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76화 (76/230)

제76화. 용제의 왕홀 (2)

공간이동진을 밟자 섬광과 함께 에론의 모습이 사라졌다.

중앙마나기관으로 공간 이동한 것이다.

상원은 에론을 중앙마나기관 제13구역에 반드시 데려가야 했다.

그게 두 번째 별을 얻으려면 반드시 획득해야 하는 물건, <용제의 왕홀>을 얻는 조건이었으니까.

상원도 에론을 따라 공간이동진을 밟았다.

짙은 연기가 눈 앞을 가렸다.

"오."

연기가 걷히자 나타난 풍경은 상원을 감탄하게 하기 충분했다.

노트를 보면서 '이런 게 가능한가' 생각했던 공간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야... 이게 뭐야."

"와... 세상에."

뒤따라 들어온 수험자들이 한마디씩 했다.

그들이 낸 소리가 널따란 공간 안에서 메아리쳤다.

수험자들이 공간 이동해 온 곳은 거대한 공동이었다.

끝도 없이 높은 천장에 고인 새빨간 쇳물이 벽에 난 홈을 따라 복도 양옆에 난 거대한 도랑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후끈한 열기가 몸을 데웠다.

"이방인 여러분. 파이에벨의 자랑 중앙마나기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웃으며 말하는 에론의 얼굴에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도시 안에 이런 시설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러게요. 이 정도 공간은 밖에서 보이지 않던데."

수험자들의 말을 들은 에론이 씩 웃었다.

"여긴 지하입니다."

"네?"

샤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러분들이 계시던 파이에벨 중앙광장의 발밑, 그게 여깁니다."

"오오."

수험자들이 탄성을 질렀다.

"오오, 총관리자님 오셨습니까?"

"이분들이 이계의 용사들이군요."

지나가는 작업자들이 한마디씩 했다.

인간과 드워프가 섞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기름때 묻은 작업복 차림에 얼굴엔 검댕이 묻어 있었다.

"용사님들, 우리 4구역 폐쇄 안 해도 되는 거지요?"

"그럼요 걱정 마세요! 저희가 깨끗하게 고쳐드릴게요!"

어느 작업자의 물음에 샤믹이 쾌활하게 대답했다.

"빨리 가지요. 지금도 시간은 가고 있습니다."

상원이 말했다.

얼굴엔 살짝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차가웠다.

"참, 이쪽 분께서는 냉랭한 데가 있네요. 따라오세요."

피식 웃은 에론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에론은 손에 스크롤을 들고 있었는데, 스크롤을 펴자 파랗게 빛나는 도면이 나타났다.

중앙마나기관의 도면이었다.

도면을 따라 움직이는 에론의 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에론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고 승강기를 타기를 몇 번, 일행은 굳게 닫힌 철문 앞에 도착했다.

지하로 내려올수록 층고가 낮아져서, 지금 일행이 도달한 철문은 높이가 3미터를 조금 넘을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

철문 위에 달린 빨간색 경보등이 회전하고 있었다.

"자, 이제 방호시설 안으로 들어갑니다. 아까 우리 조합장이 얘기한 것처럼 지금은 중앙마나기관이 고장 나서 방호체계가 오작동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에론이 철문 오른쪽에 달린 패널을 조작했다.

그러자 쿵 소리와 함께 철문이 위로 올라갔다.

철문 너머로 나타난 공간의 분위기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 공간은 긴 복도였는데 천장엔 새하얀 조명이 달려 있고 좌우는 금속과 유리로 마감 처리가 되어 있었다.

유리 너머로는 복잡한 기계 장치들이 보였다.

지금까지 보았던 공간이 제철소의 용광로 같았다면 앞으로 일행이 가야 할 곳은 연구소와 같은 느낌이었다.

"앞으로 갈 길에는 다양한 함정들이 숨어있습니다. 그런데 방호체계가 작동되면 함정의 위치와 종류가 무작위로 설정되기 때문에 저로서도 무사히 지나가기가 어렵습니다."

꿀꺽, 일행들이 침을 삼켰다.

"자, 가보시죠."

에론이 앞장섰다.

복도는 5미터 남짓이었고 건너편에 다음 방이 보였다.

복도와 방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복도를 지나 첫 번째 방에 다다르는 동안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긴장한 표정으로 복도를 건너온 에론이 한숨을 쉬었다.

"후... 첫 번째 복도엔 함정이 활성화되지 않았군요. 이런 식으로 진행하면 됩니다."

에론을 따라 차례차례 들어온 수험자들도 한숨을 쉬며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하지만 한 명은 달랐다.

