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84화 (84/230)

제84화. 카라온의 방벽 (4)

수험자 나카무라 신스케는 끝도 없이 높은 카라온 방벽에 기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성지 <구마모토 성> 소속이었고, 동료들과 함께 차원문을 건너 드워프들의 도시 <프리바론>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서 <콘크리트 회장> 강상중이라는 괴물을 만났다.

그 작달막한 노인은 겉보기와는 달리 컴퓨터 같은 두뇌와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괴물이었다.

그는 엄청난 기세로 프리바론의 수험자들을 규합해서 12번 시험을 간단하게 치러냈고, 그 수하들을 모조리 드워프제 무구로 무장시켰다.

함께한 모두가 저절로 따를 수밖에 없는 카리스마였다.

그런 그가 자기와 같이 방벽을 건너갈 열두 명을 고를 때, 신스케는 당연히 자기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신스케의 두 다리는 미친 여자가 잘라버렸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그는 열두 명에 들어가지 못했다.

강상중이라면 당연히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불만도 없었다.

그저 다가올 죽음을 무력하게 기다릴 뿐.

지금 카라온 방벽 앞에는 신스케와 같은 처지의 수험자들이 몇십 명은 더 있었다.

"하아."

신스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입김이 흩어지는 밤공기 너머로 세 개의 달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빌어먹게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여기서 끝인가."

그때 신스케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저 멀리 지평선에 누군가가 나타난 것이다.

껑충한 그림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 수가 대여섯은 되어 보였다.

"누구지?"

신스케가 중얼거렸다.

그들은 언데드처럼 보이지 않았다.

비척거리지 않고 똑바로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험자일 가능성이 높은데, 도대체 어느 누가 언데드가 들끓는 이 밤에 항마진 밖을 돌아다닌단 말인가.

그때였다.

"!!"

신스케가 두 눈을 부릅떴다.

검은 그림자들이 축지법이라도 쓴 것처럼 순식간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어렴풋한 별빛 아래서도 그들의 모습은 선명하게 보였다.

껑충한 키에 마른 몸, 그리고 긴 귀가 엘프 같았다.

하지만 피부는 잿빛이었고, 두 눈에는 보라색 안광이 감돌고 있었다.

그들이 걸친 새까만 무구는 별빛마저 반사하지 않았다.

"왔군. 나무의 자식들."

무리의 가운데 선 자가 말했다.

흰 장발을 포니테일로 질끈 묶은 남자였다.

그 목소리를 듣고 신스케는 저들이 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그 목소리에선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릉

남자가 허리춤에 달린 검집에서 긴 검을 뽑았다.

이어서 부상 당해 누워있는 수험자에게 저벅 저벅 다가갔다.

그리고는 검을 거꾸로 들어 올려서 수험자를 향해 내리꽂았다.

쩍!

새까만 대검이 부상 당한 육체를 관통해 지면에 박혔다.

검에 꿰뚫린 수험자는 신음 소리마저 내지 못하고 절명했다.

"저게... 뭐야?"

뒤이어 펼쳐진 광경을 보며 신스케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흐읍."

남자가 검 손잡이를 쥐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수험자의 몸에서 보라색 기운이 검을 따라 뽑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보라색 기운은 검신에서 손잡이, 그리고 남자의 팔을 따라 올라가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남자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보라색 안광이 짙어졌다.

"후우."

남자가 숨을 뱉으며 검을 뽑아냈다.

검이 박혔던 수험자는 생기를 모조리 빨린 미라가 되어 있었다.

"이게 나무의 생기군."

남자의 얼굴에 황홀이 넘쳤다.

"포식들 해라."

남자의 말에 그 곁에 서 있던 자들도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저마다 검을 꺼내 수험자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간혹 내장을 모조리 토해내는 듯한 비명도 들렸다.

"시끄럽군."

그럴 때면 검을 든 자들은 수험자들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버리고는 남은 생기를 빨아먹었다.

"으... 으윽."

