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73화 (73/230)

제73화. 용사의 인장 (3)

"어머 정말요?"

샤믹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예. 확실한 소스가 있거든요."

상원이 씩 웃었다.

"한 번 믿어보시면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어머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샤믹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상원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했다.

샤믹이 결정을 유보하거나 거절할 경우를 대비하고 있던 게 무색해질 정도였다.

그건 샤믹이 긍정적이고 사람을 쉽게 믿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분명히 상원의 인상이 미치는 영향도 있을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1회차, 본래의 왜소하고 음울한 몸이었을 때는 상원에게 호의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그 생각을 하니 문득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야 참, 이세계에서 펼쳐지는 용사 시험이라니 완전 두근두근해요. 그럼 이제 뭐부터 하면 돼요?"

샤믹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잠시만 기다리시죠. 곧 수험자들이 더 올 겁니다."

상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 * *

다른 수험자들을 기다리는 동안 샤믹은 묻지도 않은 것들을 쉴 새 없이 이야기했다.

잘나가는 역도선수였던 자신이 부상을 당했을 때 얼마나 괴로웠는지, 어떤 고난과 역경을 딛고 재활에 성공했는지, 다시 역기를 쥘 준비가 됐는데 세상이 멸망해버려서 얼마나 참담했는지, 자기가 있던 우간다 쇼핑센터의 상황은 어땠는지.

그리고 수많은 시험들을 거치며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상원은 샤믹이 쫑알쫑알하는 말들을 웃으면서 들었다.

이 사람이 파이에벨에서 반드시 얻어야 할 <용제(龍帝)의 왕홀>을 얻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원은 알 수 있었다.

샤믹 프란시스코, 이 사람의 생존 의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상원은 어떻게 그녀가 가라앉은 거인같은 최악의 패를 들고도 12번 시험까지 올 수 있었는지를 다시 한번 납득했다.

그녀의 수다를 듣고 있자니 지구의 평상복을 입은 수험자들이 하나둘씩 대기실에 들어왔다.

모두들 처음에는 잔뜩 경계하는 표정이었다가 샤믹이 환한 표정으로 쫑알거리는 걸 보고는 곁에 와서 앉았다.

수험자들은 국적도 인종도 다양했다.

그리고 그들의 수호신은 하나같이 별 볼 일 없었다.

눈에 띄는 사람이라곤 <가라앉은 거인>의 화신 샤믹 프란시스코뿐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빨간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초췌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조합장님을 만나러 가시지요."

툭 내뱉듯 말한 마법사가 쌩하니 등을 돌려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수험자들이 자기를 잘 따라오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따라오세요."

그때 대기실에 있던 수험자 수는 상원과 샤믹을 포함해 고작 여섯이었다.

1회차 때 아보렐에서 12번 시험을 치른 수험자가 50명에 육박했음을 생각해보면 한 줌이라고 해도 좋을 숫자였다.

여섯 수험자들은 서둘러 마법사를 따라갔다.

사각형의 대기실 한 귀퉁이 바닥에 동그란 마법진이 있었다.

퓽!

마법사가 마법진 위에 올라가자 섬광과 함께 그의 몸이 사라졌다.

"어... 어어? 없어졌어?"

"진짜 순간이동인가?"

12번 시험까지 오면서 순간이동 능력자는 한 명쯤 봤을 법도 했다.

그런데 순간이동에 이렇게 반응하는 걸 보니 이 사람들은 정말로 쭉정이들인 것 같았다.

이런 쭉정이들과 함께 시험을 치른다는 건 경험 있는 수험자들에겐 굉장한 위험이었다.

하지만 상원은 별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이들과 함께해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이들 중 쓸모 있는 사람은 샤믹 프란시스코 한 명뿐이었다.

"공간이동 마법진이네요. 여기로 오시면 됩니다."

설명을 남긴 상원이 공간이동 마법진을 밟았다.

그러자 몸이 통째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짙은 연기가 눈앞을 뒤덮었다.

