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82화 (82/230)

제82화. 카라온의 방벽 (2)

카라온 방벽 앞에 거대한 피라미드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게 바로 강상중의 성현 <잠든 모노리스>였다.

그 앞에 선 유성희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허어."

<하늘불꽃 드론>을 통해 방벽 앞 상황을 살펴보던 상원이 한숨을 쉬었다.

1회차 때는 저 자리에 유성희가 아니라 상원이 서 있었다.

62개의 시험을 헤쳐나오면서도 그 정도로 위협적인 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만큼 잠든 모노리스는 강력한 성현이었다.

육마귀 중 하나인 유성희도 강하긴 하지만 강상중을 이길 수는 없다.

그러므로 유성희는 여기서 강상중의 손에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강상중은?'

사실 강상중을 처리하는 것 자체는 쉬웠다.

드론을 보내서 저격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러면 <잠든 모노리스>라는 강력한 성현을 쓸 수 없게 되고, 염두에 둔 <두 번째 별> 획득 루트의 14번 시험 공략 난이도가 급상승하게 된다.

"그럴 것까진 없지."

상원은 기지개를 펴고 누웠다.

해 지는 하늘 멀리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상원은 유성희와 강상중이 서로 싸워서 너덜너덜해지는 걸 지켜보기로 했다.

원래 X밥 싸움만큼 재밌는 게 없는 법이다.

* * *

솟아오르는 피라미드 꼭대기에 선 강상중이 껄껄 웃었다.

"고 반반한 얼굴에 흠집 내기 그렇지만 어쩔 수 없지."

철컥

피라미드 아래쪽에 달린 문이 열리면서 무장한 사람들이 우루루 튀어나왔다.

투구가 안면까지 가려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착용한 무기와 갑옷은 하나같이 검정색에 가까운 회색에 광택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프리바론>의 드워프 대장장이들의 물건이었다.

"으윽...!"

유성희가 신음을 흘렸다.

피라미드에서 병력이 튀어나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적이 두 배로 불었다.

명백한 오판이었다.

그냥 항복하고 걸어서 회색 산맥을 넘는 게 나았을까.

아니다, 그랬다가는 13번 시험을 도저히 깰 수 없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 한다고 뭐가 달라져."

중얼거린 유성희가 까드득 이빨을 갈았다.

그녀가 주먹을 쥐자 빠드득 하는 뼛소리가 났다.

"성도님들, 우리 새하나의 품으로 갑시다."

"하나된 영광을 위하여."

유성희의 말에 하나교도들이 답창하면서 그녀의 곁으로 늘어섰다.

유성희의 손끝에 화염과 얼음, 번개, 그리고 독과 바람까지 여러 기운들이 맴돌고 있었다.

원강수도, 박명희도, 그녀의 곁에 선 신도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하나교도들이 교주의 성현 <성년의 징표>를 통해 스킬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허어, 참 재밌는 재주를 가지셨네."

강상중이 <씹는 확성기>를 질겅거리며 말했다.

"쳐라."

강상중의 짧은 말 한마디가 묵직하게 울렸다.

"으아아악!"

모노리스에서 나온 병력들과 상중의 곁에 있던 수험자들이 노호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쏴!"

유성희의 외침에 하나교도들이 일제히 스킬을 쏘았다.

퍼버벙!

화염구며 얼음살 같은 스킬들이 달려드는 수험자들에게 작렬했다.

"끄아아악!"

수많은 수험자들이 쓰러졌다.

하지만 드워프제 무구를 걸친 병력의 기세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드워프제 무구의 항마력은 대단한 수준이었다.

"젠장!"

유성희가 욕지거리를 뱉으며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아보렐에서 얻은, 엘프의 마력이 깃든 물건이었다.

거기에 검기를 불어넣자 붉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뻗어 나왔다.

"우리 모두 하나의 품으로!"

유성희가 허공을 향해 검기를 휘둘렀다.

"으아아악!"

유성희를 따라 저마다 무기를 뽑은 하나교도들이 돌격했다.

곧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처절한 비명 소리가 계곡 가득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

성역 서울역에서 이계 아나르로 건너온 수험자 열 명, 그중 김만웅과 짝을 지어 건너온 사이 김만웅의 부하 박준배였다.

