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타락신 (1)
탁
상원의 커다란 발이 지면을 밟았다.
"가져왔다. 성주의 메인보드."
상원은 발라딘을 향해 성주의 메인보드를 내밀었다.
메인보드의 새빨간 표면이 아나르의 별빛을 반사했다.
"아아... 메인보드...."
털썩 무릎을 꿇은 발라딘의 눈가에 보라색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당주님...."
"드디어... 드디어...."
블라드가의 뱀파이어들이 당주 발라딘 블라드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도 보라색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수백 년간 동토를 떠돌며 인간의 생기를 탐닉한 이들.
그 긴 세월 동안 메말라버렸던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그토록 그렸던 회색산맥 남쪽, 성지의 따뜻한 바람을 다시 맛볼 수 있을 테니까.
뱀파이어들에게 성주의 메인보드란 그런 물건이었다.
회색 산맥의 계곡 사이를 떠도는 밤바람이 발라딘의 머릿결을 흔들었다.
"후우."
큰 숨을 쉰 발라딘이 몸을 일으켰다.
아까 전의 그 거만했던 표정과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2미터를 넘는 상원을 마주 보는 키 큰 당주, 그의 눈에 깃든 감정은 존경심이었다.
발라딘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예스러운 절도가 깃든 몸짓이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로 수백 년을 살아왔지만, 고대 귀족 가문의 당주로서 익힌 예법은 잊지 않은 것이었다.
"예를 표합니다."
발라딘이 상원을 향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남쪽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준 사람, 가문의 구원자에게 보내는 존경심의 표시였다.
"예를 표합니다."
나머지 뱀파이어들도 상원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은 갑주와 대검으로 무장한 자들이 예를 표하니 그야말로 잘 훈련된 정예부대를 보는 것 같았다.
상원은 블라드가의 마음을 얻었다.
이제 이들도 상원의 세력이었다.
성주의 메인보드, 그 하나가 상원이 블라드가를 장악하게 해주었다.
발라딘에게 메인보드를 넘기기 직전, 상원은 잠깐 그 물건을 들여다보았다.
성주의 메인보드에는 고대인들의 기술력과 지혜가 쌓여 있었다.
에키나르타인들에게는 더없이 값진 것이다.
메인보드는 지구에서 온 수험자들에게도 특별한 물건이었다.
<성주>는 에키나르타인만을 제한 없이 통과시키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있다.
방벽의 AI <성주>가 지구인을 단 13명만 통과시키겠다는 결정을 한 이유는, 지구인은 제한 없이 통과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 메인보드는 지구인들이 서로를 죽이는 참극을 부른 원흉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방벽의 참극을 겪은 수험자라면 이 메인보드에 특별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원은 아니었다.
상원에게 메인보드의 가치는 오로지 <선지자의 목걸이>와의 교환뿐.
상원은 다시 한번 느꼈다.
평범한 수험자들이 걷는, 50개의 시험을 차례대로 해결해나가는 승천 시험의 길.
자신이 걸어갈 길은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1회차 때와 똑같이 50개의 시험을 치르겠지만, 그 풀이 과정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어렵고 복잡할 거라는 걸.
상원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냈다.
이런 상념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상원은 발라딘에게 어떠한 미련도 없이 메인보드를 넘겼다.
"감사합니다."
메인보드를 받아든 발라딘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메인보드를 두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목걸이을 주시오."
상원이 발라딘을 항해 손을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아르템, 메인보드를 받아라."
"네, 당주님."
발라딘의 말에 민머리의 뱀파이어가 메인보드를 받아들었다.
<아르템 블라드>, 대공 발라딘 블라드의 장남이었다.
메인보드를 넘긴 발라딘이 망토와 무구를 차례로 해제했다.
그러자 발라딘의 상체가 드러났다.
너른 골격에 얇은 근육이 빼곡하게 들어찬 모양새가 곧고 정한 나무와도 같았다.
움푹 들어간 쇄골 위에 상원이 원하는 물건이 걸려 있었다.
포도알만 한 선홍색 구슬을 알알이 꿰어 맞춘 염주, 그게 바로 용제의 두 번째 유품 <선지자의 목걸이>였다.
"여기 있습니다."