* * *

잠시 후 전혀 다른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들이 있는 곳은 빨간 카펫이 깔린 긴 복도였는데, 복도 좌우로는 울타리가 있었고 울타리 너머에 각종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드래곤뉴트 인형이 삐걱거리며 날아다녔고, 사람 몸뚱이만 한 커다란 전구가 주변으로 새하얀 벼락 줄기를 내뿜었다.

마력을 담은 도구들이었다.

"이거 자기 혼자 날아다니는 거예요?"

"이건 또 뭐지요? 와 신기해라."

수험자들이 수군댔다.

"조용히 하세요. 여기는 조합의 마법사들이 연구를 하는 공간입니다."

복도 끝에서 수험자들을 기다리던 마법사가 말했다.

그 말이 워낙 차가워서 수험자들은 무안하게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한눈팔지 말고 잘 따라오세요. 길을 잃어버리면 당신들이 굶어 죽을 때까지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을 테니까."

마법사가 살벌한 말을 남기고 공간이동진을 밟았다.

마법진은 방마다 여러 개가 있었는데, 마법사는 길을 외운 것 마냥 망설임 없이 마법진을 고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마법진을 밟은 마법사가 멈춰 섰다.

하얀 석재로 된 방이었는데 다른 방과 비교하면 천장이 까마득하게 높았고, 마법진의 반대편 벽면에는 그 천장 끝까지 뻗은 책장이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며 서 있었다.

수험자들의 머리 위로는 책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책장이 날개인 양 퍼덕거리면서.

"책들이 날아다녀요."

"우와...."

수험자들이 멍청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조합장실입니다."

마법사가 말했다.

"어서오세요."

그때 누군가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책장 앞에 있는 커다란 책상 앞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하얀색 로브를 차려 입은 여인이었는데, 얼굴은 중년처럼 보였지만 머리는 새하얘서 나이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반갑습니다, 이방인 여러분."

팟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수험자들 앞으로 순간이동했다.

수험자 일행을 안내했던 마법사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공간이동진을 밟고 사라졌다.

"저는 마법사 조합의 조합장이자 파이에벨의 시장, <데릴 파호른>입니다."

데릴 파호른이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눈 아래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에게선 멸망을 눈앞에 둔 도시의 시정(市政)과 마법사 조합의 행정을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최고 관리자의 피로감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저는 우간다에서 온 샤믹 프란시스코에요!"

"아... 안녕하세요. 존 에드워드입니다. 캐나다에서 왔어요."

"누르술탄 무르카잘리예프요. 키르기스스탄에서 왔소."

샤믹이 쾌활하게 인사하자 다른 수험자들도 쭈뼛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데릴은 미소를 지었지만 상원의 눈에는 그 미소가 어색하게 보였다.

상원은 그녀가 수험자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조합장님께서 저희를 용사로 인정해주시는 건가요?"

샤믹의 해맑은 물음에 데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용사요? 당신들이?"

데릴이 던지듯 말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흠칫 놀란 샤믹이 한 걸음 물러섰다.

"당신들이 온 것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아요?"

데릴이 수험자들을 노려보았다.

"우리 시는 대항마진을 유지하기 위한 마나를 공급하는 것만도 빠듯해요. 그런데 당신들을 이세계에서 불러오기 위한 차원문을 여는 데 드는 마나의 대부분도 우리 시가 부담했습니다. 지하에 있는 마나를 모조리 끌어다 쓰느라 마나맥(脈)이 흔들려서 중앙마나기관이 맛이 가버리는 걸 부담하면서까지요. 그래놓고 온 용사들이라는 게 이런 머저리들이라니."

데릴이 기관총을 쏘듯 쏘아붙였다.

"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샤믹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런데 보자마자 머저리들이라니. 이 여자 말본새하고는."

누르술탄이 이를 갈았다.

상원이 조용히 누르술탄의 어깨를 두드렸다.

데릴 파호른이 수험자들에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됐으니까.

"이따 설명해드릴 테니까, 지금은 잠자코 들으세요."

상원이 나직이 말했다.

"후, 죄송해요. 말이 심했습니다. 어쨌든."

