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용제의 왕홀 (1)
골리야스 상단 상인이 샤믹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샤믹의 손등에 박힌 인장이 파랗게 빛났다.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괴력 물약 30개와 땅의 내단, 그리고 성장하는 바윗돌. 다 해서 3천 코인. 거래 성립."
거래 성립을 선포한 상인이 테이블 밑에서 주섬주섬 물건들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처음 올린 건 사과 상자만 한 나무 궤짝이었다.
상인이 궤짝 위쪽의 뚜껑을 열어 안에 든 물건을 보여주었다.
빨간 액체가 들어있는 유리병이 정확히 서른 개 들어있었다.
"괴력 물약 30개요. 받으슈."
상자를 받은 샤믹이 흘끗 상원을 보았다.
"이거 지금 먹어요?"
"네."
상원의 대답에 샤믹이 물건을 마시기 시작했다.
코르크 뚜껑을 따자 퐁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퐁 퐁 소리가 나기를 서른 번.
테이블 위에 빈 유리병 서른 개가 쌓였다.
"힘이 세진 게 느껴져요."
샤믹이 두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럴 것이다.
물약을 마시기 전 샤믹의 괴력이 23이었는데 지금은 53이었다.
한 번에 괴력이 두 배 넘게 올랐는데 힘이 넘치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했다.
"자, 그리고 나머지 두 개도 받으슈."
상인이 다른 물건들을 올려놓았다.
지름 2cm 남짓한 짙은 갈색 구슬과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어 보이는 회색 돌조각이었다.
구슬은 <땅의 내단>이었고 돌조각이 <자라나는 바윗돌>이었다.
골리야스 상인의 말대로 둘 다 먹으면 죽는 극약이었다.
"상원 씨? 이것도...?"
샤믹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무리 그녀가 상원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따른다고 해도 극약을 먹는 건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아뇨."
고개를 가로저은 상원이 내단과 바윗돌을 집어 브라이싱크론 지갑에 넣었다.
"이 물건들은 이따가 드리겠습니다. 그때 드시면 됩니다."
"아, 알겠어요."
샤믹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 뭐 또 필요한 거 있수?"
"이 아가씨의 남은 코인을 <에키나르타 골드>로 바꾸겠습니다."
"그래? 아가씨, 그렇게 할 거요?"
"네."
샤믹은 순순히 상원의 말을 따랐다.
상인이 주먹 하나 정도 크기의 주머니를 꺼냈다.
"자, 에키나르타 골드요.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순금으로 된 정품. 환율은 1:1로 해서 정확하게 2백 골드."
샤믹이 주머니를 집었다.
"이건 어디에 쓰죠?"
"대륙에서 쓰이는 화폐입니다. 어디에 쓰셔야 할지는 나가서 알려드릴게요."
상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여기 잘생긴 남자분은 뭐 따로 필요하신 거 없으시고?"
"저도 백 골드만 환전 부탁합니다."
상인의 손을 잡은 상원의 손등에서 파란빛이 나고, 이어서 상인이 테이블 위에 꾸러미를 올렸다.
샤믹에게 준 것의 정확히 반, 1백 골드가 들어있는 꾸러미였다.
"좋아, 갑시다 샤믹."
상원이 샤믹을 데리고 등을 돌렸다.
그때 상인이 말했다.
"손님, 그 좀 주제넘어 보여도 제가 진짜 걱정돼서 하는 애긴데. 그거 진짜 먹으면 죽소."
"알고 있습니다."
상원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필요한 것들을 모두 챙기고, 상원과 샤믹은 골리야스 파이에벨 지점을 떠났다.
* * *
상점을 나온 상원은 샤믹에게 사야 할 물건의 목록을 일러주었다.
<훈제 그리핀 가슴살> 백 골드와 <드라이어드가 깃든 이슬> 칠십 골드.
나머지 삼십 골드는 쓰고 싶은 대로 쓰라고 하고 약속된 시간에 만나기로 했다.
샤믹과 헤어진 상원은 여관방을 잡았다.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환전한 백 골드로 잡은 여관방은 바랐던 것보다 쾌적했다.
