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62화 (62/230)

제62화. 후란 (5)

차원문을 넘어 베타 루트에 진입한 상원과 정수를 맞은 건 눈조차 제대로 뜨기 어려울 정도로 세찬 모래바람이었다.

짙은 모래바람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굵은 알갱이가 세차게 뺨을 때렸다.

"쿠윽... 쿨럭 쿨럭."

박정수가 기침을 했다.

한동안 불던 모래바람이 차차 걷혔다.

그러면서 두 남자가 서 있는 땅, <베타 루트>의 풍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끝없이 뻗은 새파란 하늘 가운데 두 개의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태양 두 개가 내뿜는 건조한 햇살이 갈라진 대지에 꽂혔다.

"어... 어? 여기는?"

박정수가 하늘을 보고 멍청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반응을 보아하니 5번 시험 때 부서진 광야의 모방 던전으로는 가지 않은 것 같았다.

갔다면 이렇게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모방 던전이 정확히 이렇게 생겼으니까.

"꾸르르르륵."

"그르르르릉."

야수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풀 한 포기 돋지 않은 황량한 들판의 저쪽에, 엄청난 수의 야수들이 지평선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잔나비와 들범들은 수백 마리는 되어 보였고 성성이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거기다 그 무리의 선두에 서 있는 거대한 괴물은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생김새가 꼭 털 빠진 고릴라 같았는데 키가 5미터는 넘어 보였고 온몸이 바위 같은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4급 마물 <금강역사>였다.

"뭐... 뭐야 이거?"

박정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안하무인에 겁대가리 없는 박정수라도 이 정도 규모의 마물들 앞에선 겁을 먹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부서진 광야에서 야수 군대와 싸우는 것, 이게 7번 시험의 <베타 루트>다.

급상승한 난이도에 대해 기관에 불만을 제기할 껀덕지도 없다.

여기 오는 건 순전히 수험자들의 선택이니까.

바꿔 말하면 저 괴물들을 상대할 자신이 있는 수험자들만 여기 온다는 뜻이기도 하다.

"설마 저것들이랑 싸워야 되는 건 아니죠?"

정수의 말에 상원이 피식 웃었다.

"겁나나? SSS급 액스마스터."

"거... 겁은 무슨...."

도끼를 뽑아 든 박정수의 기세는 제법 호기로웠다.

하지만 두 다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겁먹지 마라. 우리 둘만 싸우는 건 아니니까."

"예?"

정수가 대답하는 순간 퉁 퉁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차원문이 열리며 수많은 수험자들이 나타났다.

"이게 무슨...?"

"야수 진지가 전쟁기념관에만 있는 건 아니지."

상원의 대답대로였다.

지금 차원문을 넘어오는 수험자들은 각자 <성성이 우두머리>를 물리치고 베타 루트를 깨기 위해 넘어오는 사람들이었다.

그 말은 하나하나의 전투력이 적어도 박정수 정도는 된다는 뜻이었다.

지금 여기 모이는 수험자들은 적어도 한반도에서는 최상위라 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상원은 그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소총과 장검으로 무장한 청년은 <성준우>.

화려한 색동옷 차림에 커다란 칼을 든 여인은 <김상희>.

그리고 그들 사이에 보이는, 등산복을 입은 조그만 노인.

<서울 육마귀> 중 최강자.

'강상중...!'

상원은 자기도 모르게 으드득 이빨을 갈았다.

강상중은 허어 하는 소리를 내며 상대방 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에도 관심 없는 노인처럼 보이지만 저 속에는 능구렁이가 수백 마리 가득 차 있다는 걸 상원은 모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이건 또 뭐야."

상원이 강상중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또 하나의 포탈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두 사람이었다.

파란 츄리닝 차림의 남자, 그리고 남색 정장을 차려입은 백인 여자.

여자는 상원이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이 여기에 있었어...?'

