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카라온의 방벽 (1)
<일곱 별의 왕관>을 이루는 일곱 업적은 일반적인 진행으로는 사실상 달성할 수 없다.
첫 번째 별인 <네 번째 문의 봉인자>를 얻는 조건은 7번 시험의 델타 루트에서 마신 <태초의 대족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두 번째 별도 그에 못지않았기에 섬세하고 꼼꼼한 준비가 필요했다.
두 번째 별을 얻기 위한 동선을 꼼꼼히 체크한 결과, 상원은 아이템 세 개를 반드시 얻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중 첫 번째 <용제의 왕홀>은 상원의 수중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다음 물건이 바로 저 공간이동진 건너편에 있었다.
상원은 공간이동진에 발을 올렸다.
그러자 공간이동진이 작동하면서 섬광과 함께 짙은 연기가 눈 앞을 가렸다.
공간이동진 건너편은 파이에벨보다 훨씬 위도가 낮았기에 공간이동진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발밑이 단단한 돌바닥으로 변했다.
연기가 걷히자 높은 능선들이 겹겹이 이어진 산맥이 펼쳐졌다.
험준한 바위산의 날카로운 봉우리들이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하늘 저 멀리서 매 한 마리가 꺄악 하고 울었다.
“오랜만이군. 카라온 협곡.”
상원이 능선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지 <다림델>의 북쪽에는 드높은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회색 산맥>이 자리 잡고 있었다.
회색 산맥은 높기도 워낙 높은 데다 지형도 험악해서 인간의 몸으로 건너기는 불가능했다.
그 회색 산맥을 횡단할 수 있다고 알려진 유일한 통로가 지금 상원과 샤믹이 서 있는 <카라온 협곡>이었다.
"우와.“
상원을 뒤따라온 샤믹이 탄성을 질렀다.
상원은 고개를 돌렸다.
끝도 없이 높은 바위산 사이의 협곡을 통째로 막고 있는 인공물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댐처럼 생긴 석조 건축물의 표면은 빼곡한 마법 문자로 덮여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난 구멍에는 포대들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저게 방벽인가요?"
"그렇습니다."
<카라온 방벽>.
오랜 옛날 미스미엘의 성직자들이 북방을 떠도는 망령들로부터 성지를 지키기 위해 세운 방벽이었다.
마법 문자로 보호되는 방벽의 표면은 웬만한 마력으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었고 설치된 포탑들에는 고위 공격 주문들이 걸려 있었다.
심지어 카라온 방벽은 무인 시설로서 <성주>라는 AI가 관리하는 터라 24시간 내내 경계 태세가 풀어지지도 않았다.
웬만한 대군을 끌고 온다 해도 함락할 수 없는 무적의 요새, 그게 카라온 방벽이었다.
우습게도 그 카라온 방벽이 성지로 가려는 수험자들을 막고 있었다.
그때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열세 번째 시험 <성지 집결>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부터 72시간 이내에 성지 <다림델>에 도착해야 합니다.]
[주어진 시간 내에 성지에 도착하지 못할 경우 항마진에서 추방됩니다.]
[남은 시각: 71시간 59분]
“쉴 틈을 주지를 않는군.”
상원이 중얼거렸다.
"성지에 도착해야 한다면... 저 방벽을 지나가면 되겠네요!"
"아니오."
"예? 왜요?"
상원이 방벽 앞을 가리켰다.
작은 점들이 개미같이 바글거렸다.
그들은 상원보다 먼저 카라온에 도착한 수험자들이었다.
"저 벽으로는 딱 열세 명만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 말을 할 때 상원의 머릿속에 어떤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엘프들의 숲 <아보렐>로 갔던 1회차가.
새하늘교의 노트에는 아나르의 전송지점에서 치르게 되는 시험의 난이도와 보상이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수많은 전송지점들, 그중에서도 아보렐은 독보적이었다.
높지 않은 난이도와 파격적인 보상.
난이도는 턱없이 높은데다 보상마저 변변찮은 파이에벨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 향했던 아보렐은 사실은 사지였다.
거기서 <새하나의 교주> 유성희를 만난 것이다.
잔뜩 힘을 쌓은 유성희는 아보렐의 수험자들을 모조리 잡아먹으려고 들었다.