신스케가 신음을 뱉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언데드에게 죽는다 해도 저런 미라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차례차례 도륙이 이어지고 어느새 신스케의 순서가 다가왔다.

하얀 포니테일을 한 남자가 차가운 눈으로 신스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새까만 양손 검을 거꾸로 들어 올리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몸을 꿰뚫은 칼날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곧 칼날이 신스케의 생기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세포 하나하나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으... 으으윽!"

신스케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그때였다.

"발라딘 블라드 대공!"

누군가의 외침이 죽어가는 신스케의 귓가에 울렸다.

그 소리가 신스케가 탈락하기 전 들은 마지막 소리였다.

[승천 시험에서 탈락하였습니다.]

시험의 끝을 알리는 시스템 메세지가 떴다.

* * *

상원은 드론을 통해 방벽 앞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해가 지길 기다려 만나야 하는 자들이 바로 저들이었다.

아나르의 고대인들이 드높은 방벽을 세워 막고자 했던 북방의 망령들.

사람의 생기를 빨아먹으면서 영생을 이어나가는 존재들.

바로 아나르의 뱀파이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리더, 새하얀 머리를 질끈 묶은 뱀파이어 대공 <발라딘 블라드>가 <선지자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다.

"맛있게도 먹네."

드론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상원이 말했다.

뱀파이어들에게 있어서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수험자들의 생기는 더없는 별미였다.

수험자들을 잡아먹으면 잡아먹을수록 그들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라색 안광도 짙어졌다.

상원은 그들이 수험자들을 마음껏 포식하기를 기다렸다.

그래야 <발라딘 블라드>에게서 <선지자의 목걸이>를 보상으로 주는 퀘스트를 받을 수 있으니까.

저놈은 자기 기분이 좋아져야 남의 말을 들어볼 마음을 먹는 놈이었다.

힘으로 목걸이를 빼앗으려 들었다가는 도망쳐버릴 것인데, 뱀파이어들은 내빼는 속도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들이었다.

상원이 아무리 규격 외의 강자라 하더라도 아직 도망치는 뱀파이어를 따라잡을 능력은 없었다.

"생각해보니까 졸렬한 놈이네."

상원이 중얼거렸다.

노트에 적힌 글을 읽는 것만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상원은 발라딘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처음 나타날 때는 시체마냥 무표정이었던 자가 지금은 만면에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제 저놈에게서 퀘스트를 받을 수 있다.

"이제 슬슬 가볼까. 샤믹, 갑시다."

"옛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샤믹이 지면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사이 지기를 얼마나 빨아먹었는지 얼굴에 윤기가 줄줄 흘렀다.

"아우, 꿀잠 잤네요. 어 근데 이 아가씨는 누구예요?"

"아 저는...."

"신우주라고 합니다. 우리랑 같이 갈 거예요. 우주 씨, 여기는 샤믹 프란시스코."

상원은 간단하게 두 여자의 소개를 끝냈다.

"신우주 씨는 앞이 보이지 않아 이동이 어려우니, 샤믹이 업고 이동합니다."

"예? 아니...."

"그럼요, 문제없죠."

샤믹이 우주를 엉덩이 위에 올리고 끈으로 허리를 동여맸다.

샤믹이 키 큰 우주를 업은 모양새가 상원이 예상했던 것보다 퍽 안정적이었다.

"갑시다."

"넵 대장님!"

어느새 날아온 드론이 상원의 손목에 결합되었다.

상원은 드론에 매달려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샤믹이 강한 두 다리로 지면을 부수듯 박차며 상원을 따라왔다.

"발라딘 블라드 대공!"

상원의 목소리가 험준한 회색 산맥의 능선을 따라 메아리쳤다.

"흐으."

발라딘 블라드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

상원이 지척에 와서야 그 낌새를 알아차린 다른 뱀파이어들이 경계 태세를 취했지만 늦었다.

이미 상원은 발라딘 블라드의 코앞에 서 있었다.

"나에게 볼일이 있나, 나무의 자식이여?"

발라딘 블라드는 상원을 경계하는 다른 뱀파이어들과는 태도가 달랐다.