"시간 없는데 빨리빨리 갑시다."

방패와 철퇴로 무장한 근육질 남자가 다음 복도로 들어섰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누르술탄 무르카잘리예프였다.

"아니, 잠깐만요! 함부로 움직이면...!"

그때였다.

위잉!

날카로운 경보음과 함께 철컥 소리를 내면서 방과 복도 사이에 두꺼운 유리문이 내려왔다.

그리고 핑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번째 방이 있는 곳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콱!

맹렬히 날아온 화살이 누르술탄의 방패에 박혔다.

상당한 솜씨였다.

"오오."

수험자들이 감탄했지만 상원은 아니었다.

‘이제 곧 죽겠군.’

반면 화살을 가볍게 막아낸 누르술탄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함정발동이 끝난 건 아니었다.

다음 순간, 첫 번째 방 쪽에서 퓽 하고 날아간 레이져가 누르술탄의 가슴팍을 통째로 꿰뚫었다.

"으... 응?"

누르술탄은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가슴팍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털썩 쓰러졌다.

"세상에!"

"마... 맙소사...!"

수험자들이 경악했다.

그 사이 상원은 해야 할 일을 했다.

‘이제 슬슬 함정을 멈춰야 할 것 같은데.’

상원의 어깨에서 사출된 드론이 방 천장의 환기구 안으로 사라졌다.

"하아."

에론이 한숨을 쉬었다.

"여러분 제발...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 이제부터 함정을 해제하겠습니다."

얼굴을 감싸 쥐고 말한 에론이 방 한쪽에 붙어 있는 패널을 조작했다.

함정을 해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에론의 손놀림은 화려했다.

드워프 특유의 손재주였는데 에론은 그중에서도 특출났다.

괜히 대륙 최고의 장인인 게 아니었다.

"후우."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에론이 패널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철컥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됐습니다. 넘어가시죠."

에론이 두 번째 복도로 갔다.

그녀를 따라 복도에 들어선 수험자들이 주변을 잔뜩 경계했다.

함정이 제대로 무력화되었는지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번째 방에 도착한 에론이 패널에 손을 댔다.

그때였다.

"이봐요."

수험자 하나가 에론을 불렀다.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마리는 새빨갰고 피부는 갈색이었다.

'저 여자 이름이 아만다 저스티노?'

상원은 마법사 조합의 대기실에서 그녀를 처음 만나 통성명했던 때를 떠올렸다.

"이거 이런 식으로 하나씩 해제해야 되는 거예요?"

"네."

작업에 몰두해있던 에론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런 게 얼마나 더 있는 건데요?"

"제4구역까지 앞으로 남은 방은 53개입니다."

"그걸 다 이런 식으로 해야 된다고요?"

"네... 말 좀 걸지 말아봐요."

에론의 말을 들은 아만다가 벌떡 일어났다.

"아 진짜 좀 안전하게 가려고 했더니 답답해서 정말. 이봐요, 내 수호신이 <미스타라의 보물사냥꾼>이거든요?"

아만다가 성큼성큼 복도로 걸어갔다.

"이런 함정 파훼하는 거 내 전문이니까 잘 봐두라고요."

"아니, 잠깐만."

에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만다가 복도로 몸을 던졌다.

그러자 경고음과 함께 복도와 방을 잇는 유리문이 닫혔다.

민첩하게 앞구르기를 하며 복도로 뛰어든 아만다가 주위를 경계했다.

건너편 방 쪽으로부터 수평으로 된 레이져 줄기가 다가왔다.

아만다가 재빨리 몸을 날려 천장에 매달렸다.

수평으로 다가오던 레이져가 그녀의 옷을 절단하고 지나갔다.

퓻!

천장에서 뛰어내린 아만다가 복도 저편을 향해 수리검을 날렸다.

콱 하는 소리와 함께 수리검이 박힌 곳은 복도를 감지하는 센서였다.

피식 소리를 내며 센서가 무력화되었다.

수호신 <미스타라의 보물사냥꾼>이 함정을 파훼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이다.

"하하! 이 정도야."

아만다가 씩 웃었다.

하지만 끝나지 않았다.

"멍청아! 아직이라고!

에론이 소리를 지르며 철문을 두드렸다.

다음 순간 수험자들이 있는 방 쪽에서 바둑판 모양의 레이져가 나타났다.

레이져는 천장부터 바닥까지 빽빽했다.

그 어디에도 숨을 곳은 없었다.

"이런... 씨발...."

천천히 다가오는 레이져를 보며 아만다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였다.

