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하늘과 땅의 주술사 (2)
[7번 시험 후란의 <델타 루트>를 시작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메시지였다.
"감마 루트 클리어 보상은? 어떻게 되는 건데?"
"젠장...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영웅들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분명히 감마 루트를 깼는데, 다음 루트가 이어진다니.
그들의 수호신은 그런 얘기를 일언반구 꺼낸 적도 없을 것이다.
'그건 당신들의 수호신도 몰랐을 거야.'
상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영령 - 신령 - 주신으로 나뉘는 승천자들의 격.
그 격에 따라 달라지는 것들 중 하나가 시험에 관한 정보의 양과 질이다.
대부분의 승천자들은 7번 시험 감마 루트의 존재까지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 중 감마 루트를 클리어할 자신이 있는 자들이 명성을 찾아 여기에 모인다.
그게 지금 중앙섬에 있는 영웅들이다.
반면 감마 루트를 클리어할 자신이 있어도 찾아오지 않는 자들도 있다.
예컨대 상원이 베타 루트에서 만났던 <스칼렛 이베르손> 같은 주신급들.
그들은 아는 것이다.
애초에 감마 루트 클리어 같은 건 없다는 걸.
부서진 광야의 대주술사, 4급 상위종 <뮈노 메드냅>을 빈사 상태로 만들면 감마 루트는 '종료'된다.
그러면 7번 시험은 <델타 루트>로 자동 전환된다.
번쩍!
섬광이 중앙섬을 삼켰다.
영웅들은 넋을 놓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먹구름 속에서 번개가 미친 듯 춤추고 있었다.
콰르르르릉!
천둥이 울렸다.
"으악!"
"끄으으으윽!"
그 소리에 영웅들이 귀를 막으며 주저앉았다.
고작 천둥소리라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하늘을 찢는 것 같은 소리였다.
쉬이이이익!
중앙섬 주변의 계곡으로부터 수증기가 솟구쳤다.
바닷물이 증발하고 있었다.
퍽!
계곡에서 초고층 빌딩만 한 용암 기둥이 솟구쳤다.
하늘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굵은 벼락들이 지상에 내리꽂혔다.
붉고 푸른 기둥들이 중앙섬 주변을 뒤덮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자연의 힘이었다.
"으... 으으으...."
<바다에 둘러싸인 방패>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에헤...."
<빛나는 땅의 수호자>가 오줌을 지리며 멍청한 소리를 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자도 있었고 거품을 물고 경련하는 자도 있었다.
단지 그 힘의 일부를 보여준 것만으로도 심지 굳은 영웅들이 정신 줄을 놓아버렸다.
"이... 이런 씨발...."
황선우가 양손에 기를 모았다.
"어... 어? 뭐야?"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 번을 더 시도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연료를 다 써버린 라이터처럼.
"수호신이 당신을 버린 거요."
상원이 덤덤하게 말했다.
"뭐...?"
"적벽의 대도독이 도망간 거라고."
상원의 말대로였다.
적벽의 대도독 뿐만이 아니다.
<바다에 둘러싸인 방패>도 <빛나는 땅의 수호자>도 <칠천 섬의 정벌자>도 지금 여기에 없다.
수호신이 떠난 곳, 지금 여기에 남겨진 자들은 더이상 대영웅의 화신이 아니다.
그저 살과 피로 이루어진 연약한 인간일 뿐.
"대도독이... 나를... 버렸어?"
상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들어 중앙섬의 가운데를 가리켰다.
"저자 때문이지."
<요새 수호자의 시선>이 일으킨 짙은 연기가 걷히고 있었다.
그러면서 중앙섬 가운데 있는 자의 신형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서진 광야의 대주술사 <뮈노 메드냅>이 1미터 남짓 공중부양한 채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우반신의 번개 문신은 하늘을 수놓는 벼락과 같은 짙은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좌반신의 지진 문신은 땅에서 솟구치는 용암과 같은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주술사가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푸른색으로 물든 오른쪽 눈에서 뇌전이, 붉은색으로 물든 왼쪽 눈에서 열기가 솟구쳤다.
