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카라온의 방벽 (3)
상원이 유성희를 처음 만난 건 1회차 때 엘프들의 마을 아보렐에서였다.
당시 아보렐의 수험자들은 하나교도와 반하나교도로 나뉘어 싸웠다.
백중세였던 싸움은 점차 반하나교도 쪽으로 기울어 갔다.
그러자 유성희는 자기 신도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그녀에겐 신도들을 모조리 잡아먹어서라도 반드시 승천하겠다는 독기가 있었다.
그걸 떠올린 상원은 원강수에게 <목숨받이 제웅>을 들려서 보냈다.
강상중과의 싸움에서 밀린 유성희는 반드시 원강수를 잡아먹을 테니까.
제웅의 효과는 그때 나타난다.
믿었던 교주의 손에 허무하게 죽어간 원강수의 사념이, 뿐만 아니라 교주에게 살해된 수많은 신도들의 원혼이 유성희에게 달라붙었다.
지금 유성희는 원혼들이 심어놓은 환청과 환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악명 높은 <육마귀>의 일원, 새하나의 증인 유성희는 그렇게 무너져갔다.
1회차 때 만난 유성희는 그 정도로 끔찍하지는 않았다.
너무나도 흐뭇하고 고소한 광경이었다.
* * *
"히히힛!"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유성희의 입가에 침 한 방울이 주륵 흘렀다.
하나교주인 그녀가 자기 손으로 직접 신도들을 남김없이 죽여버렸다.
악귀가 따로 없는 모습이었다.
"끅끅끅끅."
유성희가 몸을 기괴하게 비틀면서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강상중의 수하들을 쏘아보았다.
그들이 유성희의 다음 사냥감이었다.
"죽어... 죽어...."
중얼거리는 유성희의 단검에서 새빨간 검강이 뿜어져 나왔다.
검강은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고 선명했다.
유성희는 징표를 받은 신도들을 도륙해서 강해질 대로 강해진 상태였다.
지금 방벽 앞에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수험자는 없었다.
"끼히히히히! 죽여버릴 거야!"
사지를 제멋대로 내지르며 목표물을 향해 뛰어가는 유성희의 모습은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강상중의 수하들은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했다.
쩍!
시뻘건 검강에 단단하기 짝이 없는 드워프제 투구가 두부마냥 뚫렸다.
강상중의 수하 하나를 죽이는 데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쩍! 쩍!
"끄어어억..."
"으아아악!"
유성희는 양 떼 속에 뛰어든 호랑이마냥 전장을 종횡무진 누볐다.
그녀의 칼날은 한 치 오차도 없이 수험자들의 미간을 꿰뚫었다.
"으... 으으...."
주저앉은 김만웅이 신음 소리를 냈다.
박명희의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야인의 결투장>을 해제해버린 그 찰나의 실수가 이 사달을 냈다.
그 죄책감과 당혹감에 유성희에 대한 공포까지 김만웅을 짓눌렀다.
그때였다.
"이! 멍청한 새끼들!"
엄청난 노호성이 전장 가득 울렸다.
<잠든 모노리스> 꼭대기의 권좌에 앉은 강상중이 잔뜩 진노한 얼굴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히이이이?"
그 기세에 유성희마저 고개를 돌렸다.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침을 퉤 뱉은 강상중이 유성희가 있는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권좌 바로 앞 바닥이 열리면서 작은 기둥이 올라왔다.
광택 없는 짙은 회색 기둥 위에는 초록색으로 빛나는 보주가 올려져 있었다.
그게 바로 <잠든 모노리스>의 무기, 상원의 1회차 때 아보렐의 수험자들을 남김없이 갈아버렸던 <영원의 보주>였다.
"잔치는 여기서 끝내자고."
권좌에 거만하게 앉은 강상중이 보주에 손을 댔다.
그러자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녹색 광선이 보주로부터 유성희를 향해 쇄도했다.
쾅!
광선이 작렬하면서 강한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가 일었다.
유성희의 주변에 있던 수하들까지도 폭발에 휘말릴 정도로 대단한 위력이었다.
유성희는 간발의 차로 광선을 피했지만 무사하지는 못했다.
잔뜩 불어난 능력치 덕에 피떡 신세가 되는 건 면했지만 몸 여기저기서 선혈을 흘리고 있었다.
