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용제의 왕홀 (3)
상원이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이곳이 파이에벨 지하 중앙마나기관의 제4구역이었다.
12번 시험 통과 조건이 파이에벨의 마법사 조합장 <데릴 파호른>에게서 용사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그 인정을 받는 방법이 바로 제4구역이 폐쇄되기 전에 총관리자 <에론 클라드>를 여기 데려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12번 시험을 통과하는 걸로 끝이 아니다.
중앙마나기관의 제13구역, 그게 상원의 목표였다.
상원은 13구역에 닿기 위한 계획을 점검했다.
계획대로만 움직인다면 문제는 없었다.
"하아."
상원이 한숨을 쉬자 하얀 입김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에론이 철문 안쪽의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가 익숙한 손짓으로 벽의 패널을 조작했다.
그러자 팟 하고 들어온 조명이 어두운 공간을 밝혔다.
철문 안쪽 공간은 커다란 방이었다.
방은 전체적으로 구 형태였는데 그 지름이 거의 50미터는 되어 보였고 바닥은 평평했다.
방 한가운데는 천장과 바닥을 잇는 거대한 기둥이 있었다.
그게 바로 제4구역의 핵심 시설인 <마나순환회로>였다.
"이런."
에론이 제4구역을 보면서 신음을 흘렸다.
제4구역의 모습이 그녀가 기억하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원래 제4구역은 일행이 중앙마나기관에 처음 들어와서 본 것처럼 달궈진 쇳물이 흐르는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엔 살을 에는 냉기과 함께 새파란 안개가 감돌고 있었다.
"어우... 춥네요."
존이 양팔을 문지르며 말했다.
"생각보다 심각한데요. 열순환장치도 고장 났고 마나 배관도 완전히 망가져 버렸네요. 간접조정기능도 뻗어버렸고."
에론이 패널을 몇 번 만져보다가 뚜껑을 닫아버렸다.
제4구역에 고인 새파란 안개가 바로 마나 배관에서 새어 나온 마나였다.
한숨을 쉬는 그녀의 입에서 입김이 피어올랐다.
"그래도 다행인 건 기계를 수동으로 모조리 고쳐야 할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점이에요. 컨트롤룸에 있는 제어장치를 조작하면 금방 복구할 수 있는 수준이에요."
에론이 손을 문지르며 말했다.
"문제는 컨트롤룸까지 가야 된다는 건데...."
"그게 어딨는데요?"
샤믹의 물음에 에론이 손을 들어 방 반대편을 가리켰다.
"저쪽에요."
"그럼 빨리 가요."
"잠깐만."
에론이 계단을 내려가려는 샤믹의 손을 잡았다.
"왜요?"
"저것 봐요."
에론이 턱짓으로 방 쪽을 가리켰다.
방 안에는 사람을 닮은 형체들이 있었다.
키가 2미터 남짓 되어 보이는 석상들이었는데 유달리 팔이 길었다.
"저게 뭐죠?"
"제4구역을 관리하는 골렘들입니다. 기계에 문제가 생기면 저것들이 수리를 하죠. 그런데."
순간 에론의 말이 끊겼다.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골렘들의 눈에 푸른빛이 돌았다.
삐걱
골렘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일행을 쳐다보았다.
"침입자 발생."
"침입자 발생."
골렘들이 말했다.
수험자들은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침입자 제거."
"침입자 제거."
골렘들이 삐걱거리는 기계음을 내며 한 발 한 발 접근해왔다.
느릿느릿 다가오는 모양새가 좀비가 따로 없었다.
"저것들 지금 우리한테 오는 거예요?"
"불행하게도요."
아만다의 물음에 에론이 짧게 대답했다.
"느린 것 같은데 따돌리고 지나가면 안 됩니까?"
"안 돼요. 골렘들한테는 집단적인 전술운용체계가 세팅돼있기 때문에 저것들을 따돌리고 컨트롤룸에 갈 수는 없어요."
존의 물음에 에론이 대답했다.
"하아."
수험자들이 한숨을 쉬었다.
"쓰읍."