나무로 마감 처리된, 침대와 작은 화장실이 딸린 평범한 방이었지만 침구의 상태가 좋았고 온 방에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상원은 옷을 벗고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질끈 묶고 있던 머리를 풀자 짙은 흑발이 선이 곱고 수려한 얼굴을 덮었다.
2미터에 달하는 몸은 호리호리해서 어깨가 떡 벌어진 상체는 역삼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생동감이 넘치는 육체였다.
왼쪽 어깨에 드론이 수납되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몸의 오른쪽은 지진 모양, 왼쪽은 번개 모양의 문신으로 가득 덮여 있었다.
의체 <신화의 몸>에 내장된 기능 강신회로의 힘을 통해 마신 <태초의 대족장>의 힘을 받아들인 흔적이었다.
일곱 별의 왕관을 이루는 첫 번째 별을 얻느라 소멸 직전까지 갔던 육체는 긴급 회복 절차에 돌입했다.
절차가 끝나고 나니 육체가 바뀌어 있었다.
덩치는 줄어들었고 물리력도 반 토막 났지만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한 주술적 힘이 몸 안에 깃들어 있었다.
"후우."
몸 상태를 체크한 상원이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이 나올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중앙마나기관>의 오작동 탓이었다.
중앙마나기관은 일종의 도시 컨트롤 시스템이었다.
다른 도시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온수 샤워 시설이 이런 작은 여관방에까지 딸려있는 것도 중앙마나기관 덕분이었다.
그래서 파이에벨은 중앙마나기관의 고장을 고치는 데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 조합장이 제시할 <용사 인정> 시험으로는 딱이었다.
따뜻한 물을 맞으니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문득 상원은 샤워로 피로가 풀리는 게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의체가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건지가 궁금해졌다.
잠시 고민하던 상원은 그 문제를 더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승천 시험에서 중요한 건 오로지 승천뿐.
승천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문제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상원은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제4구역까지 가는 길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제13구역의 황금문은 어떻게 통과할 것인지,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별을 얻기 위한 계획들.
문제없었다.
샤워를 끝낸 상원은 오른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열기로 몸을 말린 후 옷을 차려입었다.
이제 여관방을 빌린 이유,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시간이었다.
상원은 브라이싱크론 지갑을 열어 저장해둔 물건을 꺼냈다.
왜소한 젊은 남자가 지갑에서 쑥 튀어나왔다.
피부가 창백하고 입술에 색이 없는 게 영락없는 시체였다.
상원이 <의령수의 심장>의 힘으로 가사 상태에 빠뜨린 한창훈이었다.
상원이 한창훈을 에키나르타에 데려온 건 두 번째 별을 얻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창훈은 아내 송혜경의 수호신 <검은 숲의 목자>가 심어둔 부패의 씨앗의 영향으로 거동 자체가 어려운 상태였다.
그래서 상원은 창훈을 가사 상태로 만든 것이다.
그러면 브라이싱크론 지갑에 넣을 수 있기 때문에.
창훈은 두 손을 모아 주먹만 한 구슬을 꼭 쥐고 있었다.
그게 상원이 세 번째 시험에서 <대강령술사 오디나스>를 추방하고 얻은 <의령수의 심장>이었다.
상원이 의령수의 심장에 손을 대고 마력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구슬 속에서 새파란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흐으으읍!"
창훈이 마치 물에 빠졌다 간신히 구조된 사람처럼 가쁜 숨을 들이쉬었다.
창훈의 눈에 상원의 얼굴이 비쳤다.
"하아, 하아. 이건 정말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네요."
창훈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또 먹어야 되죠?"
"네."
상원이 새까만 알약 한 알을 내밀었다.
알약은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목자와 상극인 <화산정의 혐오체>의 분비물을 모방해 만든 <반부환>이었다.
먹으면 부패의 씨앗을 한동안 억제할 수 있었다.
"흐읍!"
창훈이 오만상을 쓰고 알약을 삼켰다.
창훈의 목젖이 꿀꺽 움직였다.
"어 그런데 여긴...?"
알약을 간신히 삼킨 창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관방입니다."
"아."
방을 둘러보는 창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거 이세계의 방인 거죠?"
"네."
"판타지 세계라 그러길래 중세 유럽 여관방을 생각했는데, 이 방 생각보다 현대적이네요. 깔끔하고 난방도 잘 되는 것 같고. 이거 서울역에 있는 수험자 숙소보다 상태가 훨씬 나은데요."