회귀 전에도 베타 루트에 와보진 않았다.

그때 상원의 역할은 서울역을 지키는 것이었으니까.

"적의 수가... 상당하군."

차가운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는 여자, 그녀의 이름은 <스칼렛 이베르손>.

세브로 랭킹 2위였던 여자다.

그녀가 한반도에서 시작했으리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상당하긴 개뿔. 우리 이쁜이는 이게 문제야. 너무 재."

남자가 손끝에 나타난 불로 담뱃불을 붙였다.

후우

새까만 연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야!"

남자가 대오의 선두에 나서며 외쳤다.

그 어마어마한 성량만으로도 상원은 알 수 있었다.

상원을 제외하면 저 남자가 여기 있는 모두 중 가장 강할 것이다.

"나는 <적벽의 대도독> 황선우!"

그 외침에 수험자들의 시선이 남자에게 박혔다.

"뭐야 갑자기."

"관심병잔가?"

수험자들이 수근수근댔다.

'아아.'

상원이 탄식했다.

황선우라는 저 남자는 지금 자아가 그 수호신 <적벽의 대도독>과 섞여버렸다.

승천자들이 시험을 무리해서 진행하려고 할 때 간혹 나타나는 현상이다.

승천자의 격은 영령 - 신령 - 주신으로 나뉘며 그 격에 따라 대우도 달라진다.

아무리 강한, 설령 웬만한 신령을 넘어설 만큼 강한 영웅들이라 해도 신령급의 대우는 받지 못한다.

그런 영령들은 항상 자신의 명성을 날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시험 중에 얻은 명성이 클수록 시험이 끝나고 더 높은 격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 저 남자를 지배하는 <적벽의 대도독>도 그런 영령들 중 하나였다.

저자는 지금 화신의 안위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고 무작정 앞으로 달려드는 불나방이었다.

"장강을 삼킨 불꽃을 맛보아라!"

남자의 외침과 함께 땅바닥에서 엄청난 불꽃이 솟구쳤다.

지금 이곳은 <부서진 광야>의 변방, 승천자들이 자기 힘을 보내줄 수 있다.

적벽의 대도독이 보내온 불꽃이 마물들을 집어삼켰다.

상원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저 정도면 능력치 70은 될 것이다.

실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오... 오오오오!"

"와아아아아!"

수험자 하나가 마물들을 학살하는 모습은 다른 수험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충분했다.

수험자들이 함성을 지르며 마물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베타 루트에서의 전쟁은 수험자 측의 승리로 끝났다.

수험자 측의 손실은 상당했지만 상원이 익히 아는 얼굴들은 살아남아 전리품을 챙기고 있었다.

스칼렛 이베르손, 강상중, 박정수, 그리고 적벽의 대도독 황선우.

황선우는 숯덩이가 되어버린 금강역사의 시체 위에서 헐떡이고 있었다.

베타 루트의 전투에서 황선우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수백 마리 하급 마물들을 홀로 쓸어버린 것은 물론, 4급 마물 금강역사에게도 유효타를 입혔다.

"와 대박."

박정수가 입을 헤 벌리고 말했다.

"아저씨 진짜 쎄네요."

"꺼져."

"네?"

"귀찮으니까 꺼져. 아니면 너도 숯덩이가 되고 싶나?"

황선우가 박정수의 멱살을 잡자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박정수의 옷깃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으... 으으으!"

박정수가 순식간에 울상이 되었다.

그때 누군가 황선우의 손을 쳐 박정수를 떨어뜨렸다.

"적당히 하지."

스칼렛이었다.

"어이구, 우리 이쁜이."

황선우가 스칼렛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베실 베실 웃었다.

그 광경을 보며 상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적벽의 대도독은 저런 쓰레기가 아니다.

그런데도 저런 행동을 한다는 건 화신인 황선우의 인격이 어지간한 쓰레기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화신 잘 만나는 것도 운이지. 어쩌겠어.'

