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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71화 (71/230)

제71화. 용사의 인장 (1)

"끄아아아악!"

창훈이 온 서울역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는 혜경을 걱정 어린 눈으로 돌아보았다.

"혜경 씨에겐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창훈 씨가 문제지요."

상원이 창훈의 손을 꽉 잡았다.

"창훈 씨, 이걸 드세요. 검은 숲의 목자가 심어놓은 독기가 퍼지는 걸 막을 겁니다."

상원이 태성에게 받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주머니 속에는 태성이 제조한 <반부환>이 들어있었다.

창훈이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윽!"

주머니를 떨어뜨린 창훈이 코를 움켜쥐고 오만상을 쓰면서 고개를 돌렸다.

반부환이 내뿜는 지독한 냄새 때문이었다.

땅바닥에 떨어진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갈색 알약들이 굴러 나왔다.

알약은 말 그대로 코가 문드러질 것 같은 냄새를 풍겼다.

"이게 무슨 냄새야?"

"으윽, 젠장!"

주변에서 상황을 구경하던 수험자들마저 코를 움켜쥘 정도였다.

"창훈씨."

알약을 주워 담은 상원이 굳은 얼굴로 창훈에게 주머니를 내밀었다.

"눈 꽉 감고 씹어 드세요. 검은 숲의 목자를 막으려면 창훈씨가 이걸 꼭 드셔야 됩니다."

"으... 알겠습니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창훈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알약 하나를 쥐었다.

와그작!

창훈이 알약을 씹었다.

"세상에, 하나님."

"아이고, 아이고...."

구경하던 수험자들마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창훈의 온몸에 돋아있던 검은 핏발이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반부환의 효과로 검은 숲의 목자가 창훈의 몸속에 심어둔 씨앗이 힘을 잃은 것이었다.

"확실하지?"

태성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반부환은 <검은 숲의 목자>와 상극인 <화산정의 혐오체>의 분비물을 본따 만든 약이었다.

반부환도 심지혈탕도 제조가 극히 까다로웠는데 오태성은 그걸 훌륭하게 해냈다.

상원이 4번 시험부터 공을 들여 태성을 키워온 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예, 어르신."

상원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이럴 수가."

창훈이 놀란 얼굴로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몸이 씻은 듯이 나았어요."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시험이 시작되고 몇 달 동안 창훈은 시름시름 앓는 화초처럼 성화 곁에 누워만 있었다.

그런 그에게 몸이 회복된 느낌은 각별할 것이었다.

"완전히 나은 게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독기를 눌러둔 것뿐이죠."

상원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정오에 한 알, 자정에 한 알. 두 달은 먹을 수 있는 양이야.“

태성의 말에 상원이 고개를 돌려 혜경을 보았다.

"다 먹기 전에 끝내야죠."

땅바닥에 웅크린 혜경의 경련과 비명이 가라앉고 있었다.

"여보."

창훈이 혜경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 여보?"

고개를 든 혜경의 얼굴에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좀 어떤가?"

"머리가... 맑아요. 이런 느낌은 처음이에요."

태성의 질문에 대답하는 혜경의 목소리가 또렷했다.

그녀의 눈에는 지금껏 찾아볼 수 없었던 총명한 빛이 돌아와 있었다.

두 번째 시험이 끝나고 검은 숲의 목자와 계약을 맺은 직후보다도 상태가 훨씬 나았다.

태성이 달인 심지혈탕의 효과였다.

"검은 숲의 목자를 가둬두었습니다. 놈의 힘을 남겨놓고요. 당분간 놈에게 잠식되지 않고 힘을 쓸 수 있을 겁니다."

상원이 혜경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이 약을 계속 만드는 건...?"

"안 됩니다. 약재가 너무 귀해요."

창훈의 말을 칼같이 자른 상원이 품에서 커다란 보자기를 꺼냈다.

"어르신. 남은 약재입니다. 혜경 씨가 12번 시험이 끝날 때까지 심지혈탕을 드실 수 있는 분량입니다."

"알겠네."

태성이 보자기를 받아들었다.

