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용제의 왕홀 (6)
이계 아나르에도 히든 미션은 있다.
용제의 왕홀, 이게 파이에벨의 히든 미션이었다.
성공 조건은 제13구역 관리실에 에론 클라드를 데려가는 것.
그 보상이 바로 두 번째 별을 얻기 위해 반드시 얻어야 하는 세 아이템 중 하나인 <용제의 왕홀>이었다.
모든 조건은 달성되었다.
상원이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에론을 보았다.
에론은 벽에 붙은 패널들을 조작하면서 연신 감탄했다.
"맙소사... 이걸 이렇게 할 수가 있다고? 용제는 정말 천재였군요."
패널 하나를 조작하자 보라색 불꽃이 땅바닥에서부터 슝 하고 벽을 따라 타올라 천장의 구슬로 들어갔다.
그렇게 땅바닥에서 솟아오른 불기둥이 도합 일곱 개.
마침내 금단의 제13구역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파바밧 하는 소리와 함께 벽과 천장에 붙은 수백 개의 전구에 동시에 불이 들어왔다.
그 모습이 마치 밤하늘을 총총히 밝히는 별빛 같았다.
"이 불빛들... 파이에벨의 밤하늘이에요."
에론이 넋을 잃고 말했다.
그때였다.
후우웅
방구석의 바닥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익숙한 모양새, 공간이동 마법진이었다.
"갑시다 에론. 조합장을 만나러."
"아, 네.... 네."
상원이 공간이동진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경이에 찬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는 에론과 자꾸 말려 올라가는 옷자락을 꽉 붙잡은 샤믹이 그 뒤를 따랐다.
* * *
상원이 마법사 조합장 데릴 파호른을 만난 곳은 조합장실이 아닌 파이에벨 광장이었다.
제13구역 관리실의 공간이동진을 통해 이어진 곳은 마법사 조합 1층의 대기실이었다.
처음 왔을 때는 마법사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그 점에서 뭔가를 눈치챈 에론이 상원과 샤믹을 조합장실이 아닌 광장으로 이끌었다.
끼익
에론이 커다란 문짝을 밀자 상쾌한 바람이 밀려왔다.
쾌청한 하늘 아래 펼쳐진 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있었다.
"아... 아름다워요."
샤믹이 하늘 어딘가를 보고 홀린 듯 말했다.
선명한 보라색 불기둥이 흰색 산맥의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도시에 처음 들어올 때 보았던 마나 기둥이 불기둥으로 바뀐 것이었다.
그건 제13구역이 작동을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용제가 중앙마나기관의 가장 밑바닥에 꽁꽁 숨겨둔, 미래를 위해 안배한 큰 그림이었다.
정육면체 모양의 마법사 조합 건물들이 불기둥을 따라 회전했다.
건물들이 그리는 궤도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오... 오오!"
"오셨다! 오셨어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과 작업복을 입은 마나중앙기관의 작업자들, 그리고 평복을 입은 시민들이 세 사람을 맞았다.
"용사님 감사합니다!"
"대단해요!"
사람들의 환호성에 상원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왔다.
이제 겨우 1/4을 왔을 뿐이다.
하지만 어쨌든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으니까.
인파 사이에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하얀 로브를 차려 입은 중년 여인, 마법사 조합장 <데릴 파호른>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서 있으니 그녀의 키가 꽤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용사님들."
데릴이 상원과 샤믹을 보고 말했다.
그러자 시스템 메세지가 떴다.
[파이에벨의 마법사 조합장 <데릴 파호른>으로부터 용사로 인정받았습니다.]
[축하합니다. 열두 번째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어머나!"
샤믹이 팔짝팔짝 뛰며 소리를 질렀다.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데릴이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폭탄처럼 보였던 사람이 저런 웃음을 짓다니.'
역시나, 사람의 온유함은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다.
"2번 동력 장치를 셧다운 할거라길래 무슨 짓인가 싶었는데... 용사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13구역이 작동을 시작하니까... 2번 동력장치 같은 건 전혀 아쉽지 않네요."
데릴이 마법사 조합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용제는 왜 13구역을 꽁꽁 숨겨두었을까요?"
