이 마지막 문자를 읽자 얼음 밑에서부터 거대한 형체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쩌적!
얼음이 갈라지면서 얼음 조각들이 공중에 흩날렸다.
"우왓! 맙소사!"
얼음 위에 서있던 샤믹이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반면 몸이 날랜 발라딘은 쉽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아아... 용제, 이런 걸 감춰두고 있었나."
발라딘이 중얼거렸다.
두꺼운 얼음 표면에 균열을 일으키며 솟아오른 것들은 표면이 굳은 용암처럼 새까만, 휘어진 기둥들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짐승의 갈비뼈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기를 한동안, 마침내 거대한 구조물이 흔들리는 북극의 오로라 아래로 제 모습을 드러냈다.
누워서 죽은 거대한 드래곤의 사체 같은 구조물, 이것이 바로 용제가 세 번째 유물을 묻은 <용의 무덤>이었다.
상원은 천천히 용의 해골을 향해서 걸어갔다.
그 해골 가운데 시꺼먼 구멍이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저 계단 아래의 용의 무덤 내부에 용제가 남긴 세 번째 유물이 있었다.
"샤믹, 발라딘."
상원이 두 사람을 불렀다.
지하에 내려가기 전 두 사람에게 시켜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넵 대장."
"예 용사님."
샤믹과 발라딘이 상원에게 뛰어왔다.
"조만간 여기로 지구인 하나가 찾아올 겁니다. 저 아래로 막무가내로 들어가려고 할 겁니다만, 제가 저기서 다시 나올 때까지 그 사람을 절대 들여보내면 안 됩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시점 승천 시험에서 가장 강한 탱커인 샤믹 프란시스코, 그리고 현시점 승천 시험에서 가장 빼어난 검사인 발라딘 블라드.
두 사람이라면 상원이 용의 무덤에서 나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먹이를 곁에서 떼어 놓아서 돌아버린, <검은 숲의 목자>의 화신 송혜경을 상대로.
뒤돌아선 상원이 용의 무덤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천천히 발을 옮겼다.
이제 차원 아나르가 낳은 불세출의 천재, 용제 <비젤 카스파>가 남긴 마지막 유산을 대면할 차례였다.
* * *
계단 벽으로는 시뻘건 마그마가 혈관을 따라 흐르는 혈액처럼 흐르고 있었다.
마그마가 내뿜는 빛이 시꺼먼 용암으로 된 구조물 내부를 비추었다.
그렇게 계단을 따라 한참 내려가니 곧 거대한 방이 나타났다.
그 방 한가운데, 사람의 허리 높이까지 올라오는 제단 위에 다름 아닌 용제 그 자신의 해골이 올려져 있었다.
손대면 먼지가 되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그 초라한 해골이 용제의 마지막 유품, <늙은이의 해골>이었다.
"잘못하면 부서지겠네."
상원이 해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초라한 뼛조각이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가 남긴 잔재였다.
누군가는 그 해골을 보며 삶의 덧없음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원은 그렇지 않았다.
해골의 정체를 알고 있는 상원에겐, <늙은이의 해골>은 삶의 덧없음을 상징하지 않았다.
이제 노트에서 보았던 대로 세 유품을 결합할 차례였다.
"목걸이를 놓고 왕홀을 꽂는다."
상원은 차고 있던 <선지자의 목걸이>를 벗어 제단 위에 올려두었다.
목걸이는 제단 주변으로 파인 홈에 딱 들어맞았다.
이어서 들고 있던 용제의 왕홀을 해골 바로 앞에 꽂았다.
늙은이의 해골이 놓인 제단은 판판한 돌판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홈이 있었다.
왕홀이 그 홈 속으로 쑥 들어가서 왕홀 끝의 구슬을 돌판 위에 올려둔 것 같은 모양이 되었다.
"비젤 카스파."
상원이 용제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홀 끝에 달린 구슬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이어서 제단 둘레에 놓은 목걸이의 알에도, 6시 방향에 있는 것들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차례로 빨간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골이 똑같은 빨간색으로 물들었다.
"이제 깨어나시오."
둥실, 해골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해골의 새까만 눈구멍 속에 새빨간 불이 들어왔다.
"호오... 홀홀홀."
쭈글쭈글한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긴 세월을 뛰어넘어 부활한 용제의 목소리였다.
용제, 성직자 출신으로 황좌에 올랐던 불세출의 천재는 말년에 강령술을 연구했다.
파이에벨 중앙마나기관 제13구역에서 보았던 수많은 살덩이 골렘들은 용제가 연구한 강령술의 흔적이었다.
연구를 계속하던 용제는 마침내 강령술의 오의에 다다랐고, 생전 쓰던 왕홀과 목걸이를 유품으로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세 유품이 다시 모였을 때 깨어날 준비를 하고서.
