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85화 (85/230)

제85화. 카라온의 방벽 (5)

기계장치의 신, 도대체 그 힘은 어디까지인가.

상원은 손등에 붙은 드론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건 상원이 강신회로를 통해 받아들인 <태초의 대족장>의 힘을 기계장치의 신이 입맛대로 개조한 결과물이었다.

마신의 힘을 담은 기계라니,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허 참."

상원이 말했다.

드론은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도 출력이 굉장했다.

거구인 상원에 무거운 샤믹까지 매달려 있었는데도 상당한 속도로 날고 있었다.

카라온의 방벽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러자 성벽으로부터 우렁우렁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 경고. 접근을 불허합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AI <성주>의 목소리였다.

1회차 때도 성주는 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단 13명의 수험자만 방벽을 지나갈 수 있다고 통보했었다.

그때는 성주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무시했다간 성주의 마력포에 그대로 통구이가 되어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는 마력포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으니까.

- 다시 한번 경고합니다. 접근을 불허합니다.

성주의 최후통첩이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매끈한 방벽의 포문이 열리며 마력포의 포신들이 튀어나왔다.

최후통첩을 무시했다간 무시무시한 마력 포격이 쏟아질 것이었다.

성주의 마력포, 그건 확실히 엄청난 물건이었다.

이제 겨우 13번 시험, 저걸 맞고 살아남을 수 있는 수험자는 손에 꼽았다.

심지어 상원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원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저걸 대신 맞아줄 사람이 있으니까.

"샤믹."

"넵, 대장."

상원이 샤믹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샤믹이 날아가던 관성을 그대로 담아 대지를 쿵쿵 짓이기며 방벽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는 방벽 바로 앞에 멈춰 서서 두 발을 땅에 박았다.

"쏴봐! 이 똥멍청이 고물딱지야!"

- 경고 끝. 포격 개시.

콰과과과광!

샤믹이 도발에 반응이라도 하듯 마력포대가 엄청난 굉음과 빛을 내뿜으며 마력탄을 쏟아냈다.

포격이 쏟아지기를 십여 초, 자욱한 연기가 방벽 앞을 덮었다.

그리고 연기가 걷혔을 때, 샤믹은 여전히 두 발을 땅에 박고 굳건히 서 있었다.

그녀의 몸은 중앙마나기관의 제13구역에서 살덩이 골렘들을 상대했을 때처럼 돌로 변해서 자라나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트롤 타이즈도 샤믹의 몸과 같이 재생해서, 샤믹이 알몸이 되거나 하는 민망한 꼴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끝이냐! 간지럽지도 않다!"

샤믹이 외쳤다.

콰과과광!

벽력 같은 굉음과 함께 포격이 이어졌지만 샤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샤믹을 향한 포격은 점점 거세어졌다.

몇십 개의 포문들이 더 열렸고, 마력탄의 강도도 발사되는 빈도도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믹은 굳건하게 포탄을 버티고 있었다.

"괜찮네."

멀찍한 곳에서 샤믹을 바라보던 상원이 말했다.

성주의 포격을 모조리 받아낼 수 있는 샤믹의 육체, 그게 상원이 만든 작품이었다.

승천 시험 어디에도 성주의 포격을 저런 식으로 받아낼 수 있는 수험자는 없다.

"포문 마흔일곱 개. 포격 빈도 초당 0.84회. 속성 전환 빈도 초당 0.22회...."

상원은 포격 패턴 분석을 끝내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 성주는 모든 자원을 포격에 할당하고 있었다.

<카라온 방벽>의 AI <성주>는 특이한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한정된 마력 자원을 외부 포격과 내부 경비, 그리고 마력 결계 유지 간에 유연하게 배치하는 것이었다.

그건 바꿔 말하면 마력을 셋 중 하나에 올인하면 나머지 두 방어 장치는 무력화된다는 뜻이었다.