퍽!

박준배의 방망이가 하나교도의 머리통을 부쉈다.

다음 상대를 찾는 박준배의 눈에 전장을 휘젓고 있는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한 번에 수십 가지 스킬을 쓰면서 아군을 애먹이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적들이 쓰러질수록 강해지는 것 같았다.

하나교주 유성희였다.

"이야아아악!"

저런 술사들에게는 거리를 주면 안 된다.

빠르게 판단한 준배가 기합을 지르며 유성희를 향해 달려들었다.

박준배와 유성희의 눈이 마주쳤다.

콰과과광!

순식간에 몇 개의 스킬이 박준배의 갑옷을 때렸다.

하지만 박준배는 그 정도로 흔들릴 피지컬이 아니었다.

곧 유성희 앞에 선 박준배가 그녀의 머리통을 향해 방망이를 휘둘렀다.

쩍!

"!!"

믿을 수 없다는 듯 박준배의 눈이 벌어졌다.

술사인 유성희가 뽑아낸 붉은 검기가 단단하기 그지없는 드워프제 갑옷을 꿰뚫은 것이다.

웬만한 전사들을 한참 뛰어넘는 실력이었다.

"그르륵...!"

검기에 심장을 그대로 꿰뚫린 준배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준배야!!"

그때 쩌렁쩌렁한 소리가 전장에 울렸다.

이어서 반투명한 보라색 막이 유성희를 삼켰다.

김만웅의 성현 <야인의 결투장>이었다.

야인의 결투장은 지정한 상대 이외의 대상은 막 바깥으로 밀어내는, 1:1을 강제하는 스킬이었다.

"오... 오?"

"어어??"

주변에서 싸우던 하나교도들과 강상중의 수하들이 넋을 잃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야인의 결투장의 부가 효과였다.

바로 주변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해서 강제로 구경꾼으로 만드는 것.

그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김만웅의 전투력이 올라갔다.

"네년... 곱게는 못 죽는다."

드워프제 검에서 보라색 검강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개성 <귀기를 담은 연장>이었다.

"호오?"

강상중이 흥미로워하는 눈으로 김만웅과 유성희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또 무슨 장난이냐?"

얼굴을 잔뜩 찡그린 유성희의 손끝에 다섯 개의 스킬이 맺혔다.

다음 순간 스킬들이 폭사했다.

콰과과광!

스킬들이 지면을 때리며 강렬한 폭발음이 났다.

드워프제 무구를 걸쳤다고 해도 맞으면 무사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하지만 그 스킬들은 김만웅을 스치지도 못했다.

상원 밑에 있으면서 잘 큰 김만웅의 능력치는 1회차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던 데다가, 주변에 있는 수많은 구경꾼들이 김만웅의 능력치를 부풀려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만웅이 유성희의 가슴께까지 파고들 때까지 유성희는 반응하지도 못했다.

서걱!

김만웅의 칼날이 유성희의 몸을 베었다.

"커억!"

유성희가 피를 뱉으며 쓰러졌다.

그때 누군가 애타게 막을 두드렸다.

"총재님! 총재님!"

박명희가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막을 두드리며 펑펑 울고 있었다.

"어... 어? 명희 누님? 누님이 왜 여기서...?"

김만웅이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툭 하고 맥이 풀리듯, 막이 사라졌다.

"아이고 총재님! 총재니임!“

박명희가 줄줄 울면서 쓰러진 유성희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의 손에서 새하얀 치유의 기운이 빛나고 있었다.

"야! 김만웅이 이 새끼야! 뭐 하는 거야!"

순간 천둥 같은 음성이 들렸다.

강상중이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소리치고 있었다.

* * *

"허."

드론으로 전장을 살펴보던 상원이 헛웃음을 지었다.

뱀 같은 강상중이 그 정도로 이성을 잃을 줄이야.

그건 그만큼 강상중이 김만웅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걸 방증했다.

곧 있으면 김만웅에게 준 <전음 소라기>도 쓸모를 발휘할 것이다.

그러면 14번 시험에서 저 강력한 모노리스를 쓸 수 있게 된다.