아보렐은 새하나교와 반새하나교 세력의 전면전으로 피바다가 됐다.
무수한 고생 끝에, 상원은 결국 유성희를 처리했다.
하지만 불운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소수의 수험자들이 13번 시험을 치르러 <카라온 방벽>에 왔을 때, 드워프들의 도시 프리바론에서 출발한 <콘크리트 회장> 강상중 일당을 맞닥뜨린 것이었다.
그때도 카라온 방벽의 AI, <성주>는 단 열세 명만 들여보내겠다고 선언했다.
평화롭게 방벽을 건널 방법 같은 건 없었다.
두 세력의 전면전이 발발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보렐에서 온 수험자 한 줌은 강상중에게 무참히 살해됐고, 간신히 목숨만 건진 상원은 노트에서 보았던 비밀 통로를 따라 이동해 겨우 시간에 맞추어 13번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때 생각을 하니 입안이 조금 씁쓸해졌다.
“내가 저기 있었단 말이지.”
상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아보렐 세력을 이끌고 강상중과 대립하는 건 조상원이 아닌 유성희였다.
그리고 상원은 장기말이 아닌 구경꾼으로서 그들이 서로 싸우며 공멸하는 걸 지켜볼 것이다.
"저희는 어부지리를 노리는 건가요?“
샤믹의 물음에 상원이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저곳을 지나가지 않습니다.“
샤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그럼 13번 시험 못 깨는 거 아니에요?"
샤믹의 말에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13번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시험이 아니었다.
그저 14번 시험이 시작하기 전에 성지에 닿으면 될 뿐.
애초에 상원이 그린 동선에는 카라온의 방벽 통과가 들어있지 않았다.
"그럼 우리 여기 왜 온 거예요?"
"만날 사람이 있거든요. 여기서 밤까지 기다릴 겁니다.“
밤에 오는 손님.
두 번째 별을 얻기 위해 필요한 두 번째 아이템을 가진 자.
샤믹이 입술을 오므렸다.
"밤에 오는... 잠깐만, 항마진 바깥에는 언데드가 들끓는다면서요."
"맞습니다."
상원의 말에 샤믹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여기서 언데드들이랑 밤을 새워야 된다는 말이에요?"
"걱정 마세요. 위협이 될 만한 놈은 없으니까."
그렇다.
고작해야 13번 시험이다.
이 주변에 상원과 샤믹에게 위협이 될 만한 개체는 없었다.
"아이 참... 징그러운데....“
샤믹이 몸을 비비 꼬았다.
"마력을 모으십시오. 이따가 깨워드리겠습니다.“
상원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네...."
시무룩하게 대답한 샤믹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통째로 들어갈 만큼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다.
샤믹이 힘을 충전하기 위해 구덩이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 사이 상원은 하늘로 드론을 날렸다.
카라온의 방벽으로 온 목적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유성희와 강상중이 공멸하는 걸 지켜보는 것이었다.
유성희와 강상중, 둘 다 상원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서로 싸우며 공멸하는 걸 지켜보는 것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다.
“뭐,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같기는 하다만.”
상원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비잉
하늘 높이 솟아오른 드론이 점멸했다.
그와 함께 방벽 앞 전장의 실황이 실시간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 * *
중년 여인이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치고는 예쁘장한 얼굴이었지만 얼굴에 잔뜩 낀 피로는 짙은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녀가 바로 <새하나의 증인>, 하나교 교주 유성희였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너른 분지의 왼쪽으로는 깎아지르는 협곡 사이를 가로막은 거대한 방벽이 서 있었다.
그게 바로 아보렐의 엘프들이 이야기했던, 누구도 넘지 못한다는 <카라온의 방벽>이었다.
유성희는 방벽에 처음 도착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간단하게 통과할 수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성주는 수험자들이 접근하자 통과를 불허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 메시지를 무시한 수험자가 방벽 가까이 다가가자, 포대가 뿜어낸 강력한 마력탄이 수험자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그래서 접근을 멈추고 기다리다 보니 또 다른 수험자 무리가 도착해서 진을 친 것이다.
그제서야 성주가 메시지를 보냈다.