지금 포격 패턴은 성주가 모든 마력 자원을 포격에 할당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부 방어시설과 마력 결계가 무력화된 지금, 방벽 내부에서 <성주의 메인보드>를 가져오는 일은 그냥 미로 찾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당연히, 상원의 머릿속에는 그 미로를 뚫는 최단 경로가 훤히 그려져 있었다.

"슬슬 가볼까."

위잉 소리와 함께 <하늘불꽃 드론>의 프로펠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샤믹이 방벽의 포격을 받아내는 사이, 상원은 유유히 방벽 구석에 달린 커다란 환기구로 들어갔다.

<성주의 메인보드>를 가져오는 건 보통의 수험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일 뿐.

상원에겐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을 꺼내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일출까지도 필요 없었다.

자정이면 충분했다.

* * *

뱀파이어들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방벽 앞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감정이란 감정은 모두 말라버린 뱀파이어들도 놀라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방벽 앞에는 온몸이 돌로 된 거인이 쏟아지는 포격을 맞으며 굳건하게 서있었다.

"맙소사.... 말도 안 돼."

"나무의 자식이... 저 정도라고?"

그자는 틀림없이 '나무의 자식', 즉 지구인이었다.

뱀파이어들은 지구인들의 몸속에 흐르는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지구인들이 평범한 에키나르타인들보다 강하다는 건 뱀파이어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뱀파이어들에게는 미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방이면 뱀파이어들도 잿더미로 만드는 <카라온 방벽>의 포격 몇백몇천 발을 굳건히 버티고 있으니 믿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카라온 방벽이 어떤 물건인가.

뱀파이어들이 회색 산맥 밑으로는 얼씬도 못 하게 하기 위해 만든, 뱀파이어들에 대한 고대인들의 증오가 응집되어있는 물건 아닌가.

연약한 지구인 따위가 그런 걸 버틸 수가 있다는 말인가.

"허어."

뱀파이어들의 수장, 대공 발라딘 블라드는 복잡 미묘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정말로 저 방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마음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

"드디어...."

발라딘은 살짝 눈을 감았다.

발붙일 곳 없이 성지 밖을 떠돌았던 오랜 세월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블라드 가문은 본래 성지 다림델에 근거를 두었던 고대 귀족 가문들 중 하나로 마법과 마술을 연구하였다.

그러다가 금단의 지식인 '강령술'에까지 손을 댔고, 그 여파로 가문 전체가 저주를 받아 뱀파이어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블라드 가문은 회색산맥 이북의 차가운 북방으로 쫓겨나야 했다.

그리고 고대인들은 <카라온 방벽>이라는 불침의 방벽을 세워 블라드 가문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렸다.

그 후 블라드 가의 뱀파이어들은 하이에나처럼 산 자들의 온기를 주워 먹으며 추운 북방을 떠돌아다녔다.

하루도 따스한 성지를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용제... 정말이었는가...."

살짝 뜬 실눈 아래 나타난 발라딘의 눈동자에 보라색 기운이 감돌았다.

그렇게 수백 년이 지난 어느 날, 방벽 남쪽 제국의 황제라는 자가 자기들을 찾아왔다.

그리고 자기 목걸이를 맡기며 말했다.

이 목걸이를 찾으러 오는 자가 당신들을 다시 남쪽으로 데려다줄 거라고.

황제의 말엔 그 어떤 증거도 없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도대체 어떤 재주가 있어 이 저주받은 블라드 가의 자식들이 방벽을 넘을 수 있도록 해준다는 말인가.

하지만 어쩐지 믿음이 갔다.

그래서 발라딘은 황제가 맡긴 그 목걸이를 홀린 듯 차고 다녔다.

항마진 바깥으로 추방된 에키나르타인들의 가슴에 검을 박을 때도, 시험을 치르다 낙오된 지구인들의 생기를 탐닉할 때도, 사실 발라딘의 마음 한편엔 그런 마음이 있었다.

이 사람이, <선지자의 목걸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을까.