목걸이를 벗어 상원에게 넘기는 발라딘의 태도가 더없이 공손했다.
상원이 목걸이를 넘겨받았다.
[성물급 보구, <선지자의 목걸이>를 획득하였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선지자의 목걸이, 그건 어떠한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낡은 염주일 뿐이었다.
파이에벨에서 얻었던 <용제의 왕홀>과 마찬가지로 이 목걸이도 어떠한 기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용제가 남긴 세 가지 유물, 그걸 모두 모아야 두 번째 별을 얻을 수 있으니까.
상원은 목걸이를 브라이싱크론 지갑에 집어넣었다.
이제 세 번째 물건을 얻으러 가야 할 차례였다.
상원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세 번째 물건을 얻는 건 이만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발라딘 블라드 대공."
"예."
발라딘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제 <용의 무덤>으로 갑시다."
상원의 말에 발라딘의 얼굴이 굳었다.
용의 무덤, 그곳이 어디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용의 무덤은 용제가 남긴 마지막 유물이 있는 장소였다.
용의 무덤이 있는 곳은 카라온 협곡이나 파이에벨보다 훨씬 더 북쪽, 에키나르타 최북단의 빙하 지대였다.
사시사철 녹지 않는 만년설이 뒤덮인 척박한 툰드라를 지나 산만한 빙산이 늘어선 <월훈의 빙하>, 그 가운데 <용의 무덤>이 있었다.
기후 그 자체가 위협인 곳이었다.
평범한 에키나르타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한 뱀파이어들도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선지자의 목걸이를 얻으셨다면, 다음 순서는 당연히 용의 무덤이겠지요."
발라딘이 덤덤하게 말했다.
목숨을 걸고 용의 무덤으로 가는 것, 그것이 마치 숙명이었다는 듯.
"아르템, 일족을 이끌고 방벽 남쪽으로 가라. 해가 뜨기 전에 은신처를 찾아야 하니 서둘러야 할 게다."
"다... 당주님? 당주님께서는...."
아르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북쪽으로 가야 한다. 그것이 나의 일이다."
"알겠습니다."
블라드가의 뱀파이어들이 당주에게 예를 갖추었다.
뱀파이어들의 태도에서 에키나르타의 그 어떤 귀족 가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품과 절도, 그리고 당주를 향한 진심 어린 충정이 느껴졌다.
이제 이들은 더 이상 분별없이 생기를 탐닉하는 마물이 아니었다.
"신우주 씨."
우주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상원을 향했다.
"블라드가의 사람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십시오. 열네 번째 시험이 시작되기 전까지 충분히 성지에 닿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우주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보고... 저, 피 빨아먹는 괴물들이랑 같이 움직이라는 건가요?"
우주의 반응은 당연했다.
블라드가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신우주에게, 뱀파이어는 그저 생기를 빨아먹는 언데드일 뿐이었다.
"네. 우주 씨는 안전합니다. 저들에게 그 정도 분별력은 있습니다."
상원은 단호히 대답했다.
"그래요, 그건 알겠는데. 저자들이 살기 위해 생기를 빨아 먹어야 하잖아요? 제 생기를 빨아먹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죠?"
맞는 말이었다.
뱀파이어들에게 지구인의 생기는 별미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었다.
다른 수험자들이라면 그렇다.
하지만 신우주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약학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초의 수확자>라는 주신급 수호신이 있었으니까.
"왜냐하면, 신우주 씨는 지구인의 생기보다 맛있는 약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원의 말에 신우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 가요?"
"네. 수호신에게 물어보세요."
상원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대장! 대장! 끝났어요!"
샤믹이 쿵쿵거리며 뛰어왔다.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고생했습니다. 이제 다음 장소로 움직입시다."
"넵!"
샤믹의 힘찬 대답을 들은 상원이 고개를 돌려 발라딘을 보았다.
발라딘은 어느새 커다란 검은 늑대로 변신해 있었다.
"당주님, 잘 다녀오십시오."
뱀파이어들의 인사에 발라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찬 바람이 불어오는 저 북쪽을 향해 휙 뛰어가기 시작했다.
발라딘의 모습이 쏜살처럼 멀어졌다.
"갑시다."