데릴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본부의 신탁은 지금까지 틀린 적이 없으니 여러분은 용사가 맞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시와 조합은 회의주의에 기반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학도로서, 이번 신탁을 무턱대고 믿을 수 없습니다."

데릴이 수험자들의 눈을 보았다.

상원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뿌리 깊은 불신을 읽었다.

"말씀드렸지요. 지하의 마나맥이 흔들려서 중앙마나기관이 오작동하고 있다고요. 특히 제4구역이 심각합니다. 지금부터 48시간 뒤면 제4구역이 폐쇄 절차에 돌입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 시는 항구적인 피해를 입게 될 거예요."

데릴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자, 용사 나으리들. 어서 가서 제4구역의 오작동을 해결하고 오세요. 그러면 제가 여러분을 기꺼이 용사로 인정해드릴 테니."

데릴이 차갑게 웃었다.

"뭐라구요? 아니, 잠깐만요. 그 제4구역이라는 데는 어떻게 가고, 오작동하는 기계는 어떻게 고치는데요?"

당황한 샤믹이 물었다.

"그건 우리 잘나신 용사님들이 알아서...."

"듣자듣자 하니까 너무하네."

누군가 데릴의 말을 끊었다.

조합장실에는 데릴과 수험자들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책장과 책상 사이에서 나타난 사람은 키가 작고 퉁퉁한 여자였다.

"조합장님. 피곤하신 건 알겠는데 너무 까칠한 거 아니야?"

"에론."

데릴이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파이에벨의 드워프 장인. 저 사람이군.'

새로 나타난 사람을 보며 상원이 눈을 반짝였다.

록시의 실력으로는 제작할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줄 수 있는 자.

그녀가 바로 에키나르타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장인 <에론 클라드>였다.

짧은 다리로 한참을 걸어온 에론이 수험자들 앞에 섰다.

"저는 파이에벨 중앙마나기관의 총관리자 에론 클라드입니다. 우리 조합장 말씀 더러운 건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쯧."

데릴이 혀를 차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면 용사 인정은? 받을 수 있어요?"

또 다른 수험자가 물었다.

"그건 조합 전체의 결정이기 때문에 당장 뒤집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제4구역의 고장을 해결하셔야 됩니다. 방금 여기 아가씨가 제4구역이 어디고 고장은 어떻게 해결하는 건지 물으셨는데, 그건 걱정 마세요. 길은 제가 안내하고 기계도 제가 고칠 테니.“

에론의 말투는 비교적 나긋나긋했지만 그녀 또한 단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 저희는 뭘 하면 되는데요."

"저를 제4구역까지 데려다주시면 됩니다."

존의 말에 에론이 호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런 거라면 뭐."

"생각보다 쉽겠네요. 그렇죠?"

수험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다.'

상원의 생각은 달랐다.

에론 클라드의 말대로, 제4구역까지 길은 그녀가 안내할 것이고 기계도 그녀가 고칠 것이다.

문제는 제4구역까지 가는 길을 지키는 방어 장치가 고장 났다는 것이었다.

파이에벨의 수험자들이 <용사 인정>을 받고 12번 시험을 통과하려면 중앙마나기관을 지키는 강력한 골렘들을 상대하면서 복잡한 미로 같은 길을 뚫고 제4구역에 닿아야 했다.

그것도 48시간 이내에.

수험자들의 면면을 보아하니 이들은 죽었다 깨나도 12번 시험을 통과할 수 없었다.

"아아,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말이 좀 심했습니다. 요새 과로가 좀 심해서."

데릴 파호른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앞에 보이시는 에론 클라드가 여러분을 안내할 겁니다.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갑시다 여러분."

에론이 수험자들을 지나쳐 공간 이동진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잠깐만요, 조합장님."

상원이 외쳤다.

"지금 이 도시의 문제는 4번 구역이 아닐 텐데요."

상원의 말에 데릴과 에론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상원은 씩 웃으며 말했다.

"제가 총관리자님을 13번 구역에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제가 돌아오면 수장고 최상층에 있는 <용제의 왕홀>을 주십시오."

그의 말에 데릴이 경악에 물든 표정으로 물었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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