그렇게 세월이 흘러 흘러 드디어 만난 것이다.

선지자의 목걸이를 아는 사람을.

"드디어... 저 벽을 넘을 수 있는가."

꿀꺽, 발라딘이 침을 삼켰다.

선지자의 목걸이를 아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추방된 일족을 수백 년간 이끌어온 대공 발라딘 블라드, 그는 상대가 단지 목걸이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순순히 목걸이를 넘겨줄 만큼 무르지 않았다.

이제 용제의 말을 검증해야 했다.

그래서 자기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목걸이를 내놓으라고 했던 키 큰 지구인에게 <성주의 메인보드>를 가져오라고 요구한 것이다.

발라딘 블라드도 그게 말도 안 되는 요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발라딘이 알기로, 에키나르타인이 아니라면 무사히 통과할 수 없는 저 방벽을 뱀파이어들이 넘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성주의 메인보드를 뽑아서 카라온 방벽의 작동을 멈추는 것.

용제의 말대로 그 키 큰 지구인이 뱀파이어들을 남쪽으로 데려다줄 수 있다면 그 정도 성과는 보여줘야 했다.

"흐... 흐흐."

낮게 웃는 발라딘 블라드의 눈가에서 피어난 보라색 기운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지구인의 행동은 상상을 초월했다.

성주가 마력 자원을 모조리 외부 포탑에 쏟아붓게 만들어서 내부 경비 장치와 마력 결계를 무력화하다니.

그런 게 가능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 후로 얼마간 미칠 듯한 포성이 이어졌다.

그리고 한순간, 뚝 하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짙은 흙먼지가 시야를 가리고 마력이 탔을 때 나는 매캐한 냄새가 훅 풍겨왔다.

조금 뒤 계곡을 오가는 밤바람이 흙먼지를 걷어갔을 때, 블라드가의 뱀파이어들은 볼 수 있었다.

오른손에 드론을 달고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지구인을.

그는 다른 손에 사람 머리통만 한 크기의 빨간 톱니바퀴를 들고 있었다.

그게 바로 AI 성주의 핵심 부품 <성주의 메인보드>였다.

* * *

쉬이이익

차가운 밤바람이 상원의 얼굴을 때렸다.

"성주의 메인보드. 생각보다 무겁네."

상원은 메인보드를 들여다보았다.

합금으로 된 매끈한 표면에 상원의 얼굴이 비쳤다.

그 얼굴이 순간 낯설었다.

긴 머리 아래로 눈을 빛내고 있는, 선이 고운 미남.

이게 정녕 나인가.

아니,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일곱 별의 왕관>을 이루는 <두 번째 별>을 얻으려면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했다.

두 번째 별을 얻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아이템, 이제 겨우 그중에서 두 번째 아이템과 교환하기 위한 아이템을 얻었을 뿐이다.

"오... 오오...."

멀리서 뱀파이어들이 탄성을 질렀다.

그들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상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주는 마력 자원을 포격에 쏟으면 내부 경비를 하지 못한다.

노트에 쓰여 있던 그 말처럼 방벽 내부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어떤 방해물도 없는 방벽 내부, 게다가 상원은 방으로 통하는 지름길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메인보드를 가져오는 건 정말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을 꺼내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이 쉬운 걸 못 해서, 그 긴 세월 동안 저 차가운 북방을 떠돌아다녔다는 말인가.

아니, 아니다.

승천 시험의 모든 답을 알고 있는 상원에게나 쉬운 일이다.

승천 시험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건 말 그대로 불가능한 과업이었다.

그런 수많은 과업들이 모여서 <일곱 별의 왕관>을 이룬다.

그 자체로 신격을 가진 칭호를 얻는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그 어떤 수호신도 두지 않고 신의 자리에 다다르는 것.

상원이 가진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아아... 메인보드...."

상원을 바라보는 발라딘의 눈가에 보라색 기운이 방울져 흐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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