구릿빛 피부를 한 덩치 큰 남자 수험자가 숨을 들이쉬면서 커다란 활을 꺼내 들었다.
뉴질랜드에서 온 마크 리델이었다.
마크가 시위를 당기자 새하얀 기운이 화살처럼 매겨졌다.
성현 <바람살>이었다.
"츳."
숨이 살짝 새는 소리와 함께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시위가 팅 하고 울렸다.
그와 함께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바람살이 골렘의 이마에 꽂혔다.
퍽!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골렘이 뒤로 털썩 넘어졌다.
"먹혔나...?"
마크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침입자 제거."
바람살은 먹히지 않았다.
골렘이 다시 일어나 한 발 한 발 걸어왔다.
바람살에 맞은 이마가 박살 나 있었지만 움직임은 한치도 변하지 않았다.
"젠장... 이거 장난이 아닌데."
마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침입자 제거."
"침입자 제거."
골렘들이 높낮이 없는 기계음을 내며 포위망을 좁혀왔다.
과연 전술행동체계의 성능이 나쁘지 않은 건지 골렘들 사이에는 틈이 보이지 않았다.
"젠장. 어쨌든 12번 시험 깨려면 저거 다 조져야 되는 거잖아."
존이 칼자루를 쥐며 말했다.
그의 손에 핏줄이 곤두섰다.
"저것들 그나마 가슴이 약점이에요."
에론이 나직이 말했다.
"알았소. 명치에 칼을 꽂아드리지."
"이야아아악!"
수험자들이 비명 같은 기합을 지르며 뛰쳐나갔다.
대검을 든 존과 망치를 든 샤믹이 전열을 맡았고 수리검을 든 아만다와 활을 든 마크가 후방을 지원했다.
수험자들 하나 하나의 실력은 괜찮은 편이었고, 게다가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들치고 네 수험자의 호흡은 나쁘지 않았다.
특히 샤믹은 발군이었다.
괴력 물약 30개를 먹인 효과가 있었다.
꽝!
샤믹이 망치로 명치를 내리치자 시뻘건 불꽃이 튀면서 굉음이 났다.
"그그극!"
명치를 맞은 골렘의 동작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됐다! 할 수 있겠어!"
그렇게 네 수험자는 골렘들과 맞섰다.
나름 괜찮은 실력이었다.
몇 시간 더 싸우면 4구역의 골렘들을 모두 제압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오! 오오!"
에론도 연신 탄성을 흘렸다.
하지만 그런 광경은 상원의 성에 차지 않았다.
일곱 별의 왕관을 이루는 두 번째 별을 얻기 위해선 가야 할 곳이 많았다.
이런 식으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모두 비켜요."
저벅 저벅 계단을 내려간 상원이 말했다.
그의 손에는 대가리에 주먹만 한 구슬이 달린 거대한 말뚝이 들려 있었다.
"흡!"
말뚝을 본 수험자들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말뚝에 담긴 엄청난 마력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상원이 바닥을 향해 말뚝을 휘둘렀다.
쾅!
그러자 바닥이 쩍 갈라지며 말뚝이 쑥 박혔다.
"물러나세요."
상원이 오른쪽 팔뚝을 걷자 팔을 빼곡하게 덮은 지진 문신이 나타났다.
문신이 새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강신회로에 마신 <태초의 대족장>의 힘을 담고 나서 <기계장치의 신>이 그 힘을 응용할 수 있도록 부여해 준 두 번째 기능.
이제 그 기능을 시험해 볼 시간이었다.
상원이 말뚝 대가리의 구슬에 손을 대고 마력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구슬이 빨갛게 빛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제4구역의 넓고 단단한 바닥이 굉음을 내며 진동했다.
"으읏... 뭐지?"
"지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수험자들이 상원의 뒤로 달려왔다.
"침입자 제거."
"침입자 제거."
골렘들이 상원을 향해 다가왔다.
그 순간이었다.
우저저적
강진이라도 일어난 것 마냥 땅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말뚝에서부터 시작된 흉한 균열이 순식간에 골렘들을 덮쳤다.
"어떻게... 이런?"
에론이 더듬더듬 말했다.