"내 잠을 깨운 게 자네구만. 심술궂은 늙은이가 낸 퍼즐을 푸느라고 고생이 많았어."
잠자리 머리맡에서 동화책을 읽어줄 것 같은 목소리, 그게 바로 생전 용제의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참... 인상적이시군요."
상원이 허 웃으며 말했다.
용제가 여자인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쭈그렁 할머니 목소리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홀홀홀, 내 목소리가 좀 곱지 그럼. 거참, 반반한 총각이네. 내가 이렇게 쭈그렁 해골바가지만 아니었어도 확 꼬셔보는 건데."
해골이 휙 날아와서 상원과 눈을 마주쳤다.
"용제님은 너무 연상이십니다만."
"예끼 이놈의 시끼, 내가 황제 할 때는 내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남자가 선 줄이 황궁 세 바퀴 반이었어 이놈아."
상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당신이 황제여서 그랬겠죠.'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얼굴에 다 써졌다 이놈아. 누가 불신자 아니랄까 봐 남의 말은 일단 의심하고 보는군. 끌끌끌끌."
해골이 상원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어 뭐야, 우리 젊은 친구 이거 원래 몸이 아니네? 아주 조형 실력이 기가 막히셔."
상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이 몸을 만든 자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십니까?"
상원은 작은 기대감을 품었다.
상원은 승천 시험의 거의 모든 걸 알고 있었지만, 정작 이 몸을 준 승천자 <기계장치의 신>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다.
용제라면 그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모르겠어. 이런 건 처음이야 정말로."
용제가 대답했다.
그때였다.
쿠르릉!
방 전체가 흔들리며 천장에서 돌조각이 떨어졌다.
"홀홀홀. 위에서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나나본데."
해골이 공중에서 휙 돌았다.
"쯧."
상원이 혀를 차며 위를 올려보았다.
이 정도 진동이 일어날 일이라면 하나밖에 없다.
송혜경이 도착한 것이다.
이렇게 잡담을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 했다.
"<화산정의 혐오체>."
상원이 용제의 신칭을 불렀다.
"홀홀홀. 다 알고 왔군.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야."
용제가 흥미로워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용제의 세 유품을 얻는 퍼즐은 승천 시험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가진 자만이 풀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 말인 즉 용제는 승천 시험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용제는 금강족의 대주술사 <뮈노 메드냅> 다음 가는 천재였지만 그 이유만으로 승천 시험에 대해 미리 알 수는 없었다.
용제가 승천 시험에 대해 미리 알 수 있었던 건 용제가 바로 승천자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승천 시험에 합격하여 승천했다가 하늘에서 쫓겨난 승천자.
새하늘교에선 그런 승천자를 <타락신>이라고 불렀다.
용제는 타락신 <화산정의 혐오체>의 환생이었다.
"다시 하늘에 오르시고 싶지요?"
"홀홀홀, 그렇다마다. 승천! 그것 하나를 위해서 그 긴 윤회의 굴레를 참아왔다고. 자, 불신자. 빨리 시험 치러 가자고. 내가 우리 잘생긴 총각 시험 붙게 도와줄 테니까."
타락신들은 윤회에 윤회를 거듭하며 수험자가 될 기회를 기다리지만 수험자로 윤회할 확률은 0에 가깝고, 그러다 보면 승천을 포기하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개중에 아주 운이 좋은 자들은 승천 시험의 조력자로 참가하고, 충분히 활약하면 다음 회차에 수험자로 참여할 기회를 얻는다.
<화산정의 혐오체>가 노린 게 바로 그것, 상원을 승천시키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다음 시험에 수험자로 참여하는 것이었다.
용제가 남긴 퍼즐은 승천할 만한 수험자를 고르기 위한 시험이었고, 상원은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아니오."
상원이 딱 잘라 대답했다.
그건 상원의 계획이 아니었으니까.
"뭐...? 아니, 무슨 소리야. 내가 승천하게 도와준다니까?"
화산정의 혐오체가 당황한 말투로 물었다.
"성격 급하시긴. 화산정의 혐오체, 당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상원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응? 무슨 말이야 그게? 선물? 뭔데?"
화산정의 혐오체의 애타는 마음이 느껴졌다.
되살아난 <화산정의 혐오체>의 도움을 받는 것만으로는 두 번째 별을 얻을 수 없었다.
별을 얻기 위해선 <화산정의 혐오체>의 힘을 더 끌어내야 했다.
타락신의 힘을 끌어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상원이 준비한 선물이 그것이었다.
"화신."
"뭐라고?"
툭
화산정의 혐오체의 턱뼈가 땅에 떨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