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용사의 인장 (4)
"방금 뭐라고 했지요?"
에론 클라드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릴까요? 제가 총관리자님을 제13 구역에 모셔다드릴 테니, 돌아오면 <용제의 왕홀>을 달라고 했습니다."
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맙소사...."
에론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럴 것이다.
지금 상원이 얘기한 내용은 마법사 조합에서도 극소수의 고위층 간부만이 알고 있는 기밀이었으니까.
"당신 설마 <황금문>을 여는 방법을 알고 있어요?"
에론이 상원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방법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걸 조작하는 건 총관리자께서 해주셔야 되겠죠."
상원이 에론의 두 눈을 보았다.
"그건 인간의 손으로 풀 수 있는 퍼즐이 아니니까."
상원의 말에 에론이 멍하게 덧붙였다.
마법사 조합장 네릴 파호른과 마나중앙기관 총관리자 에론 클라드.
두 여자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할 말을 잊고 멍하게 서 있었다.
"뭐야. 상원 씨, 이거 지금 다 무슨 말이에요?"
샤믹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제가 이 사람들이 겪고 있는 아주 큰 난관을 해결해주겠다고 한 겁니다."
"그걸 상원 씨가 어떻게 알아요?"
"저한텐 확실한 소스가 있거든요.”
상원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릴과 에론 중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네릴이었다.
“역시. 본부의 신탁은 틀리지 않는군요. '이세계의 용사들이 대륙을 구원할 것이니 차원문을 열라'.”
네릴이 이마에 손을 대고 말했다.
이세계의 용사들이 대륙을 구원할 것이다.
그게 <미스미엘 교단> 본부가 받은 신탁의 내용이었고, 교단은 각 도시에 차원문을 여는 데 필요한 마나를 부담할 것을 요청했다.
파이에벨은 협조했다.
중앙마나기관이 고장 나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대륙 사람들에게 교단의 요청이란 그런 것이었다.
에론이 네릴을 돌아보았다.
"이봐, 조합장님. 이 정도면 조합 차원에서 정식으로 13구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
네릴이 에론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4구역이 먼저야. 13구역에 들어가서 스페어 모듈을 작동한다고 해도 48시간 안에 4구역이 폐쇄될 거란 사실은 변하지 않아."
냉철하게 말한 네릴이 상원을 보았다.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조금은 믿음이 생기는군요. 이방인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제4구역 문제를 해결하고 오시면 논의해보기로 하죠."
"그런...."
네릴의 말에 에론이 애타는 표정을 지었다.
파이에벨이라는 마법 도시의 모든 시스템을 관리하는 중앙마나기관은 총 13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중앙마나기관을 홀로 설계한 천재, 용제(龍帝) <비젤 카스파>는 그중 13번 구역으로 통하는 <황금문>을 지독하게 복잡한 퍼즐로 잠가 두었다.
그 후 조합의 최고위 관리자들에게 말했다.
언젠가 이 퍼즐을 풀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 테니, 그때까지 13구역의 존재 자체를 비밀에 부치라고.
이후 수십 년이 지나도록 수많은 마법사들이 퍼즐을 푸는 데 도전했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13구역은 그런 공간이었다.
이제 드디어 황금문의 퍼즐을 풀 수 있다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먼저 4구역을 해결하고 오라니.
에론으로서는 애가 타는 게 당연했다.
"조합장님의 입장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러기엔 저희가 너무 바쁩니다."
"네?"
상원의 말에 네릴의 눈썹 끝이 올라갔다.
"48시간이면 4구역과 13구역까지 돌아보는 데 충분한 시간입니다. 어쨌든 저희가 돌아오면 용사 인정은 당연한 거고, 용제의 왕홀까지 주십시오."
"하... 하하! 하하하하!"
상원의 말에 네릴이 깔깔 웃었다.
"좋습니다 이방인. 드리죠 그깟 왕홀."
네릴이 말했다.
"조합장! 그게 어떤 물건인데 그깟 왕홀이라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쇠막대기가 그깟 게 아니면 뭐야. 그런 게 고작 용제가 썼다는 이유 하나로 수장고 최상층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는 게 말이 돼?"
