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용사의 인장 (2)
상원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다란 산맥의 그림자가 밤하늘의 가장자리와 맞닿아 있었다.
만년설이 창백한 별빛을 반사했다.
파이에벨이 어디인지,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단서는 보이지 않았다.
"더럽네."
상원이 나직이 읊조렸다.
험준한 흰색 산맥 한복판에서 파이에벨을 찾는 것부터가 시험의 내용이었다.
상당히 추웠고 지형은 지독하게 험악했다.
1회차 때 갔던 아보렐과는 완전히 달랐다.
시간 안에 파이에벨에 도착하지도 못하는 수험자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정보가 있는 승천자들이 파이에벨을 기피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남은 시각: 71시간 59분]
남은 시간은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상원은 걱정하지 않았다.
회복실에 있는 동안 새로 이식된 기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살짝 정신을 집중하자 시스템 메세지가 떴다.
[드론을 사출합니다.]
푸식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어깨가 세로로 갈라지면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납작한 기계가 튀어나왔다.
이어서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기계에서 전개된 프로펠러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기계가 슝 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상원의 어깨에서 튀어나온 기계는 다름 아닌 드론이었다.
'승천 시험에 드론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상원이 피식 웃었다.
이 드론도 천재적인 공학자 <기계장치의 신>의 작품이었다.
겉보기엔 그냥 예쁜 드론이었지만 기능은 최첨단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동력과 출력, 연산 능력에 카메라 성능까지 부족한 게 없었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드론이 새파란 빛을 뿜으며 주변 지형을 탐색했다.
상원의 머릿속에 주위 풍경이 조감도처럼 입력되었다.
목적지인 파이에벨은 커다란 계곡 두 개 너머에 있었다.
목적지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상원의 걸음으로 약 10시간이었다.
"좋아. 가볼까."
상원이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뎠다.
뽀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상원의 발이 눈 속으로 쑥 들어갔다.
"그어어어억."
"그으으으윽."
그때 기이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주변이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태초의 대족장과 맞서다가 손상된 스킬 메모리가 완전히 복구되지는 않아서, 상원은 어둠 속을 꿰뚫어 보는 <동굴적 감각>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아쉽지 않았다.
상원에게는 다른 능력이 생겼으니까.
[경고. 마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드론이 보내는 경고메시지였다.
상원은 화면 모드를 전환했다.
실사로 보였던 지형이 녹색 선으로 처리된 3D 모형으로 변했다.
점 여러 개가 그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파란 점으로 표시된 상원을 향해서 여러 개의 빨간 점들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넘어오자마자 덤비는군."
상원이 나직하게 말했다.
어기적거리며 다가오는 마물들이 상원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좀비들이었다.
숫자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개중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늑대며 곰 같은 야생 동물 좀비들도 있었다.
이들 각각의 힘은 지구의 성역 바깥을 돌아다니던 좀비들보다 훨씬 강했다.
게다가 숫자도 상당히 많았다.
시시각각으로 숨통을 조여 오는 좀비들에게서 살아남는 것, 그게 <아나르>의 밤이었다.
보통 수험자라면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상원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타이밍에 좀비들을 만난 게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기계장치의 신>이 조정해준 힘을 써 볼 기회였으니까.
상원이 정신을 집중하자 그의 왼쪽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와 함께 드론에 달린 파란색 표시등이 점멸했다.
[방어 모드로 전환합니다. 다가오는 마물을 공격합니다.]
드론의 바닥에서 전구같이 생긴 물체가 튀어나왔다.
전구 주변으로 파지직 소리와 함께 새파란 스파크가 튀었다.
태초의 대족장이 뿜어내던 것과 같은 파란색이었다.
의체에 내장된 기능 중 하나인 강신회로를 통해 복사한 마신 <태초의 대족장>의 힘이 드론에 전송되는 것이었다.
드론이 윙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뒤이어 드론이 날아간 곳에서 쩍 소리와 함께 새파란 섬광이 튀었다.
드론이 마물들을 향해 벼락 줄기를 발사하고 있었다.
