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78화 (78/230)

제78화. 용제의 왕홀 (4)

이제 제13구역으로 가야 했다.

존과 마크에게 말한 대로 제13구역은 4구역과는 비교할 수 없이 위험했다.

시험을 정상적으로 풀어온 수험자라면 단 1분도 버티지 못하고 비명횡사할 정도였다.

그래서 1회차 때는 제13구역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반드시 가야 했다.

13구역을 가동해야 <용제의 왕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용제의 왕홀은 일곱 별의 왕관을 이루는 두 번째 별을 얻으려면 반드시 준비해야 하는 세 아이템 중 하나였다.

용제의 왕홀을 얻지 못하면 두 번째 별도 얻을 수 없고, 그러면 승천도 하지 못한다.

"가시죠 용사님들. 이쪽이에요."

수험자들에게 다가온 에론이 4구역 출구 쪽을 가리켰다.

본인이 아는 길로 가려는 것이었다.

"아니오. 그쪽이 아닙니다."

상원이 에론을 따라가려는 존과 마크를 제지했다.

지름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쪽입니다."

철컥

상원의 오른팔이 세로로 쪼개지면서 긴 막대가 튀어나왔다.

상원이 바닥에 박았던 것과 같은 말뚝이었다.

"오오. 용사님 팔 좀 봐도 될까요?""

에론이 탄성을 질렀다.

저토록 섬세한 기계라니!

뼛속까지 기술자인 에론의 눈엔 그만큼 값져 보이는 물건도 없을 것이었다.

"나중에요. 제도(帝都)를 탈환하면 그때 보여드리겠습니다."

"네? 제도를 탈환해요?"

"네. 저희는 제도를 탈환할 겁니다."

상원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제도 탈환, 그게 차원 <아나르>에서 치르는 15번 시험의 내용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에론이 중얼거렸다.

바스칸딘 황실이 마신 <연옥의 폭군>을 소환하면서 제국은 멸망하고 대륙은 언데드가 들끓는 생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제도는 연옥의 폭군이 강림한 바로 그곳이었다.

"가능합니다."

에론을 바라보는 상원의 눈빛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어쩐지 용사님이 이야기하니까 가능할 것 같기도 하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마신이 강림한 제도를 탈환한다는 건 불가능한 얘기였다.

그런데 지금 상원은 그 불가능한 일을 할 거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에론은 어쩐지 이 사람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떻습니까 에론. 제도를 탈환하고 나면 저와 같이 가 보시는 건."

상원의 말엔 15번 시험이 끝나면 대륙 에키나르타 최고의 기술자 에론 클라드를 데려가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일곱 별의 왕관>을 완성하려면 만들어야 하는 수많은 물건들.

에론이 있다면 그것들을 더 손쉽게 만들 수 있었다.

"진짜로 제도를 탈환한다면... 꼭 따라가고 싶네요."

에론이 멍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피식 웃으며 대답한 상원이 말뚝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말뚝 끝에 달린 구슬에서 붉은빛이 쏟아져 나왔다.

이어서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마나순환장치의 겉면에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아니 잠깐만! 지금 뭐 하는...!"

에론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상원의 행동은 그녀의 눈에 마나순환기관을 부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때였다.

마나순환장치를 감싼 껍질이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내리면서 껍질에 싸여 있던 내부가 드러났다.

"어... 어어?"

당황한 에론이 더듬더듬 소리를 냈다.

일행의 앞쪽에 사람 하나가 드나들 만한 크기의 구멍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지름길입니다."

짤막하게 말한 상원이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잠깐 낙하하자 곧 거센 바람이 상원을 집어삼켰다.

마나순환기관의 껍질에 싸여 감추어져 있던 것은 드넓은 중앙마나기관 곳곳을 순환하는 환기 통로였다.

환기 통로는 중앙마나기관의 규모만큼이나 거대해서 사람이 통로를 오가는 바람을 타고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상원은 바람에 몸을 맡겼다.

이 바람이 상원을 제13구역의 입구인 <황금문>에 데려다줄 것이었다.