새하늘교의 경전 승천계시록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그는 짐승의 종이나니, 창공의 짐승과 대해의 짐승으로부터 새하늘을 모독할 권능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그에게 대적하리요.]
그렇다, 누가 능히 그에게 대적하겠는가.
승천 시험을 떠받치는 다섯 마신 중 하나, 부서진 광야의 주인이자 모든 정령들의 왕.
<태초의 대족장>이 선선한 눈으로 수험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존재만으로도 대기와 지각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으아아아악!"
"끄어어어억!"
수험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끄... 끄으으윽...."
바닥에 무릎을 꿇은 황선우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수백 명의 수험자들이 절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단 하나, 상원만이 두 눈을 똑바로 들고 태초의 대족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아아.
상원의 머릿속에서 범종 같은 굉음이 들렸다.
태초의 대족장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미끄러지듯 상원에게 다가왔다.
"으... 끄어어어... 어어억...."
황선우가 대족장의 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절명했다.
델타 루트는 모든 영웅들의 무덤이다.
"으... 으으윽...."
엄청난 압력에 상원이 무릎을 꿇었다.
'이 중압감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군.'
그때였다.
낯선 시스템 메세지가 떴다.
[강신 회로가 작동을 시작합니다.]
[신을 입력합니다. 대상: <태초의 대족장>]
상원의 양팔이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팔등이 용의 비늘 모양으로 쪼개지면서 새까만 패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7번 시험에 들어오기 전 <기계장치의 신>이 활성화해주었던 새로운 기능, <강신 회로>.
기계장치의 신이 설명해주지는 않았지만, 상원은 이 기능을 어떻게 쓰는 건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왜 기계장치의 신이 7번 시험에 들어가기 전에 꼭 레벨5를 찍고 오라고 했는지도 깨달았다.
기계장치의 신의 말마따나, 첫 번째 별은 강신 회로 없이는 얻을 수 없었다.
왼팔의 패널이 파란색으로, 오른팔의 패널이 빨간색으로 물들었다.
엄청난 전류가 들어온 왼팔이 부들부들 떨렸고, 오른팔은 열기에 녹아버릴 것 같았다.
양팔을 타고 올라온 두 기운이 상원의 머릿속에서 맹렬하게 휘몰아쳤다.
강신 회로가 태초의 대족장의 힘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상원의 코에서 코피가 뚝뚝 떨어졌다.
"으... 으으윽...."
버텨야 했다.
강신회로가 대족장의 힘을 완전히 받아들일 때까지.
- 자네로군.
상원의 앞에 선 태초의 대족장이 말했다.
"끄... 으으윽...."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상원이 이를 갈았다.
[경고. 의체의 손상이 심각합니다.]
시스템 메세지와 함께 경고음이 들렸다.
완전히 무릎을 꿇은 상원이 태초의 대족장을 올려다보았다.
요동치는 하늘과 솟구치는 땅 사이에서, 태초의 대족장이 상원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의 코에서 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상원은 대량의 피를 토했다.
의체 <신화의 몸>의 내구력은 일반적인 수험자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족장의 중압감은 버텨낼 수가 없었다.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상원은 익숙한 기분을 느꼈다.
죽음이 그에게 찾아왔다.
[승천 게임에서 탈락하였습니다.]
회귀 전 50번째 시험에서 탈락한 이후 두 번째로 보는 메세지였다.
뒤이어 시스템 메세지가 떴다.
[강신 회로에 <태초의 대족장>을 입력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상원의 왼쪽 가슴이 세로로 쪼개졌다.
그리고 철컥 소리를 내며 신기 <황금시대의 모래시계>가 작동했다.