제4구역의 바닥은 마나순환회로를 지진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것으로서 특수 합금으로 제작되었다.
결코 이런 식으로 갈라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바닥을 이렇게 간단하게 쪼개버리다니.
이어서 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쾅!
균열로부터 굉장한 폭발음과 함께 시뻘건 불기둥이 솟아오른 것이다.
강신회로를 통해 <태초의 대족장>으로부터 베낀 대지의 힘, 이건 그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쾅! 쾅!
땅을 쪼개고 솟아오른 불꽃이 마나 안개에 옮겨붙어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켰다.
"으앗!"
"으으윽!"
온 방을 울릴 정도로 강렬한 진동과 피부가 익어버릴 것 같은 열기가 수험자들을 덮쳤다.
불지옥이 있다면 그게 여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 속에서 상원은 날카로운 눈으로 제4구역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조금 후 불꽃이 잦아들었다.
화마가 덮쳤던 방 안에는 시뻘겋게 달궈진 금속 기둥들이 서 있었다.
표면을 덮은 금속이 녹아내린 탓에 그것들이 원래 골렘이었다는 걸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골렘을 덮은 마법 저항 주문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는 엄청난 화력이었다.
"총관리자님. 컨트롤룸까지 가는 길 뚫어드렸습니다. 얼른 가서 제4구역을 정상화하셔야죠."
"아... 아? 네, 그래야죠."
상원의 말에 정신을 차린 에론이 쫑쫑거리며 컨트롤룸으로 달려갔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요?"
"그냥 수험잡니다. 당신과 같은."
마크의 물음에 대답한 상원이 컨트롤룸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제4구역이 재가동되기까지 얼마 되지 않았다.
"수호신이 누구세요?"
"그것까지 알려드릴 이유는 없습니다."
아만다의 물음에 대한 상원의 대답은 차가웠다.
그때였다.
천장에 새빨간 쇳물이 고였다가 후끈한 열기를 내뿜으며 벽면을 따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우웅 소리와 함께 마나순환회로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회로 표면에 빼곡히 새겨진 마법 문자에 불이 들어왔다.
멈췄던 제4구역이 재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12번 시험이 끝났다.
하지만 상원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여러분, 조건이 만족됐습니다. 컨트롤룸에 들어가시면 1층으로 돌아가는 공간이동진이 있습니다. 나가서 조합장실로 돌아가시면 12번 시험이 완료됩니다."
상원이 수험자들에게 말했다.
"상원 씨는 안 가시나요?"
존이 물었다.
"말씀드렸지요. 저는 제13구역에 가야 합니다. 샤믹은 저와 같이 갑니다."
상원의 말에 샤믹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당신을 따라가겠소."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마크와 존이 말했다.
두 남자의 눈에서 결의가 읽혔다.
하지만 상원은 이들이 따라오는 게 전혀 달갑지 않았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13구역은 여기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비교할 수 없이 위험해요. 그래도 가실 겁니까?"
상원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럼요. 내 몸 하나 지킬 자신은 있습니다."
"바람살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쯧, 상원이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시험을 치르다 보면 꼭 이렇게 명을 재촉하는 자들이 있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들의 수호신은 명예에 굶주려 있을 테니까.
화신을 승천시키는 과정에서 쌓은 업적이 시험이 끝난 후 승천자의 격이 다시 정해질 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본인의 역량으로 이겨낼 수 없는 곳에 뛰어드는 건 자살행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멍청하기는. 그렇게 당해놓고도 모르겠어요? 이 괴물들을 상대하고 나서도 더한 것들이랑 싸우겠다고? 나는 여기서 빠질래요."
아만다가 돌아서서 컨트롤룸을 향해 걸어갔다.
승천 시험에서 살아남는 건 저런 사람들이다.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들.
상원은 존과 마크를 보았다.
이들은 웬만해선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상원에겐 그들을 설득할 의지도 여유도 없었다.
"뭐, 좋으실 대로."
상원이 덤덤하게 말했다.
"용사님들! 이제 13구역으로 가시죠!"
저 멀리서 뛰어오는 에론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