"끄어어억!"
벼락을 맞은 좀비들은 통구이가 되어버렸다.
비록 복사한 힘이었지만 원본이 무려 정령왕이었다.
좀비들 정도는 우습게 태워버릴 수 있었다.
드론은 상원에게 접근하는 좀비들을 알아서 처리했다.
상원이 오로지 흰색 산맥을 넘는 데만 집중할 수 있도록.
"좋군."
씩 웃은 상원은 드론이 알려준 길을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했다.
* * *
멀리 능선에 나타난 마법사들의 도시 파이에벨을 보았을 때, 상원은 이제 안내가 없어도 길을 잃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도시의 외관이 두드러졌기 때문이었다.
노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마법사들의 도시 파이에벨. 도시의 중앙에는 마나 지맥에서 솟아오르는 마나가 형상화된 마나 기둥이 있다.]
'역시... 읽은 거랑 보는 건 다르군.'
상원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감탄했다.
노트에서 읽었던 그 기둥이 저렇게까지 굵고 선명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흰색 산맥 기슭의 구릉에서 하늘로 솟아오른 새하얀 마나 기둥은 구름을 뚫고 밤하늘 먼 곳까지 뻗어나가고 있었다.
다섯 차원의 정수에 잿불을 비롯한 여러 땔감으로 강화한 서울역의 성화와도 맞먹을 정도였다.
파이에벨이 평범한 도시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건 마나 기둥 뿐만이 아니었다.
마나 기둥 주변으로 정육면체 모양의 건물들이 공중에 떠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저 건물들이 바로 상원이 가야 하는 장소, 파이에벨의 <마법사 조합> 건물이었다.
[남은 시간: 66시간 17분]
시스템 창을 켜서 남은 시간을 확인한 상원이 천천히 능선을 내려갔다.
상원이 평지에 도착한 건 산맥의 동쪽 능선이 치밀어오는 햇살로 어렴풋이 밝아올 즈음이었다.
도시를 둘러싼 황금빛 장벽이 햇살을 받아 빛났고, 그 너머로 솟아오른 첨탑들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장벽에 적힌 커다란 글귀들이 보였다.
마물들로부터 도시를 지키는 강력한 주문을 담은 글귀였다.
장벽 가운데 성문이 있었다.
평소라면 굳게 닫혀 있을 성문은 활짝 열린 채였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 넘어올 수험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다.
성문 좌우로 파이에벨을 상징하는 성수 <드래곤뉴트> 석상이 서 있었다.
인간의 몸에 드래곤의 얼굴과 날개가 달린 형상이었다.
- 멈추십시오.
성문을 지나가려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드래곤뉴트 석상의 목소리였다.
석상의 눈이 하얗게 빛났다.
- 통행증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상원은 석상을 향해 손등에 찍힌 <시험의 인장>을 보여주었다.
- <용사의 인장>이 확인되었습니다.
- 용사께서는 마법사 조합 1층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성문을 지나자 풍경의 밑바닥이 회색으로 변했다.
돌바닥이 잘 깔린 널따란 광장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파이에벨은 설원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마나 기둥이 눈을 증발시켜버리기 때문에 도시 내부에는 눈이 쌓이지 않았다.
상원은 광장을 오가는 파이에벨 시민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찌들고 초췌한 얼굴이었다.
마법사들의 도시 파이에벨.
대륙을 통일했던 <카이네딘 제국>의 지식이 모이는 곳이자 제국의 찬란한 황금기를 이끌었던 황제 <비젤 카스파>의 고향.
그 융성했던 도시는 제국의 멸망 이후 끊임없이 쇠락해갔다.
밤이면 도시 밖으로 언데드를 상대하느라 물자는 계속 떨어져 가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파이에벨 지하를 흐르는 마나 지맥이 흔들려버린 탓에 도시를 떠받치는 섬세한 기계장치들도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니 시민들이 피폐해진 것도 당연했다.
파이에벨에서 치르는 12번 시험은 이 쇠락한 도시를 구원하는 일이었다.