* * *

바람을 타고 날아온 상원의 눈앞에 빛나는 구멍이 보였다.

저 구멍이 바로 제13구역의 환기구였다.

구멍을 빠져나온 상원이 사뿐하게 착지했다.

이어서 존과 마크, 샤믹 그리고 에론이 구멍에서 빠져나왔다.

"우아아악!"

상원은 떨어지는 에론을 가볍게 받았다.

네 수험자와 드워프가 방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크지 않은 방의 벽을 따라서 시뻘건 쇳물이 흐르고 있었다.

일행이 중앙마나기관에서 보았던 다른 방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행의 눈앞에 철문이 있는 철문 단 하나만 빼고.

크기는 다른 철문들과 비슷했지만 철문 겉으로 반투명한 황금빛 막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 막이 바로 용제 <비젤 카스파>가 쳐놓은 결계였다.

“이게 그 황금문인가요?”

“네. 그 어떤 마법사도 이 결계의 퍼즐을 풀지 못했습니다.”

에론이 샤믹의 물음에 대답하고 황금문의 결계에 양손을 댔다.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결계 표면에 빛나는 글씨로 엄청나게 복잡한 수식이 나타난 것이다.

저 수식이 바로 용제가 낸 퍼즐이었다.

“용사님, 정말로 퍼즐을 풀 수 있어요?”

“27.”

에론의 물음에 상원이 툭 던지듯 대답했다.

“!!”

상원의 대답에 에론의 눈이 벌어졌다.

황금문에 나타난 수식은 비젤 카스파가 고안한 마나 함수였다.

그 어떤 마법사도 풀지 못한 복잡하고 방대한 함수.

상원은 그 함수를 풀지 못했지만 답은 알고 있었다.

그 답이 노트에 쓰여있었으니까.

“마… 맙소사….”

더듬거리는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손은 번개처럼 움직였다.

“36 8 4 996.”

에론이 작업을 이어가는 동안 상원은 숫자 몇 개를 더 불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수식이 점차 기하학적 형태를 갖추어 갔다.

처음에는 단순한 평면 그래프였던 것이 점차 입체가 되었다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4차원 공간체로 변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수험자들의 눈이 경이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작업이 끝났다.

“하아.”

에론이 긴 한숨을 뱉었다.

황금문의 수식은 이제 하나의 입체 모형으로 변해 있었다.

거대한 날개와 단단한 비늘을 가진 드래곤 모양이었다.

“아… 아름다워….”

에론이 털썩 주저앉았다.

수많은 천재들이 도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실마리조차 잡을 수 없었던 황금문, 그걸 자기 손으로 풀어낸 것이다.

경이로 물든 그녀의 눈에 황금문이 내뿜는 찬란한 금빛이 반사되었다.

그때였다.

드래곤이 하늘로 휙 날아가면서 철문을 감싸고 있던 금빛 결계가 사라졌다.

이어서 철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 오오….”

13구역을 눈앞에 둔 에론이 탄성을 질렀다.

“이제 퍼즐 하나 푼 겁니다.”

던지듯 말한 상원이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철문 뒤로는 아래로 향하는 긴 계단이 이어졌다.

벽에 붙은 횃불이 보라색 불빛을 내뿜었다.

오랫동안 사람이 출입하지 않았던 공간에서 나는 특유의 음습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계단 되게 기분 나쁘네요."

상원을 뒤따라 내려오던 샤믹이 말했다.

"그러게요 냄새도 그렇고, 보라색 불빛이라니."

마크가 중얼거렸다.

에론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니 거대한 복도가 펼쳐졌다.

천장과 양 벽에 달린 등 속에서 흔들리는 보라색 불빛이 복도를 비추었다.

이 공간은 다른 구역들과는 달리 벽이 석재가 아닌 금속으로 되어 있어 현대적인 연구소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보라색 불빛이 비추는 공간이 더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여기가 제13구역이었다.

에론을 이 복도 끝에 있는 관리실에 데려가면 마법사 조합장 <데릴 파호른>으로부터 <용제의 왕홀>을 받을 수 있다.

"갑시다."