상원이 왼쪽 손등에 <하늘불꽃 드론>을 끼웠다.
드론의 프로펠러가 윙 소리를 내며 떠오르자 상원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휘이이익!
발라딘을 따라 날아가는 상원의 귓전에 거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카라온 방벽이 빠른 속도로 멀어져갔다.
* * *
<용의 무덤>의 구체적인 위치는 상원도 알지 못했다.
승천 시험에 대한 모든 것이 적혀있던 노트에도 단지 '발라딘 블라드를 따라가면 용의 무덤이 나온다'라고 적혀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상원은 말없이 발라딘을 따라갔다.
처음에는 따라오는 사람들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중간 중간 멈춰 서던 발라딘도 상원과 샤믹의 이동력에 적응했는지 쉴 새 없이 북쪽을 향해 달렸다.
용의 무덤까지는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상원과 샤믹, 그리고 발라딘.
며칠 동안 세 사람은 에키나르타 서북쪽의 척박한 툰드라를 건넜다.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극한의 땅, 웬만한 사람들이었다면 횡단은 고사하고 반의반도 가지 못해 얼어 죽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이 툰드라를 건너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툰드라의 추위 정도는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툰드라에는 언데드가 없어서 밤에도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낮과 밤이 세 번쯤 바뀌었을 무렵, 상원은 산만한 빙하들이 겹겹이 늘어선 빙하 지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월훈의 빙하>, 이 가운데 용의 무덤이 있었다.
“이쪽입니다.”
상원은 발라딘을 따라 깎아지른 빙하 사이에 난 좁은 균열로 들어섰다.
크레바스였다.
높이가 수백 미터는 될듯한 빙하가 머금은 쪽빛이 크레바스 내부를 비추었다.
"여기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다를 겁니다. 용사님,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본모습으로 변신한 발라딘이 일행의 선두에 섰다.
그가 뽑아 든 양손 검이 예리한 빛을 머금었다.
그때 크레바스 안쪽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흐으으으."
"흐으으으륵...."
언뜻 바람 소리 같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무언가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우...."
그 소리만으로도 한기를 느꼈는지 샤믹이 양팔을 감싸 쥐었다.
크레바스 저쪽에서 성큼한 형체들이 나타났다.
코발트색 해골이었는데 희끄무레한 안개가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그것들이 바로 월훈의 빙하를 지키는 수호자들, <웬디고>였다.
웬디고의 날숨엔 인간 따위는 가볍게 동태로 만들어버리는 냉기가 깃들어 있었다.
"금방 처리하겠습니다."
양손 검을 뽑아 든 발라딘이 웬디고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흐으으윽!"
웬디고들이 날숨을 뱉어냈지만 발라딘은 미끄러지듯 가볍게 냉기를 피해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웬디고의 가랑이로 파고든 발라딘이 양손 검을 세로로 베어 올렸다.
삭!
양손 검에 깃든 보라색 기운이 아름다운 호를 그렸다.
이어서 웬디고가 쩍 소리를 내며 세로로 갈라졌다.
"후우."
보라색 기운을 한 모금 뱉어낸 발라딘이 웬디고들을 베기 시작했다.
상원조차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신속한 동작 하나 하나에 깊은 절도가 들어 있었다.
고대의 무사 가문이었던 발라딘 가를 이끄는 당주로서 손색이 없는 실력이었다.
수백 년간 검술을 갈고 닦았다.
칼솜씨에 있어서 발라딘과 견줄만한 자는 승천 시험을 통틀어서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가시지요 용사님."
웬디고 일곱을 처리하는 데 채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상원은 앞장선 발라딘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발라딘의 검이 웬디고 무리를 베어 넘기기를 수십 차례, 끝이 없을 것 같던 크레바스가 드디어 끝났다.
세 사람의 눈앞에 있는 건 거대한 분지였다.
면적이 하도 넓어서 분지를 둘러싼 수백 미터 높이의 빙하들이 턱없이 낮아 보일 정도였다.
“여기 맞아요? 아무것도 없는데....”
“맞습니다.”
샤믹의 말에 대답한 상원이 천천히 분지 가운데를 향해 걸어갔다.
용제의 마지막 유물이 코앞에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