에론의 말을 받아친 네릴이 발을 굴렀다.
그러자 방 한쪽에 커다란 모래시계가 나타났다.
보라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모래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제4구역 폐쇄까지 남은 시간입니다. 서두르세요 이방인. 지금도 시간은 가고 있습니다."
"그 말, 저희가 다녀와서도 변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흘끗 모래시계를 확인한 상원이 네릴에게 말했다.
"당연하지요. 조합장의 말은 가볍지 않습니다. 에론, 서둘러."
"좋아. 저를 따라오세요 여러분. 제4구역은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수험자들은 에론을 따라 조합장실을 빠져나갔다.
* * *
마법사 조합을 빠져나오는 동안 상원은 노트에서 읽었던 제국의 역사를 더듬어 보았다.
11번부터 15번까지 시험이 펼쳐지는 에키나르타 대륙은 인간과 드워프, 엘프 같은 여러 종족들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대륙을 할거하던 수많은 세력을 통일한 건 신성 국가 <카이네딘 제국>이었다.
제국은 두 바퀴로 굴러가는 전차였다.
하나는 황통인 <바스칸딘 가문>의 황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빛의 신 <네아>를 섬기는 <미스미엘 교단>이었다.
제국이 대외 정복 사업을 하는 동안에는 황실과 교단이 서로 협조했다.
외부에 공동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륙을 통일하고 나니 황실과 교단의 치열하고 지진한 권력 싸움이 일어났고, 그 결과 제국은 둘로 쪼개졌다.
바스칸딘 황실이 지배하는 동쪽과 교단이 지배하는 서쪽으로.
그 후 어느 날, 한 사람이 나타나 둘로 쪼개진 제국을 다시 통합했다.
제국 최초로 성직자 출신으로 황제에 오른 자.
폴리모프한 드래곤으로까지 의심받았던 자.
그 사람이 바로 용제 <비젤 카스파>였다.
하지만 통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용제가 홀연히 사라진 그날, 제국은 다시 분열됐으니 말이다.
성직자 황제의 눈부신 치세를 지켜봐야 했던 바스칸딘 황실은 끝도 없는 증오를 품었다.
그들은 미스미엘 교단을 제거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러다가 금단의 술법인 강령술에까지 손을 댔고, 결국은 마신 <연옥의 폭군>을 소환하는 의식까지 치렀다.
소환은 성공했고, 그날 제국은 멸망했다.
그게 에키나르타 대륙이 밤이면 언데드들이 돌아다니는 생지옥으로 변한 이유였다.
다행히 서쪽은 사정이 나았다.
용제가 깔아둔 거대한 마법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이에벨을 비롯한 서부의 주요 도시들을 이어 만든 대륙 스케일의 마법진, 그게 바로 산 사람을 언데드들로부터 지켜주는 <항마진>이었다.
파이에벨의 중앙마나기관은 이 항마진에 대부분의 마나를 쏟고 있었다.
그때 에론의 목소리가 상원의 생각을 끊었다.
“여러분. 중앙마나기관에서 버티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랑 같이 다니면서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총관리자님. 저랑 샤믹은 잠시 빠지겠습니다. 따로 챙겨야 할 게 있어서요.”
상원의 말에 잠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은 에론은 좋을 대로 하라며 돌아섰다.
8시간 뒤 마법사 조합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서 상원은 샤믹을 데리고 쇼핑을 시작했다.
상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움직였다.
사야 할 물건과 해야 할 일의 목록은 이미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었다.
"샤믹, 지금 능력치가 어떻게 되지요?"
첫 번째 물건을 사기 위해 움직이는 동안 상원이 물었다.
"저... 괴력 23 용력 21 마력 20이요."
"아."
샤믹의 대답을 들은 상원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가라앉은 거인>이 괴력에 특화된 승천자임을 생각하면 참으로 잡스러운 능력치였다.
자기 화신이 능력치를 그런 식으로 올리도록 놔둔 <가라앉은 거인>이 어떤 자인지를 보여주기도 했고.