상원이 초시계를 체크했다.

그의 눈앞에 표와 지도가 나타났다.

커다란 나비처럼 생긴 에키나르타 대륙의 지도, 그리고 이계로 통하는 차원문에 들어가는 시간대에 따라 전송되는 장소가 정리된 표였다.

상원은 오태성과 송혜경을 보낼 장소를 정해두었다.

[41분 18초 ~ 42분 1초: 오스터 군도]

오스터 군도는 대륙의 오른쪽 날개 아래 위치한 곳으로, 전송 장소 중 유일하게 대륙 바깥에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거의 모든 승천자들이 기피했다.

왜냐하면 사시사철 맹렬한 태풍이 군도 주변을 휘감고 있기 때문에, 여기로 가게 되면 13번 시험을 깨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원을 비롯한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오스터 군도는 성지(聖地) 다림델로 직통하는 차원문이 남아있는 유일한 장소라는 것이었다.

"어르신, 이것도 가져가십시오."

상원이 품에서 노트 한 권을 꺼냈다.

"이게 뭔가?"

"어르신과 혜경 씨는 <오스터 군도>라는 곳으로 가시게 될 겁니다. 그 군도의 중앙섬에 성지로 직통하는 차원문이 있습니다. 그걸 작동하는 방법입니다."

태성이 노트를 받았다.

"아시지요 어르신? 탕약이 떨어지면 혜경 씨가 어떻게 되는지."

"수호신을 눌러놓은 반작용이 한 번에 몰려오겠지. 괴물이 될 거야."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어르신, 12번 시험이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차원문으로 가십시오. 그러면 어르신의 역할은 끝납니다."

"후우."

태성이 한숨을 쉬었다.

"말이 참 그렇지만... 폭탄을 안고 가는 기분이군."

"탕약이 있는 동안은 안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상원이 태성의 두 손을 꽉 쥐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태성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혜경 씨, 이제 가셔야 합니다. 창훈 씨랑은 곧 다시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상원이 초시계를 체크하고 말했다.

"여보, 몸조심해."

"자기 몸이나 챙기셔."

웃으면서 대답하는 혜경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도 슬픔과 걱정이 가득했다.

꼭 안고 있던 부부가 서로의 몸을 떼었다.

혜경과 태성이 불꽃 앞에 섰다.

"상원 씨, 잘 부탁해요.

혜경의 얼굴에 힘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걱정 마세요. 두 분의 아픔도 곧 끝날 겁니다."

상원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새파란 불꽃이 정정한 노인과 커다란 여인을 삼켰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성역 서울역: 8/10]

이제 마지막이었다.

상원은 초시계를 체크하고 표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가야 할 곳에 해당하는 시간대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52분 55초 ~ 53분 38초: 파이에벨]

다림델의 북서쪽 흰색 산맥 너머에 위치한 마법사들의 도시.

1회차에는 가지 않은 곳이었다.

왜냐하면 얻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나르에서 치러질 12번 시험과 13번 시험의 난이도는 어느 곳으로 전송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파이에벨은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해 난이도는 지나치게 높은 최악의 선택지였다.

상원이 1회차에 간 곳은 원강수와 박명희를 보낸 엘프들의 도시 <아보렐>이었다.

난이도에 비해 보상이 가장 큰 곳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가 유성희랑 강상중이를 차례대로 만났고... 죽을 뻔했지.'

이번에는 달랐다.

날개가 꺾인 유성희는 큰 장애물이 아니었고, 한 번 겪어본 강상중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상원은 <파이에벨>로 가야만 했다.

두 번째 별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거기에 있었으니까.

"후우."

한숨을 내쉰 상원이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어긋나지 않았다.

하지만 긴장해야 했다.

검은 숲의 목자를 꺾고 일곱 별의 왕관을 이루는 두 번째 별까지 얻으려면 수많은 계획을 어긋나지 않게 수행해야 했다.

"자, 창훈씨."

"예."

씩씩하게 대답한 창훈이 상원 옆에 섰다.

