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70화 (70/230)

제70화. 이세계의 부름 (4)

성역 서울역의 수험자들 수백 명이 아나르로 향하는 차원문 앞에 둘러 서 있었다.

사람들이 둘러싼 공터에 상원을 비롯한 몇몇 수험자들이 서 있었다.

아나르로 향할 수험자들이었다.

차원문 앞에 선 상원이 손에 쥔 초시계를 확인했다.

상원은 집행자 사마에트가 나타난 순간 초시계를 눌렀다.

서울역의 수험자들을 최적의 장소로 보내기 위해서였다.

"이제 가면 되나요?"

진아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의 옆에 선 문혁의 표정도 딱딱했다.

"아니오, 아직입니다."

상원이 대답했다.

차원문을 건넌 수험자는 아나르의 드넓은 대륙 <에키나르타> 어딘가로 떨어진다.

대부분의 수험자들이 모르는 사실은 떨어지는 위치가 무작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위치는 들어가는 시각에 따라 정해졌다.

상원은 눈을 감았다.

그의 눈앞에 거대한 창 두 개가 나타났다.

왼쪽에는 표가 펼쳐졌다.

상원이 새하늘교에 있으면서 보았던 노트에는 시각에 따른 위치가 초 단위로 적혀 있었다.

통째로 암기한 노트가 표 형태로 정리되어 있었다.

상원의 기억은 단순한 암기를 넘어서 대량의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수준이었다.

오른쪽에 있는 건 지도였다.

하얀 바탕에 까만 선으로 그려진 에키나르타 지도였다.

대륙은 나비 모양이었는데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 한가운데 점이 찍혀 있었다.

왼쪽에 있는 점이 13번 시험의 목적지이자 14번 시험의 무대, 성지(聖地) <다림델>이었다.

오른쪽에 있는 점이 15번 시험의 목적지인 <제도>였다.

'어디 보자.'

상원이 표를 훑어 내려갔다.

[3분 16초 ~ 34초: 아보렐]

성지 다림델의 북동쪽 깊은 침엽수림 속에 있는 엘프들의 도시.

육마귀 중 하나이자 하나교 교주인 <새하나의 증인> 유성희는 여기로 갈 것이다.

개성 <그물 금자탑의 정점>을 강화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상원은 다시 초시계를 보았다.

첫 번째 조를 보낼 시간이었다.

"강수 씨, 명희 씨."

중년 남녀가 상원 앞으로 나왔다.

<길잡이> 원강수와 <신실한 간호사> 박명희, 둘 모두 유성희가 이끄는 하나교 신도였다.

"하나된 영광이 함께."

상원이 강수와 명희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상원은 저들이 자신을 하나교도로 생각할 수 있게끔 위장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접근해서 유성희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된 영광이 함께."

"하나된 영광이 함께."

강수와 명희가 일심동체인 것처럼 대답했다.

"어제 꿈에 총재님이 나오셨습니다."

상원의 거짓말에 두 남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아... 아아 총재님...."

유성희를 부르는 명희의 목소리가 촉촉했다.

"그래서? 그래서 총재님이 뭐라시던가?"

"조만간 총재님을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상원의 대답은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곧 유성희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들을 아보렐로 보낼 거니까.

"두 분께서 꼭 총재님의 힘이 돼주셔야 합니다."

강수와 명희가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챙겨 가십시오. 총재님께 보내드리는 힘을 증폭시키는 부적입니다. 이걸 품에 가지고 계시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겁니다."

강수가 품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새까만 밀짚 인형을 꺼냈다.

"이거... 이거 제웅 아니야? 아이구 흉하게도 생겼네."

"그러게요... 어떻게 봐도 저주 인형인데. 정말 이걸로 총재님을 도울 수가 있어요?"

당연한 반응이었다.

상원이 꺼낸 물건은 영락없는 저주 인형이었으니까.

"총재님께서 꿈을 통해 특별히 부탁하신 일입니다."

상원이 제웅을 강수의 손에 들려주었다.

"그래요, 우리 아이님 말씀이니까 틀림없겠지."

강수가 대답했다.

"자 이제 들어가시죠."

강수가 두 사람을 차원문으로 안내했다.