"지금 가진 코인은 얼마나 되지요?"
"삼천이백 코인이네요. 언제 어떻게 쓸지 몰라서 이 정도는 항상 남겨놓고 있어요."
"좋습니다."
샤믹이 반드시 사야 할 물건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 * *
"그런데 아까 그거... 다 무슨 말이에요?"
"아까 그거라면 조합장이 한 얘기 말씀이시죠?"
"예. 본부가 어떻고 신탁이 어떻고... 이거 뭔지 다 모르겠어요."
"음. 예. 옛날얘기를 해드릴게요. 조금은 재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원은 대륙의 역사와 신탁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이를 전부 들은 샤믹이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해서 건너온 용사... 가 저희들이라는 거에요?"
"그렇습니다. 11번 시험에서 건너온 차원문, 그게 방금 말씀드린 그 차원문입니다."
"세상에. 이거 꼭... 깨야 되겠네요."
"그럼요. 단순한 시험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죠."
상원의 말에 샤믹의 눈이 빛났다.
"열심히 할게요. 하라는 대로 뭐든지 다."
"좋습니다 샤믹."
상원이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이 긴 이야기 끝에 도착한 곳은 거대한 탑이었다.
"여기는?"
"간단히 말씀드리면 쇼핑센터입니다. 없는 게 없죠."
상원과 샤믹이 탑에 들어섰다.
탑은 가운데가 뚫려 있어서 은은한 자연광이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떨어졌다.
1층 한가운데 있는 공간 이동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한눈팔지 말고 잘 따라오세요."
상원이 한치도 망설이지 않고 공간이동진을 밟았다.
조합에서 그랬던 것처럼, 상원과 샤믹은 몇 번을 이동했다.
수많은 상인들이 마법 스크롤과 아이템, 물약을 팔았지만 상원은 어디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나무로 된 작은 방이었다.
높은 책상이 방을 가르고 있었고, 책상 너머엔 피부가 파란 거한이 앉아 있었다.
"오, 오오! 드디어!"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거한의 표정이 달라졌다.
"당신들! 당신들 지구에서 왔지?"
거한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 그걸 어떻게?"
"왜 아냐면, 저 사람 아나르 사람이 아니라서 그래요."
샤믹의 말에 대답한 상원이 책상 앞으로 나아갔다.
"골리야스 상단의 물건은 품질에 틀림이 없을 줄로 알고 있습니다."
"어? 하, 하하! 그럼 그럼! 그렇고말고."
거한이 껄껄 웃었다.
상원의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승천 시험의 세계에서 가장 큰 상단인 골리야스의 일원이었다.
"자자. 우리 상단이 자랑하는 상품들이 여기 쭉...."
"됐고요."
상인이 카탈로그를 보여주려고 하는 걸 상원이 웃으며 제지했다.
"괴력 물약 서른 개, <땅의 내단> 그리고 <성장하는 바윗돌>이요."
상원의 말에 상인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손님. 뒤에 두 개는 왜 필요하신데?"
"쓸 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상원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손님, 혹시 사는 게 힘들어요? 멀쩡하게 생긴 양반이 왜 그런 걸 찾아요?"
당연한 반응이었다.
<땅의 내단>과 <성장하는 바윗돌>은 둘 다 먹는 약이었는데, 내단은 복용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기를 빨아들였고 바윗돌은 몸속에서 불어나는 물건이었다.
그러니까 먹는 건데, 먹으면 죽는 물건이었다.
"다 쓸 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악성 재고 처리해드리는 건데, 다 해서 삼천 코인이면 되겠죠?"
상원의 말에 잠깐 얼빠진 얼굴이 되었던 상인이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 좋수다. 그래, 삼천 코인으로 합시다."
"아, 계산은 제가 아니고 저 여자분이 하실 겁니다."
상원이 샤믹을 가리켰다.
"예... 저요?"
"예. 이제 받으시는 물건, 제가 말씀드리는 순서로 드시면 됩니다."
상원이 씩 웃었다.
샤믹 프란시스코, 그녀를 제13구역을 풀어나갈 장기말로 쓸 준비가 거의 끝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