상원은 기억을 더듬어 파이에벨의 시험 내용과 공략 루트를 체크했다.
시험을 통과하는 것 자체는 간단했다.
하지만 상원은 그걸 넘어서는 일을 해야 했다.
일곱 별의 왕관을 이루는 두 번째 별을 얻으려면 파이에벨에서 꼭 챙겨가야 하는 물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상원은 정육면체 모양으로 생긴 커다란 건물 앞에 도착했다.
건물 뒤로는 새하얀 마나 기둥이 솟아올랐고, 마나 기둥을 따라 정육면체 건물들이 천천히 회전했다.
이곳이 바로 12번 시험의 통과 조건인 <용사 인정>을 해주는 <마법사 조합장>이 있는 곳, <마법사 조합>이었다.
* * *
외형과는 달리 건물 내부는 한산했다.
대리석으로 마감한 커다란 홀에는 긴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표정 없는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조합에 소속된 마법사들이었다.
'내가 처음 도착한 건가.'
상원이 홀을 훑어보는데 사람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젊은 흑인 여자였는데, 상원은 그녀가 수험자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위아래 초록색 트레이닝복 차림에 놀란 눈으로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건물을 둘러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 주변을 지나가는 마법사들은 그녀에게 어떤 관심도 주지 않았다.
조합장을 만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듯하여, 상원은 구석에서 조용히 계획을 점검해보려고 했다.
"어... 저기요?"
그런데 흑인 여자가 쪼르르 달려와 말을 걸었다.
"그쪽, 수험자죠?"
그리고는 상원의 손을 덥썩 잡더니 손등의 표식을 확인했다.
"맞네, 수험자네. 안녕하세요, 저는 샤믹 프란시스코에요. 우간다에서 왔어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아마 13번 시험까지 오기 전에 죽었을 것이다.
상원의 생각을 모르는 샤믹은 상원의 손을 열렬히 흔들었다.
"아, 예. 조상원입니다."
강아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상원이 살짝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와 그런데 진짜 잘생겼네요. 옛날에 무슨 아이돌 같은 거였어요? 아니다. 아이돌치고는 너무 큰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는 않고요. 그런데 아주 일찍 도착하셨네요?"
회복실에서 나온 이후로 외모에 대한 얘기를 지나치게 많이 듣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상원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궁금하기도 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는지.
"아? 하하, 빠르죠? 제 수호신이 <가라앉은 거인>이거든요. 도시 위치도 알려주고 빨리 달릴 수 있게 힘도 줬어요. 무지 귀찮아하긴 했지만."
쫑알쫑알하는 샤믹의 대답을 들은 상원의 눈이 빛났다.
가라앉은 거인.
계속 자라다 보니 너무 무거워져서 땅 밑으로 가라앉았고, 그 후로 지하에서 쭉 자고 있다는 신령급 승천자.
격이 높고 힘이 세다고 좋은 승천자인 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가진 힘은 굉장해서 주신급도 넘볼 수 있지만 그에겐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으니, 시험에 적극적으로 임할 생각이 한 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자를 수호신으로 두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건 화신의 삶에 대한 애착이 굉장하다는 뜻이었다.
그 정도로는 파이에벨의 12번 시험을 깰 수 없었겠지만.
'잠깐만. 가라앉은 거인이 있다면 히든 던전은 생각보다 쉽게 깨겠는데?'
그 생각이 들자마자 상원의 표정이 바뀌었다.
"반가워요, 샤믹. 수호신께서 아주 대단하신 분이시군요."
상원이 만면 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에이, 뭐 그렇지도 않아요. 남들은 보면 수호신님들이 수험 정보도 주고 그러는 것 같던데, 이 양반은 도대체 뭐 하는지 관심이 없다니까요. 이번 시험도 도대체 뭐 어떻게 깨야 될지 모르겠어요."
"그래요? 그렇다면."
상원이 샤믹의 두 손을 잡았다.
"저랑 같이 깨시겠어요? 이번 시험, 저한테 확실한 정보가 있어요."
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