"크으으으으!"
유성희가 사지를 이리저리 내던지며 모노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 막아!"
퍼뜩 정신을 차린 김만웅의 명령에 수하들이 유성희를 막아섰지만 허사였다.
몇은 몸으로 튕겨내면서, 몇은 단검으로 꿰뚫어버리면서 유성희는 번개처럼 강상중을 향해 내달렸다.
"크윽! 씨발!"
강상중이 욕을 뱉으며 <영원의 보주>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보주가 광선 몇 발을 더 내질렀다.
하지만 그 광선들은 모조리 빗나가버렸다.
오히려 거기 휘말린 부하들만 피떡이 되었을 뿐.
휘이익
바람처럼 내달린 유성희가 강상중의 코앞까지 쇄도하는 데는 찰나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기괴하게 비틀어진 유성희의 얼굴이 강상중의 눈동자에 가득 찼다.
"허... 이런."
강상중이 중얼거렸다.
푹!
선혈만큼이나 새빨간 검기가 강상중의 몸통을 꿰뚫었다.
"어... 어!"
"회장님!"
그제야 사태를 인식한 부하들이 소리를 질렀다.
"으... 그극...!"
강상중의 입에서 시뻘건 선지피가 울컥 흘러나왔다.
강상중이 즉사를 면한 건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유성희의 칼날은 정확히 강상중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오다가 별안간 기세가 꺾이며 강상중의 배를 찔렀다.
"으... 으으...."
털썩
유성희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눈과 귀, 코와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몸속에서 들끓는 힘과 저주를 더 버텨내지 못한 것이다.
유성희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육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의 한계는 극명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신도를 잡아먹는 속도를 조절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목숨받이 제웅> 때문에 제정신을 잃어버리면서 유성희는 단기간에 몸이 버틸 수 없을 정도의 힘을 쌓았다.
그 반작용이 이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심지어 수많은 하나교도들의 원념이 담긴 저주의 힘까지 함께.
"그그극... 그그그극...."
바닥에 엎드린 유성희가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초점을 잃은 눈을 뒤룩뒤룩 굴리면서.
그러기를 얼마쯤, 마침내 유성희가 피를 한 움큼 내뱉으며 절명했다.
"맙소사."
아연실색한 강상중이 헐떡거리며 유성희를 내려다보았다.
시신의 사지가 잔뜩 뒤틀려 있었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기괴한 웃음은 어쩐지 황홀해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아포칼립스 전부터도 수많은 시신을 보아 왔지만 이 정도로 끔찍한 죽음은 처음이었다.
"무시무시하네."
강상중이 식은땀을 흘리며 씩 웃었다.
그의 배에서 쏟아진 피와 흘러나온 소변이 바지를 줄줄 적셨다.
그 누가 <콘크리트 회장> 강상중을 이 꼴로 만든단 말인가.
이건 분명히 경고였다.
이 죽음 뒤에 누군가가 개입돼있다면, 아니 반드시 개입돼있을 터인 누군가는 강상중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동시에 잔인한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이 자객을 보낸 누군가는, 강상중의 목숨을 거두기 직전 자기가 보낸 자객을 손수 끔찍한 꼴로 죽여버리는 일까지 저지르는 자였다.
"알아서 기라는 건가."
강상중이 하늘을 향해 한숨을 쉬었다.
"회장님! 회장님!"
부하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권좌를 향해 올라왔다.
그 선두에는 그의 오른팔 김만웅이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김만웅이 강상중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철썩!
강상중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김만웅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너 이 새끼."
"회... 회장님. 죄송합니다."
김만웅이 얻어맞은 강아지마냥 낑낑거렸다.
"이딴 실수, 다시는 용납하지 않겠다."
강상중이 살벌한 얼굴로 말했다.
"예, 예 회장님. 뭐해! 의료팀 빨리 올라와!"
김만웅이 신속하게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하늘을 올려다보던 강상중이 눈을 감았다.
왠지 상원은 강상중과 눈을 맞추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엔딩 크레딧이라도 올라와야 되는 거 아닌가."
전장을 지켜보던 상원이 말했다.
<새하나의 증인> 유성희, 그녀의 몰락은 통쾌할 정도였다.