"곧 다시 만나겠습니다."

"그래요. 곧 봐요 아이님."

"우리 힘내자고, 힘!"

상원의 말에 대답한 명희와 강수가 불꽃 속으로 들어갔다.

새파란 불꽃이 두 남녀를 삼켰다.

이제 다음 순서였다.

[16분 22초 ~ 49초: 프리바론]

성지(聖地) 다림델의 동쪽 산맥 가운데 있는 드워프의 도시.

여기엔 육마귀 중 최강자인 <콘크리트 회장> 강상중이 갈 것이다.

그의 수호신 <마천루 건설자>가 원하는 지식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웅아, 준배야."

초시계를 확인한 상원이 프리바론으로 갈 두 명을 불렀다.

사람을 잘 믿지 않는 강상중이 신뢰하는 만웅과 그의 식구 준배.

상원이 재능도 수호신도 특출나지 않은 만웅을 곁에 두고 있는 건 그의 고용주 강상중을 낚기 위해서였다.

강상중을 낚으려면 만웅을 상중 곁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강상중은 <콘크리트 회장>이라는 이명이 보여주는 것처럼 단단하고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곁에 있는 김만웅이 그를 무너뜨리는 균열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후우."

만웅이 한숨을 푹 쉬었다.

준배의 얼굴도 어두웠다.

몇 시간 전 지휘 본부에서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그때 만웅은 상원과 상중이 싸울 수도 있냐고 물었고, 상원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형님, 나는...."

"만웅아."

상원이 만웅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 마음 가는 대로 해. 나는 괜찮다."

"하아... 씨발...."

만웅이 하늘로 한숨을 뱉었고, 준배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땅을 보았다.

"이제 들어가라. 더 늦으면 안 된다."

덩치가 커다란 두 남자가 불꽃을 향해 걸어갔다.

"형님."

걸어가던 만웅이 뒤를 돌아보며 상원을 불렀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소."

"저도요. 고마웠습니다 형님."

상원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자가 불꽃 속으로 들어갔다.

육마귀 유성희의 신도인 원강수와 박명희.

육마귀 강상중의 부하인 김만웅과 박준배.

상원이 그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

첫째, 상원이 강수에게 준 물건 <목숨받이 제웅>에는 상원이 그들에게 말해주지 않은 기능이 있다.

그 기능은 유성희가 최대의 힘을 내려고 할 때 그녀를 옭아맬 것이다.

둘째, 강상중과 유성희가 대치할 것이다.

에키나르타의 지형 때문에, 13번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성지로 가는 동안 둘은 반드시 마주할 수밖에 없다.

상원은 어부지리를 취할 것이다.

'좋다, 다음.'

상원은 표를 보았다.

[25분 1초 ~ 27초: 요이르오름 구릉]

요이르오름 구릉은 에키나르타 왼쪽 날개의 동남쪽에 있는데, 왼쪽 날개 중에선 마물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서울역의 수험자들 중 가장 강한 두 사람을 여기로 보낼 것이다.

"진아 씨, 문혁 씨."

커다란 안경을 쓴 조그만 여인과 몸매가 단단한 장신의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낙원의 수문장>의 화신 윤진아와 <해안선의 귀신>의 화신 백문혁.

상원을 제외하면 이 둘이 서울역의 최강 전력이었다.

"두 분께는 별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마음껏 사냥하시고 최대한 강해지셔서 다림델에서 뵙겠습니다."

상원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엄청나게 강해져서 갈게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아는 씩 웃었고 문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성격도 능력도 다른 둘은 그런데도 꽤나 죽이 잘 맞는 것 같았다.

"예. 부디 무탈하시기를."

새파란 불꽃이 진아와 문혁을 삼켰다.

[성역 서울역: 6/10]

네 명이 남았다는 메세지가 떴다.

그런데 공터에는 상원뿐이었다.

"누가 더 가죠?"

"그러게? 은화 씨 들은 얘기 있어요?"

"아뇨."

공터를 둘러싼 수험자들이 수근수근했다.

그때였다.

"아이고, 잠깐만. 잠깐만 지나갑시다."

소리가 난 쪽의 수험자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 어? 어르신? 그게 뭐예요?"