역시 김만웅을 구슬려두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상원은 다시 전송되는 전장 상황에 집중했다.

* * *

그때였다.

누구도 믿지 못 할 일이 일어났다.

유성희의 손이 박명희의 심장을 꿰뚫은 것이다.

"초... 총재님...?"

의문에 가득 차 있던 그녀의 눈이 곧 빛을 잃었다.

"후우우.“

유성희가 한숨과 함께, 칼에 베인 치명상이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유성희의 개성 <그물 금자탑의 정점>, 그 효과를 보는 것이었다.

바로 징표를 가진 자를 직접 죽여서 그 신도가 공유해주는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

유성희는 박명희를 죽여서 박명희가 주는 치료의 힘을 극대화한 것이었다.

박명희는 이대로 희생시키기엔 아까운 인재였다.

하지만 이 고비를 넘기려면 박명희를 잡아먹을 수밖에 없다, 그게 유성희의 판단이었다.

"총재님...?"

"초... 총재님...."

하나교도들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유성희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믿고 따르던 총재, 새하나의 증인이 신도를 죽이다니?

"아이고, 아이고... 명희! 세상에...."

원강수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달려왔다.

그렇게 달려오는 원강수의 꼴이, 유성희는 너무나도 미웠다.

이 자는 여기서 죽이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이 쓸모없는...."

쩍!

유성희의 칼날이 원강수의 심장에 박혔다.

원강수의 스킬과 능력치가 유성희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전장의 모습 하나하나가 세밀하게 보였다.

노호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김만웅의 모습까지도.

박준배, 박명희, 원강수.

한순간에 동료 셋을 잃은 김만웅은 이성을 잃은 채였다.

물론 스킬을 쓰지 않은 김만웅은 신도 둘을 잡아먹은 유성희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대로 달려들었다면 김만웅 또한 박준배와 같은 꼴이 되었을 것이다.

쾅! 쾅!

강상중과 유성희의 사이에서 강렬한 폭발과 함께 먼지가 흩날렸다.

모노리스의 경고 사격이었다.

"너 이 새끼! 정신 안 차려!"

강상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 *

유성희가 원강수를 베는 걸 본 상원이 씩 웃었다.

"이제 힘을 발휘할 때가 됐다."

발휘할 힘이란, 출발 전 원강수의 품에 넣어두었던 물건, <목숨받이 제웅>의 힘이었다.

제웅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그 효과는 소유자가 살해되었을 때 발휘된다.

바로 살인자에게 소유자의 원한을 담은 저주를 내리는 것.

그 저주는 터무니없이 강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저주만으로 사람이 죽을 정도였다.

이제 원강수의 원념이 유성희에게 쏟아질 것이다.

유성희는 꽤나 강한 수험자이니 그 저주만으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유성희는 최악의 방법으로 자멸할 것이다.

* * *

"으... 으으?"

유성희가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저주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땡그렁 소리와 함께 그녀가 들고 있던 단검을 떨어뜨리고는 주저앉아 머리를 싸맸다.

그녀는 환청을 듣고 환각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원강수의 힘을 받아서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감각으로.

원강수의 원념이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어...? 총재님?"

"갑자기...?"

하나교도들도, 강상중의 부하들도 그 갑작스런 상황에 넋을 잃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한순간 떨림이 멈췄다.

섬찟한 정적이 전장을 덮쳤다.

"히... 히히...."

유성희가 희번덕거리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 그래, 모두, 모두... 죽여버릴 거야...."

수험자들은 한눈에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아아악!“

단검을 주운 유성희가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목표물은 같은 하나교도였다.

푹!

"컥!"

하나교도가 절명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키... 히히힉."

제정신을 잃은 유성희가 광소를 흘리며 하나교도들을 도륙했다.

그럴수록 그녀의 능력치도 스킬도 높아졌다.

그녀가 아군을 도륙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솜씨는 점점 정교해졌다.

이제 그녀는 눈에 잡기도 어려운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하나교도들을 모조리 도살하고 나면?

그다음 그녀의 칼날이 향할 곳은 강상중이었다.

먼 곳에서 상원은 유성희의 발광을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