상원이 한숨을 푹 쉬고는 <20층의 흑마술 양초>와 <성성이의 털뭉치> 그리고 <어미 문어의 다리>를 꺼냈다.

이제 일곱 별의 왕관을 이루는 첫 번째 별이 있는 곳, 7번 시험의 델타 루트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상원이 커다란 양초에 손을 대자 양초가 보라색 불꽃을 내뿜으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거기에 성성이의 털뭉치를 던져 넣자 불꽃의 색깔이 상아색으로 바뀌었다.

짐승의 털뭉치를 태우는 매캐한 냄새가 황무지에 퍼졌다.

"저 사람 뭐 하는 거지?"

"으윽... 냄새."

수험자들이 웅성웅성했다.

그들은 상원이 무엇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황선우가 말을 걸었다.

"오, 너."

상원이 고개를 돌려 황선우를 보았다.

황선우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껄렁껄렁한 자세로 상원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걸 들고 있다니. 너, 수호신이 누구냐?"

적벽의 대도독 정도 되면 베타 루트에서 감마 루트를 넘어가는 방법 정도는 알 것이다.

"굳이 알려줄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상원의 대답에 황선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너 이 건방진 새끼."

황선우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덩치 믿고 까부나 본데. 그러다가 나한테 통구이 된 놈이 한둘이 아니야."

그의 손에서 시뻘건 불꽃이 넘실거렸다.

그때 상원이 어미 문어의 다리 한쪽을 찢어서 황선우에게 내밀었다.

"자."

상원의 행동에 황선우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래, 그래야지. 새끼 생긴 건 고릴라 같이 생겨가지고 눈치는 빠르네."

협박이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황선우가 씩 웃으며 문어 다리를 씹었다.

"7번 시험, 후란의 감마 루트. 적벽의 대도독께서 감마 루트까지 정리해주지."

황선우의 코에서 까만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짙어진 연기가 상아색 불꽃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황선우가 홀린 듯 불꽃 속으로 걸어갔다.

<감마 루트>로 넘어간 것이다.

상아색 불꽃을 보면서 상원은 피식 웃었다.

저기로 넘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적벽의 대도독은 알 리가 없었다.

상원이 나머지 문어 다리를 집어 들었다.

그때였다.

"그만."

이번에도 스칼렛이었다.

"거기 가면 죽어요."

감마 루트에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녀는 알고 있다.

아까 황선우가 말하는 걸 보아하니 황선우는 어미 문어의 다리를 구하지 못한 것 같았다.

회귀 전 7번 시험에서 황선우에게 다리를 준 건 스칼렛일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황선우라는 골칫덩어리를 치워버린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상원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스칼렛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스칼렛 이베르손은 상원이 아는 가장 똑똑한 수험자들 중 하나였다.

베타 루트에서의 전투를 하는 동안 스칼렛은 줄곧 상원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는 알았을 것이다.

상원이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걸.

불나방처럼 날뛰는 황선우보다 상원이 훨씬 강하다는 걸.

그렇다면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 정도로 강한 수험자의 수호신이 감마 루트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았을 리 없는데 왜 거기로 가려고 하는지.

"나중에 알게 될 겁니다."

살짝 웃으며 대답한 상원이 문어 다리를 씹었다.

곧 상원의 코에서도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났다.

7번 시험의 감마 루트가 상원을 부르고 있었다.

우우우우우-

상원의 귓가에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하울링 같기도 한 소리가 몰아쳤다.

눈앞의 풍경이 탁해졌다.

그 속에서 오히려 상아색 불꽃은 더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벅 저벅

상원이 천천히 불꽃을 향해 나아갔다.

"짧은 시간이지만 즐거웠어요."

스칼렛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피식

상원은 작은 웃음을 흘리고 상아색 불꽃 속으로 발을 들였다.

곧 무지막지한 중압감이 상원의 온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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