여기 모인 모든 수험자들 중 단 13명만 방벽을 통과할 수 있다고.
그게 몇 시간 전 이야기였다.
"후우."
전장 저 멀리 지는 석양을 본 유성희가 한숨을 쉬었다.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 넘어온 <아나르>라는 이 빌어먹을 이세계의 밤은 언데드들이 들끓는 지옥이었다.
이제 시간이 없었다.
밤이 되기 전에 저 방벽을 지나가야 했다.
"총재님."
한 여자가 유성희를 불렀다.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키가 유성희보다도 컸는데, 앞을 볼 수 없는 두 눈동자가 하얬다.
그녀가 바로 유성희가 가장 아끼는 신도 <신우주>였다.
동시에 그녀는 유성희가 가장 껄끄럽게 여기는 신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유성희를 포함한 신도들 중 가장 강력한 수호신을 가졌으며, 그래서 유성희가 그녀의 스킬을 공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첫 시험이 시작됐을 때부터 유성희는 징표를 받은 신도들의 스킬을 공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우주의 스킬만큼은 공유하지 못했다.
신도들이 뒤에서 수군대는 걸 알았을 때, 유성희는 신우주가 지금 당장 새하나가 되기엔 너무나 고등한 존재인 <별의 아이>라고 선포함으로써 상황을 무마했다.
"오고 있어요."
그녀는 저 먼 곳에 시선을 두고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풀들이 전해주는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그게 바로 유성희가 끝내 공유받지 못한 스킬, 신우주의 개성 <초목의 소리>였다.
유성희가 너의 스킬도 가지고 싶다는 탐욕스런 눈빛을 신우주에게 보냈다.
"총재님, 총재님! 어이구... 이것 좀 보시죠."
헐레벌떡 원강수가 달려와 유성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느리기는."
유성희가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원강수의 특기인 정찰은 신우주에게 한참 미치지 못했다.
유성희가 신우주의 스킬을 공유받을 수 있었다면 원강수 같은 떨거지는 진작에 버렸을 것이었다.
"아이님, 감사합니다."
유성희가 자애로운 미소를 가득 머금고 원강수의 손을 잡았다.
<멀리보기>를 공유받아 한껏 트인 시야에 저 멀리 상대편 수험자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든 날붙이며 쇠몽둥이가 흉흉한 빛을 내뿜었다.
유성희가 다시 방벽을 올려다보았다.
누가 저 방벽을 지나가는 열셋이 될 것인가.
유성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수십 명의 하나교도들이 강강수월래를 하듯 커다란 원을 그리고 서 있었다.
"하나된 영광이 함께."
"하나된 영광이 함께."
신도들의 목소리는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아서 하나의 목소리가 여러 개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신실한 간호사 박명희를 비롯해 수십 명에 달하는 하나교도 신도들이 다가올 전투에 대비해 기도하고 있었다.
이들 하나하나가 유성희의 무기였다.
"반드시 승천할 거다. 정 안되면 이들을 모두 버려서라도."
유성희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안녕들 하신가."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산등성이를 따라 메아리쳤다.
유성희가 실눈을 뜨고 전장 저쪽을 바라보니 목소리의 주인공이 보였다.
박력 있는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등산복 차림의 작달만한 노인이었다.
그는 소모성 아이템인 <씹는 확성기>를 질겅거리고 있었다.
"굳이 우리가 싸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서로 피 보지 말자고."
노인이 허허 웃었다.
미간을 일그러뜨린 유성희가 확성 스킬이 있는 신도의 손을 잡고 소리쳤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건가요? 이쪽 여섯 그쪽 일곱?"
"응? 무슨 소린가. 우리가 지나갈 테니 그쪽은 가만히 계시게. 그럼 오늘 밤 예쁜 달은 볼 수 있을 거야."
노인의 목소리를 듣자 등골을 타고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인간이 아닌 악마의 목소리 같았다.
"지랄."
으드득 이를 간 유성희가 외쳤다.
"좋아, 좋아. 대답은 잘 알겠네."
노인이 등을 돌렸다.
쿠구구구
뒤이어 땅속에서 굉음과 함께 거대한 형체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탑...?"
하나교도들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콘크리트 회장> 강상중, 그의 성현 <잠든 모노리스>가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