에론의 궁금증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토록 강력한 마력 기관을 도저히 손도 댈 수 없는 마력 결계와 강력한 살덩이 골렘들로 막아 놓은 이유가 무엇일까.
왜 신탁이 점지한 용사들이 와서야 그 퍼즐을 풀 수 있었을까.
상원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그 이유 역시 노트에 쓰여 있었으니까.
"13구역이 멸망을 앞당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원의 덤덤한 대답에 데릴과 에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중앙마나기관이 마나맥에서 뽑아내는 마력량이 늘었습니다. 그만큼...."
"그만큼, 이 대륙은 더 구미가 당기는 식사감이 된 거군요."
데릴 파호른이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그 주체가 누구인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상원도 에론도 데릴도 알고 있었다.
바스칸딘 황실이 아나르에 부른 존재.
하루 아침에 에키나르타 대륙을 언데드가 들끓는 생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자.
에키나르타 대륙에는 <불사의 왕>이라고 알려진, 승천 시험을 떠받치는 다섯 마신 중 하나 <연옥의 폭군>이었다.
에키나르타에 강림한 건 마신의 아주 일부일 뿐이지만, 그것까지 말할 이유는 없었다.
"앞으로의 밤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를 겁니다."
상원의 말에 데릴과 에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여기서 제가 할 일은 끝났습니다. 약속대로 용제의 왕홀을 주시겠습니까?"
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올라가시죠. 수장고 최상층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데릴이 앞장서서 마법사 조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 *
조합장실로 향할 때처럼 일행은 공간이동진을 밟고 이동했다.
그럴 때마다 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그러기를 몇 차례, 눈앞에 낯선 방이 나타났다.
사방이 어두운 돌로 되어 있는 방이었는데, 반대편에는 아치형으로 된 커다란 문이 있었다.
"원래 이 문은 결계로 막혀 있었어요. 용사님들이 오실 때 마나맥이 흔들리면서 여러 시설들이 고장 났는데, 이 문도 그중 하나였죠. 결계를 풀 수가 없게 돼버렸거든요. 그런데 용사님들이 13구역을 작동시키고 나니까 결계가 풀리더라고요. 마치 용사님들이 13구역을 열면 수장고 최상층이 같이 열리게라도 돼있는 것처럼."
상황을 설명한 데릴이 수장고 문을 밀었다.
삐그덕 하는 소리와 함께 습하고 축축한 공기가 밀려왔다.
<수장고>는 파이에벨에서 활약했던 마법사와 성직자들의 유품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그중 최상층에는 가장 귀한 물건들이 모여 있었다.
그래서 수장고 최상층에 들어갈 권한은 파이에벨 내부에서도 극히 소수만 가지고 있었다.
약한 조명이 비추는 어두운 방 안에는 상자 모양의 유리관들이 나열돼 있었다.
어떤 상자 안에는 팔길이 정도 돼보이는 단검이 들어 있었고 어떤 상자 안에는 주문이 빼곡히 새겨진 스크롤이 들어 있었다.
데릴이 수장고 안쪽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이것들 모두가 강대한 마력이 담긴 물건들입니다. 유력한 가문들도 가문의 재산을 모조리 처분해야만 겨우 하나를 살까 말까 한 것들이죠.“
수장고 제일 안쪽의 유리 상자 앞에 선 데릴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건 달라요."
유리 상자 안에는 팔길이 절반 정도 돼 보이는 쇠막대가 들어 있었다.
끝에 달린 녹슨 구슬 외에는 어떤 장식도 달려 있지 않은 수수한 막대, 그게 바로 용제가 자기 고향에 남긴 유일한 유물인 <용제의 왕홀>이었다.
"용제의 왕홀입니다. 이 수장고에 있는 모든 물건 중에 유일하게... 아무런 기능이 없습니다. 수많은 마법사들이 검사를 했지만 어떤 기능도 발견할 수 없었어요."
막대를 바라보는 데릴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도시에 온 용제가 왕홀을 맡기면서 말했습니다. 왕홀을 반드시 수장고 가장 안쪽에 보관해달라고, 그리고 언젠가 왕홀을 찾으러 오는 사람이 있을 테니 그 사람에게 왕홀을 주라고. 이제 그 사람이 왔군요."