파지직 소리와 함께 새파란 섬광이 튀었다.

그 직후 아만다를 향해 다가가던 레이져가 사라졌다.

"으으...."

다리에 힘이 풀린 아만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못 봐주겠네."

상원이 중얼거렸다.

이미 한놈이 함정에 걸려 죽는 걸 본 뒤에도 저렇게 날뛰다니.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녀석들은 이래서 문제다.

직접 당해보기 전에는 조심할 줄 모른다.

더 시간을 끌어서는 좋을 게 없었다.

빨리 계획을 실행해야 했다.

일행이 있는 방 천장 환기구에서 윙 소리를 내며 드론이 내려왔다.

상원이 환기구로 드론을 보내 남은 함정을 파훼한 것이다.

1회차 때 파이에벨로 온 수험자 다섯은 모두 이 지하 미로의 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픽 소리를 내며 유리문이 열렸다.

"괜찮아요?"

제일 먼저 달려간 샤믹이 아만다를 부축했다.

"아... 아아."

아만다는 아직도 다리를 경련하듯 떨고 있었다.

"성급한 일이긴 했습니다만, 아만다의 말도 맞습니다. 이래서는 시간 내에 13구역까지 가기는커녕 4구역까지 가기도 힘들겠네요."

상원이 에론을 보고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요? 방법이 있어요?"

에론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지금 본부랑 통신 되죠? 중앙마나기관의 2번 동력 장치가 멈출 거니까 대비하라고 하세요."

무심한 상원의 말에 에론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당신... 그게 지금 무슨 말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에요? 2번 장치를 부수면 광장 일대의 동력이 정지할 거라고요!"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그리고 13번 구역에만 닿으면 2번 동력 장치 같은 건 잊어버려도 됩니다."

"그, 그건 그렇지만! 2번 장치는 어떻게 멈추겠다는 거예요? 여기서 거기까지 가는 데만 해도 한나절은 걸릴 텐데."

에론의 말을 들은 상원이 피식 웃었다.

"벌써 정지시켰습니다."

"뭐... 라고요?"

그때였다.

피시식 하는 소리와 함께 복도가 어두워졌다.

천장에 있는 조명의 반이 나가버린 것이다.

환풍기가 작동을 멈춘 건지 계속해서 들리던 기계음도 멈췄다.

두 번째 방에 들어섰을 때 상원이 보낸 드론이 2번 장치를 정지시킨 것이다.

상원의 머릿속에 중앙마나장치의 도면이 완벽하게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동력 장치는 그렇게 마음대로 멈추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에론이 얼빠진 얼굴로 말했다.

당연했다.

2번 동력 장치는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데다가 항마 주문까지 걸어놓은 견고한 설비였다.

4번 구역에 가기 위해 2번 동력 장치를 멈추는 것, 그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눈앞에 있는 이방인은 손쉽게 해결해버린 것이다.

"빨리 갑시다. 시간이 너무 지체됐습니다."

상원이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아, 아니. 같이 가요."

에론과 나머지 수험자들이 종종거리며 상원의 뒤를 따랐다.

* * *

효과는 확실했다.

수험자들이 50개가 넘는 복도를 지나는 동안 어떤 함정도 수험자들을 막아서지 않았다.

그렇게 복도를 지나 일행은 굳게 닫힌 철문 앞에 다다랐다.

철문에는 '제4구역'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와... 대박."

아만다가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해요 상원 씨!"

샤믹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수험자들이 상원을 바라보는 시선은 경탄을 넘어 경외에 가까웠다.

이제 그들은 상원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것이었다.

한편 중앙마나기관 총책임자 에론 클라드는 경악한 눈이었다.

"당신 정체가 뭐예요?"

"이세계에서 온 이방인입니다."

상원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니... 이세계에서 올 때 뭐 이런 거 배워요? 중앙마나기관 어떻게 생겼는지?"

에론의 물음에 상원의 눈빛이 깊어졌다.

모를 수 없었다.

새하늘교에서 배운 198권의 노트 중 하나엔 파이에벨 지하 중앙마나기관의 구조와 설계도가 속속들이 쓰여 있었으니까.

그걸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외워버린 것, 그게 암기 천재 상원의 능력이었다.

"뭐... 어디서 봤습니다. 그나저나 빨리 시작하시죠."

상원의 말에 에론이 고개를 끄덕이고 철문 옆의 패널을 조작했다.

그러자 피식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우웅-우웅-

철문 안쪽에서 기계음이 들려왔다.

어두운 공간 안에서 파란 안광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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