상원은 한치도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움츠린 자세로 상원을 따라갔다.

그때였다.

"이... 이게 뭐예요?"

잔뜩 놀란 샤믹이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헉!"

"이게 무슨...."

샤믹이 가리킨 곳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신음을 뱉었다.

그건 천장까지 이어진 유리관이었는데 그 속은 반투명한 액체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유리관 한가운데 거대한 형체가 있었다.

살이 잔뜩 찐 비만체였는데 사람의 살을 이어 붙여 만들었는지 온몸에 꿰맨 자국이 가득했다.

반쯤 갈라진 배에서 구불구불 튀어나온 내장이 액체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우우우욱!"

역한 광경에 마크가 구토를 했다.

열두 개의 시험을 거쳐 오면서 끔찍한 꼴을 많이 봤지만 이런 광경은 또 처음이었다.

하지만 상원은 그렇지 않았다.

50번 시험까지 겪었던 상원에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젠장! 도대체 용제는 여기서 뭘 한 거야."

에론이 욕지거리를 뱉었다.

"강령술이오. 용제는 말년에 여기서 강령술을 연구했소."

상원의 대답에 에론의 눈이 흔들렸다.

대륙의 중흥을 이끈 위대한 용제 비젤 카스파가 말년에 비밀리에 연구한 게 강령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사실이오. 믿든 안 믿든 그건 당신의 자유요. 어쨌든 갑시다. 다음 문이 있소."

일행은 발걸음을 재촉하는 상원을 따라서 걸었다.

걷는 동안 복도 양옆으로 유리관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렇게 살덩이 거인이 들어있는 유리관을 오십 개쯤 보았을 때 복도가 끝나고 널따란 방이 나타났다.

천장은 둥그런 돔 형태였고 돔 한가운데 보라색 불빛이 춤을 추고 있었다.

방 둘레에는 황금문과 비슷하게 생긴 철문이 일곱 개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황금문처럼 반투명한 보라색 막에 싸여 있었다.

그게 관리실로 가는 문이었다.

"저 문 뒤에 관리실이 있는 거죠?"

에론의 물음에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도 마나 수식으로 묶여 있어요? 그 답도 알고 있나요?"

"네. 하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괜찮아요. 답을 미리 알고 있다면 수식을 푸는 건 간단하니까."

자신만만하게 말한 에론이 철문에 손을 댔다.

그러자 아까처럼 막 표면에 빛나는 수식들이 나타났는데, 그 수식은 까막눈인 수험자들이 보기에도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하고 방대했다.

"36."

상원의 대답을 들은 에론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수식을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아까처럼 수식이 그래프로 바뀌기 시작했는데, 수식 자체가 워낙 복잡해서 진행 속도가 훨씬 느렸다.

"276 19 30442 7 55"

상원이 에론의 작업을 지켜보며 계속 숫자를 말했다.

관리실 문을 막은 마나 퍼즐을 푸는 데 필요한 해의 수는 총 5644개.

상원은 에론 옆에서 그 숫자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때 낯선 기계음이 들렸다.

- 안녕하시오.

용제가 미리 녹음해둔 메시지가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 축하하오. 용케도 황금문을 지나왔구려. 그대가 신탁이 부른 용사인 것은 알겠소. 하지만 그대가 제13구역의 관리실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구려. 증명해보시오.

후후후 하는 작은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메시지가 끝났다.

이어서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여섯 개의 철문이 열렸다.

그 뒤 일어난 일은 수험자들을 경악하게 했다.

일행이 지나온 복도를 포함해 도합 일곱 개의 구멍에서, 일행이 보았던 유리관 속의 거인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들이 바로 용제가 제13구역의 관리실을 지키기 위해 만든 <살덩이 골렘>들이었다.

"그으으윽."

"그으으으윽."

살덩이로 이루어진 거인들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일행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발을 디딜 때마다 온몸에서 흘러나온 진액과 피고름이 후두둑 하고 땅에 떨어졌다.

"후우."

다가오는 살덩이 골렘들을 보며 상원이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준비해온 물건들을 쓸 차례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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