창훈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서울역 수험자들이 수면을 해결하는 방법이라 해봐야 성화 곁에서 침낭을 펴놓고 자는 게 고작이었다.
서울역 근처에 있는 여관방은 전기도 수도도 모두 나가버린 데다 성화의 온기마저 닿지 않아 매서운 추위에 그대로 노출된 냉골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성화 곁 침낭에서 자는 게 훨씬 나은 수준이었다.
"욕실로 들어가 보시면 정말로 놀라실 겁니다."
"오... 오오!"
욕실로 들어간 창훈이 탄성을 질렀다.
샤워기에서 나오는 온수로 씻는 건 시험이 시작된 이후 처음이었으니까.
"보일러 고장 나서요. 따뜻한 물 나오는 데 시간 좀 걸릴 겁니다. 찜질 좀 하고 나오세요. 곧 다시 움직여야 합니다."
상원은 창훈이 씻는 동안 서울역의 다른 수험자들을 떠올렸다.
엘프들의 숲 <아보렐>로 간 하나교도 원강수와 박명희는 지금쯤 하나교주 유성희를 만났을 것이다.
교주를 만났다 해도 가짜인 걸 들키진 않을 것이다.
유성희가 신도 한 명 한 명을 모두 아는 것도 아니고 신도 중 누가 <별의 아이>인지를 속속들이 아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임기응변과 화술의 달인이었지만 조직 관리자로서는 영 재능이 없었다.
한편 드워프들의 도시 <프리바론>으로 간 김만웅과 박준배는 그들의 고용주 강상중을 만났을 것이다.
이들이 강상중의 사람이었다고는 해도 수많은 시험을 거치면서 서울역의 수험자들과 쌓아온 인연을 한 번에 저버리지는 못한다.
그리고 유성희와 강상중은 마주칠 것이다.
대륙의 지형상 <아보렐>의 수험자들과 <프리바론>의 수험자들은 성지로 향하는 길에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때 상원이 던진 미끼가 효과를 보여줄 것이다.
<요이르오름 구릉>으로 보낸 윤진아와 백문혁은 언데드들을 모조리 씹어먹으면서 코인과 신앙을 긁어모으고 있을 것이다.
<오스터 군도>로 보낸 오태성과 송혜경도 나름대로 시험을 잘 헤쳐나가고 있을 것이다.
오태성에게는 송혜경에게 깃든 <검은 숲의 목자>를 억누를 수 있는 탕약 <심지혈탕>의 제조법을 전수했다.
심지혈탕을 먹은 송혜경은 목자의 제약에서 벗어나 움직일 수 있고, 그 능력으로 손쉽게 12번 시험을 통과할 것이다.
12번 시험을 통과한 오태성은 군도 중앙의 차원문을 통해 성지로 직행할 것이고, 송혜경은 송혜경대로 움직일 것이다.
그렇게 모든 말들이 상원의 <두 번째 별>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할 일은 <용제의 왕홀>을 얻는 것이었다.
40시간이 약간 넘는 시간이 남았다.
그 안에 중앙마나기관 총관리자 에론 클라드를 제13구역에 데려다주면 용제의 왕홀을 얻는다.
충분했다.
"아. 개운하네요."
온수 샤워를 마치고 옷을 차려입은 창훈의 얼굴은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이 깨끗했다.
"누워서 좀 쉬시죠. 저도 좀 자야겠습니다."
각자의 침대에 몸을 눕히고 두 남자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마법사 조합 1층 대기실.
총관리자 에론 클라드와 지구에서 온 여섯 수험자가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주변에 둘러선 마법사들의 표정은 수험자들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와는 딴판이었다.
심드렁하고 무관심한 표정이었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마법사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잘하시고 오기를 바랍니다. 진심입니다."
일행을 배웅하는 조합장 네릴 파호른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걱정 마. 잘 다녀오겠습니다."
일행을 대표해서 에론이 씩씩하게 손을 흔들었지만 그녀 역시도 긴장한 게 역력했다.
제4구역은 위험하고 제13구역은 더더욱 위험하니까.
"가시죠."
상원의 나직한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에론이 공간이동진으로 걸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