데릴이 유리 상자에 손을 대자 그녀의 손바닥에서 희미한 빛이 일었다.
그러자 왕홀을 둘러싸고 있던 유리 상자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데릴이 조심스런 손길로 왕홀을 들어 상원에게 내밀었다.
"가져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용제가 대단하긴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
그의 말 한마디에 이 쓸모없는 물건을 수장고의 최상층, 그것도 가장 안쪽 자리에 이렇게 고이 모셔두다니.
- 성물급 아이템 <용제의 왕홀>을 얻었습니다.
상원이 왕홀을 넘겨받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일곱 별의 왕관을 이루는 두 번째 별을 얻기 위해 필요한 아이템 세 가지 중 첫 번째가 상원의 손에 들어왔다.
역시나, 용제의 왕홀에선 그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용제의 왕홀은 등급이 성물급인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기능도 없는 특이한 아이템이었다.
왕홀의 쓸모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두 번째 별을 얻는 데 필요한 다른 두 아이템과 결합하는 것.
이게 끝이 아니다.
나머지 두 개도 얻어야 한다.
"이제 성지(聖地)로 가실 거지요?"
데릴의 물음에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다음에 갈 곳도 정해져 있었다.
그곳은 바로 고대인들이 북방의 망령들로부터 성지를 지키기 위해 세운 <카라온>의 방벽이었다.
공교롭게도 파이에벨에는 카라온으로 직행하는 공간이동진이 있었다.
"조합장님, 이제 카라온 방벽으로 가는 공간이동진이 작동할 겁니다."
"대단하시군요 용사님. 그런 것까지 아시다니. 다음번에는 또 무슨 말을 해서 저를 놀라게 하실 건가요."
데릴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가시죠. 카라온행 공간이동진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상원은 앞장서는 데릴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데릴을 따라 공간이동진을 밟기를 몇 번, 일행은 카라온으로 가는 공간이동진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공간이동진은 푸른 하늘이 그대로 쏟아지는 야외에 있었는데, 오래 방치되었는지 흙먼지가 굴러다녔고 잡초가 무성했다.
"여기가 카라온으로 가는 공간이동진입니다. 사실 작동을 멈춘 지가 꽤 오래돼서 관리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데릴이 공간이동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 가시죠 용사님. 교단 본부의 성직자들이 당신을 기다릴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상원이 공간이동진으로 나아갔다.
그때였다.
"잠깐, 잠깐만요."
일행이 왔던 공간이동진에서 드워프 하나가 튀어나왔다.
에론이었다.
종종거리며 다가온 에론이 들고 있던 물건을 샤믹에게 내밀었다.
겉면이 회색 털로 뒤덮인 타이트한 점프 수트였다.
"이거 가져가세요. 트롤의 털가죽을 가공해서 만든 옷이에요. 마력을 불어넣으면 재생하니까 유용하게 사용하실 수 있을 거예요."
말을 들어보니 거대화 능력을 가진 샤믹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어머... 귀한 거 아니에요? 이거 저 주셔도 돼요?"
"우리 도시를 살려주셨는데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감사해요!"
옷을 받은 샤믹이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용사님은....“
에론이 상원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는데, 척 봐도 쓸모없어 보였다.
"됐습니다. 이거 하나면 됩니다."
상원은 에론의 호의를 거절했다.
파이에벨에서 얻을 거라곤 데릴 파호른의 용사 인정과 용제의 왕홀 뿐이었다.
그 외에 파이에벨에서 얻을 수 있는 물건 중 상원에게 도움이 되는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행운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상원과 데릴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저희... 언젠가는 또 만날 수 있나요?"
"제도를 탈환하면 그때 뵙겠습니다."
에론의 물음에 상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제도를 탈환하면 에론 클라드를 지구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면 상원도 <절름발이 대장장이>나 <강철 용광로의 주인>에 못지않은 대장장이를 얻게 된다.
상원과 샤믹이 공간이동진 위에 올라서자 바닥에서 번쩍 하고 눈 부신 빛이 올라왔다.
어느새 낯선 땅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