"대장, 잘 갔다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창훈씨! 창훈씨도 다치지 말아요."

둘러서 있던 수험자들이 한마디씩 했다.

상원이 고개를 돌려 수험자들을 바라보았다.

이들 하나하나가 상원에게 소중한 힘이 될 것이었다.

"형님, 걱정하지 마시고 잘 다녀오십쇼."

정장 차림에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긴 남자가 말했다.

아나르의 시험이 끝날 때까지 상원과 문혁을 대신해 서울역을 지휘할 송형우였다.

"그래, 믿고 맡기마. 가시죠."

두 남자가 불꽃 앞에 섰다.

겉으로 보기엔 불꽃이었는데도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서는 눅눅하고 오래된 지하실 냄새가 났다.

"후우."

긴장한 창훈이 두 주먹을 꽉 쥐고 심호흡을 했다.

'두 번째 별. 이제 곧이다.'

상원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곧 차가운 불꽃이 온몸을 감쌌다.

[성역 서울역: 10/10]

[축하합니다. 열한 번째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성화의 온기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 * *

밤이었다.

"어... 으윽... 으으윽...."

창훈이 깨어났을 때 상원은 바위 위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으... 상원... 상원 씨."

고통스러워하는 창훈의 입에서 입김이 피어올랐다.

"여기... 우리가 제대로 온 건가요?"

"그렇습니다."

상원이 밤하늘을 가리켰다.

"어... 어?"

창훈이 두 눈을 부릅떴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엔 세 개의 달이 빛나고 있었다.

커다란 달 두 개가 창백한 푸른색을 내뿜고 있었고, 나머지 조그만 달은 은은한 분홍색으로 빛났다.

"여기가 이세계... 확실히 알겠습니다. 으으윽...."

창훈이 어깨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으... 몸이... 너무 아파요."

"반부환의 효과가 다해서 그렇습니다. 그걸 먹지 않았다면 창훈 씨는 차원문을 넘어오는 과정에서 죽었을 겁니다."

침착하게 대답한 상원이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멜론만 한 크기의 검푸른 구슬이었는데 안에는 창백한 도깨비불이 요동치고 있었다.

3번 시험에서 <대강령술사 오디나스>를 추방하고 얻은 귀물급 보구 <의령수의 심장>이었다.

"자, 받으십시오."

창훈이 구슬을 받아들었다.

"잠깐만 주무시고 계십시오 창훈씨. 이따가 약 드실 시간 되면 깨워드리겠습니다."

"예?"

그 순간 구슬에서 뻗어 나온 도깨비불이 창훈의 코와 입속으로 들어갔다.

"커어... 어어억!"

털썩, 구슬을 떨어뜨린 창훈이 쓰러졌다.

상원이 창훈의 몸을 뒤집었다.

숨결도 맥박도 느껴지지 않았다.

<의령수의 심장>의 힘으로 가사 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이 상태라면 브라이싱크론 지갑 속의 아공간에 보관할 수 있다.

상원이 창훈에게 지갑을 대자 창훈이 지갑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움직이는 것조차도 힘든 창훈과 함께 아나르의 시험을 헤쳐나가는 건 상원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계획을 이행하려면 반드시 창훈을 데려가야 했다.

그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상원이 택한 방법이 의령수의 심장으로 한창훈을 가사 상태로 만들어서 지갑 속에 넣고 다니는 것이었다.

상원은 딜레마를 간단히 해결했다.

"자, 이제 가볼까."

쾌청한 밤하늘로 입김이 퍼졌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빛이 파이에벨 근처 흰색 산맥의 만년설을 비추고 있었다.

발을 디디자 눈에서 뽀드득하는 소리가 났다.

그때였다.

[열두 번째 시험 <용사 인정>을 시작합니다.]

[<파이에벨>의 <마법사 조합장>에게서 용사로 인정받으십시오.]

[주어진 시간은 72시간입니다.]

[72시간 안에 성공하지 못할 경우 항마진에서 추방됩니다.]

열두 번째 시험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가 떴다.

이세계 아나르에서의 시험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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