발라딘은 한껏 거만하게 웃어 보였다.

미처 다 흡수되지 않은 보랏빛 생기가 그의 숨결을 타고 흩날렸다.

"있지."

상원이 발라딘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발라딘은 키 큰 뱀파이어들 중에서도 큰 편이어서 상원과 눈높이가 거의 비슷했다.

상원이 발라딘의 목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선지자의 목걸이. 그건 당신 게 아니야."

상원의 손가락을 잠깐 빤히 바라본 발라딘이 껄껄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걸 원하나?"

발라딘의 물음에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제 비젤 카스파는 사라지기 전 자신을 상징하는 세 개의 물건을 대륙의 곳곳에 흩뿌려놓았다.

그 중 첫 번째가 파이에벨 최상층 수장고에 맡긴 <용제의 왕홀>.

두 번째가 뱀파이어 대공 발라딘 블러드에게 맡긴 <선지자의 목걸이>였다.

"그렇다면 순순히 주지 않을 거란 사실도 알겠지."

"그럼."

상원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용제 비젤 카스파는 자기 물건들을 맡겨두면서 말도 안 되는 퀘스트들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마치 그 퀘스트를 모두 깬 자만이 자기 물건들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것처럼.

파이에벨에서는 용제의 왕홀을 얻기 위해 중앙마나기관 제13구역을 가동시켜야 했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마나 결계 두 개를 해제하고 3급을 넘어서는 <살덩이 골렘> 수백 마리를 때려잡으면서.

1회차의 상원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 정도의 난이도였다.

선지자의 목걸이도 마찬가지였다.

발라딘 블라드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것이다.

발라딘이 손가락을 들어 방벽을 가리켰다.

"성주의 메인보드. 그걸 가져와."

발라딘의 말에 다른 뱀파이어들이 피식 피식 웃었다.

발라딘의 요구는 허약한 인간이 절대 수행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주의 메인보드란 <카라온의 방벽>을 운영하는 AI <성주>의 핵심 부품이었다.

메인보드가 있는 방은 <방벽> 내부의 한가운데 있었는데 거기에 닿는 건 뱀파이어들도 불능했다.

<카라온의 방벽> 자체가 뱀파이어들을 막기 위한 시설이었다.

방벽 외부를 지키는 마력포들은 웬만한 뱀파이어들을 한 방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강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설사 어떻게 방벽 안에 진입한다 해도 메인보드가 있는 방까지 가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방까지 가는 길은 미로처럼 복잡했고, 그 길은 삼엄하기 그지없는 경비 시설로 방어되고 있었다.

게다가 <카라온의 방벽>은 메인보드가 있는 방에 누군가 침입하면 셧다운 절차에 돌입하도록 프로그래밍 돼 있었다.

그 셧다운 절차에 돌입하는 짧은 시간 동안 메인보드를 봉인한 마나 자물쇠를 풀어야 했다.

한 단계 한 단계가 턱없이 어려운 삼중 잠금장치였다.

심지어 그 모든 일을 해가 뜨기 전에 마쳐야 했다.

해가 뜨면 뱀파이어들이 사라져버릴 테니까.

그러니까 발라딘의 말은 '목걸이는 주지 않겠다'에 가까웠다.

"그래. 간단하네."

상원의 대답에 뱀파이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너, 방금 한 게 무슨 말인지 알고 있나?"

"그럼."

발라딘의 물음에 내뱉듯 대답한 상원이 손등에 드론을 끼웠다.

"네놈들 같은 불멸자들은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상원이 드론을 붙이지 않은 손을 샤믹에게 내밀었다.

샤믹이 상원의 손을 잡았다.

"성주의 메인보드를 가져다주마. 단, 그때도 니 태도가 이런 식이면 너를 번갯불에 구워버리겠어, 발라딘 블라드 대공."

차갑게 말한 상원이 성벽을 향해 날아갔다.

푸는 게 불가능한 삼중 잠금장치, 그걸 푸는 건 상원에겐 너무도 손쉬운 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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