"아이고 냄새야."

수험자들이 코를 쥐고 비켜서자, 그들 자리로 깡마른 노인이 나타났다.

성성한 백발에 얼굴은 쭈글쭈글했지만 몸은 꼿꼿했다.

최상급 치료사인 <청낭의 의선>의 화신인 침술사 오태성이었다.

태성은 널따란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쟁반 위에는 피처럼 새빨간 탕약이 든 냄비와 까만 주머니가 있었다.

빨간 탕약은 <심지혈탕>이었고, 까만 주머니에는 <반부환>이 담겨 있을 것이다.

상원이 부탁한 약들이었다.

"역시 어르신. 틀림없으시군요."

상원이 초시계를 체크했다.

36분 11초.

상원이 부탁한 시각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

"힘들었다네."

태성이 상원 앞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쪼그려 앉은 상원이 심지혈탕에 새끼손가락을 쿡 찍었다.

상원이 새끼손가락에 묻은 미지근한 탕약을 먹어보았다.

"윽!"

상원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혀끝부터 위까지 모조리 태워버릴 것 같은 엄청난 매운맛이었다.

"엄청나지? 이런 걸 탕약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만, 여하튼 효과는 확실해. 내 보장하지."

태성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가시죠."

쟁반을 들고 일어선 상원이 성화 쪽을 바라보았다.

서울역의 수험자들이 이계로 가는 수험자들을 배웅하기 위해 차원문에 모인 지금, 성화 곁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검은 숲의 목자>의 화신 송혜경, 그리고 상원이 두 번째 별을 얻는 데 키 플레이어 역할을 할 그의 남편 한창훈이었다.

* * *

"크르르르릉!"

혜경이 상원을 향해 울부짖었다.

흰자위가 탁한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팔에 털이 부숭부숭했다.

"불신자! 그거 치워!"

검은 숲의 목자는 아는 것이다.

지금 상원이 들고 온 탕약의 정체가 무엇인지.

상원이 태성에게 부탁해서 만든 탕약 심지혈탕은 <검은 숲의 목자>와 상극인 승천자 <화산정의 혐오체>의 체액을 흉내 낸 것이었다.

화신에게 탕약을 먹이면 <검은 숲의 목자>는 한동안 화신을 잠식하지 못한다.

"흥."

상원이 콧방귀를 뀌며 쟁반을 바닥에 놓았다.

"너!"

검은 손톱을 뽑아낸 혜경이 상원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두 손을 땅바닥에 대고 쭈그려 앉아 으르렁대는 모습이 영락없는 맹수였다.

상원 옆에 있던 태성이 그 기세에 질려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상원은 당황하지 않았다.

혜경에게 탕약을 먹일 방법이 있었으니까.

"창훈씨. 여기 이 약, 혜경 씨에게 주시겠어요?"

"아, 네."

창훈이 두 손으로 탕약을 집으려 했다.

하지만 탕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금 <심지혈탕>이 든 냄비는 능력치를 찍지 못한데다가 씨앗에 잠식당해 몸이 약해진 창훈이 들어 올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어... 어? 이게 왜...."

창훈이 한참 낑낑댔다.

태성이 창훈을 도와주려 하는 걸 상원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에이, 여보. 남자가 그렇게 힘이 약해서 어디 쓰냐?"

어느새 창훈 곁에 쪼그려 앉은 혜경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밝은 어조와 달리 목소리는 잔뜩 갈라졌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코에서 찐득한 피가 흘렀다.

탕약을 거부하는 수호신과 탕약을 마시려는 화신이 싸우는 여파였다.

"이런 거 한숨이면 마시지."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은 혜경이 단숨에 냄비를 뽑아 올려 꿀꺽 꿀꺽 마셨다.

그녀를 바라보는 창훈과 태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빈 냄비가 땡그렁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꺄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아악!"

탕약을 비운 혜경이 서울역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몇몇 수험자들이 오금이 풀려 주저앉아 버릴 정도로 커다랗고 섬뜩한 비명이었다.

혜경의 몸속에 깃들었던 <검은 숲의 목자>가 뜯겨져 나가는 중이었다.

"이제 됐습니다, 빨리."

상원이 창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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