사실 <목숨받이 제웅>의 효과가 그 정도로 강하리라고는 상원조차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차하면 유성희를 그대로 구워버릴 생각으로 드론을 대기시키고 있던 참이었다.
공교롭게도, 유성희는 강상중에게 치명상을 입히고선 절명했다.
그건 상원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여하튼 새하나의 증인 유성희는 이렇게 탈락했다.
원강수와 박명희, 그리고 박준배도 함께.
몇 개의 시험을 헤쳐오면서 정이 좀 들기도 했지만 상원에겐 아무 일도 아니었다.
상원은 전생을 통틀어 62개의 시험을 거치면서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보았다.
정이 들었다고 그들의 죽음을 일일이 기억하고 반응하기엔 그의 마음은 너무나 무뎌져 있었다.
이제 그런 건 상원에게 별다른 감정적 동요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중요한 건 향후 어떤 변수가 될 지 모를 유성희를 치워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강상중이 치명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승천 시험에서 그 정도 상처는 누구에게든 위험하다.
그러므로 강상중은 한동안 제 맘대로 세력을 불리지 못하고 운신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눈치 빠른 강상중이라면 유성희의 죽음에 배후가 있다는 걸 직감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 측근인 김만웅은 상원의 사람이다.
이 정도면 밑작업은 충분히 해 두었다.
<잠든 모노리스> 정도면 14번 시험을 풀어나가는 데 최적의 장기말이다.
쿠구구구.
모노리스가 땅속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상원이 귀에까지 들려왔다.
하늘 저편으로 서서히 일몰이 다가오고 있었다.
밤이 오기 전에 방벽을 지나려는 것이었다.
강상중은 자신과 함께 방벽을 지나갈 열둘을 추렸다.
그들 중 부상자는 없었다.
단 한 명, 김만웅을 제외하고는.
강상중은 사람을 가차 없이 부렸다.
그런 강상중이 김만웅을 챙긴다는 건 김만웅이 그만큼 강상중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방벽 바닥쯤에 조그만 문이 열렸고 그 사이로 밝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게 방벽을 지나가는 길이었다.
강상중과 김만웅, 그리고 그의 수하들이 한 줄로 방벽을 지나갔다.
"조만간 봅시다, 회장님."
상원이 멀어지는 강상중을 보고 말했다.
그때였다.
"저."
누군가 상원에게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키 큰 여자가 서 있었다.
바로 살아남은 유일한 하나교도, 신우주였다.
"저를 부른 게 당신인가요?"
신우주의 하얀 눈동자가 상원을 보았다.
그녀는 초목의 목소리를 통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네."
거짓말이었다.
사실 그녀를 부른 건 땅속에 들어가 있는 샤믹이었다.
지금 샤믹은 대지의 힘을 어마어마하게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신우주는 그걸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라고 착각한 것이다.
그런 것까지 신우주에게 알려줄 이유는 없었다.
"왜죠?"
"당신을 살리려고요."
상원은 그녀의 하얀 눈을 바라보았다.
"거기 남아 있었으면 당신은 분명 죽었을 겁니다."
또륵
상원의 말에 신우주의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상원은 1회차 때도 그녀를 만났다.
하나교도들과 목숨을 건 결전을 벌였던 아보렐에서였다.
신우주는 다른 하나교도들과 달리 교주에게 충성하지도 않았고, 새하나의 비전에 투철한 것도 아니었다.
신우주가 유성희를 따른 건, 그녀가 그저 세상에 남은 유일한 혈육이었기 때문이었다.
상원은 1회차 때 그녀에게서 그 긴 이야기를 들었고, 그때 들은 이야기들을 하나교도로 위장하는 데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50번의 시험을 다시 거쳐 신우주를 만난 것이다.
상원은 신우주가 반드시 자기를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수호신 <최초의 수확자>가, <가라앉은 거인>이 지기(地氣)를 있는 대로 빨아먹는 걸 느끼지 못할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살려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단 하나, 그녀의 수호신이 주신급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그때였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신우주의 말을 끊었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방벽 쪽이었다.
방벽 앞에 지금껏 보지 못했던 껑충한 그림자들이 아른거렸다.
"왔군."
<두 번째 별>을 달성하기 위해 얻어야 하는 두 번째 아이템 <선지자의 목걸이>.
그걸 가진 자들이 나타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