상원의 몸에서 뿜어져 내온 기운이 맹렬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황금시대의 모래시계>를 작동합니다. 회귀 시간: 22분 30초]
벼락과 용암 기둥이, 쓰러진 수험자들이, 그리고 태초의 대족장의 황금빛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 허... 허허....
흩어지는 모래 속에서 대족장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행운을 비네.
철컥
빈 모래시계가 뒤집어졌다.
* * *
"아저씨? 아저씨?"
높고 새된 목소리, 박정수였다.
상원은 눈을 떴다.
수백의 수험자들과 마물들이 황량한 사막 위에서 싸우고 있었다.
화르르륵!
거대한 불꽃이 마물들을 집어삼켰다.
"장강을 태운 불꽃을 맛보아라!"
황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원이 있는 곳은 그 전장의 한가운데였다.
베타 루트였다.
22분 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뭐에요 갑자기? 빈혈이에요?"
박정수가 상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니, 아니야. 괜찮다."
상원은 몸을 일으키고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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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체 관리 시스템]
접근이 허가된 정보들만 표시됩니다.
레벨 5 (37%)
성능: 괴력 70, 용력 70, 술력 70
스킬: 요새 수호자의 시선(3), 하늘의 불씨(2), 지하의 문(2) [더보기]
모래시계 충전 시간: 0초
강신회로: 태초의 대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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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의 충전 시간을 모두 썼다.
모래시계의 힘으로 회귀한 것이다.
그리고 강신회로가 받아들인 신의 목록에 태초의 대족장이 올라 있었다.
이 정도면 첫 번째 별을 얻을 수 있다.
전장의 저쪽에서 스칼렛 이베르손이 흥미로워하는 눈으로 상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그만."
스칼렛이 문어 다리를 쥔 상원을 만류했다.
"거기 가면 죽어요."
그녀의 말에 상원이 씩 웃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별들의 지휘관> 스칼렛 이베르손.
주신 <천정의 재판관>의 화신이자, 세브로 랭킹 2위까지 올랐던 실력자.
그녀를 포섭할 것이다.
눈앞에 있는 이 강철같은 법률가는 보지 않은 건 믿지 않는다.
그녀에게 상원을 각인시키는 방법은 하나다.
직접 보여주는 것.
상원이 그녀에게 문어 다리를 내밀었다.
"이건...?"
그녀의 말에 상원이 대답했다.
"따라오시죠. 당신이 나와 우호 관계를 맺어야 하는 이유, 그 증거를 보여드릴 테니."
상원의 말에 스칼렛의 눈이 커졌다.
꿀꺽, 그녀가 침을 삼켰다.
"무슨 자신감이죠?"
"보면 알게 될 겁니다."
스칼렛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에 난데없이 별들이 일렁였다.
천정의 재판관은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상원은 알고 있다.
스칼렛 이베르손은 그녀의 수호신을 설득하는 데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는 걸.
잠시 후 하늘에서 별들이 사라졌다.
"좋습니다."
스칼렛은 상원이 내민 문어 다리를 거절했다.
대신 자기 서류 가방에서 문어 다리를 꺼냈다.
전에는 자기가 먹는 대신 황선우에게 먹였을 문어 다리였다.
"믿어보죠."
으적
스칼렛이 문어 다리를 씹었다.
곧 그녀의 코에서 까만색 연기가 뭉게 뭉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짙어진 연기가 상아색 불꽃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스칼렛 이베르손이 홀린 듯 불꽃 속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나도 갈래요."
박정수였다.
상원은 씩 웃으며 박정수를 밀어냈다.
"안돼."
"왜요?"
"넌 오면 죽어. 내가 너까지 살릴 순 없어."
서늘한 대답에 박정수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러났다.
"대신에 말이야. 아까 나랑 같이 있던 까만 옷 입은 아저씨 있지? 이따가 그 아저씨가 여기로 오면 내가 이 불꽃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라."
박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볼까."
상원이 문어 다리를 씹었다.
첫 번째 별이 눈앞에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