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후란 (3)
[일곱 번째 시험 <후란(猴亂)>을 시작합니다.]
[부서진 들판의 야수들이 성역을 공격합니다. 야수들로부터 성역을 지켜야 합니다.]
[야수의 진지에 성역을 상징하는 토템이 있습니다. 공격은 토템을 부수기 전까지 계속됩니다.]
[토템을 부수면 시험이 끝납니다.]
7번 시험, 후란이 시작되었다.
승천 시험의 줄기를 이루는 50개의 중심 시험들은 비중이 서로 다르다.
비교적 간단한 시험도 있는 반면 수많은 수험자들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규모가 크고 어려운 시험도 있었다.
7번 시험이 그런 시험이었다.
마신 <태초의 대족장>이 지배하는 부서진 광야의 야수들이 성역을 침공하는 7번 시험은, 상원에게도 의미가 각별했다.
바로 이 시험에 일곱 별의 왕관을 이루는 첫 번째 시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꺼르르르릉!"
"그르르릉!"
"꾸아아아악!"
대오의 선두에 선 덩치 큰 성성이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자 뒤를 따르는 들범들과 잔나비들이 후창했다.
성역 하나당 3급 마물 성성이가 하나씩이었다.
몇 달 동안 수험자들이 아무리 성장했다 해도 3급 마물은 무리였다.
거기에 들범들과 잔나비들이 성성이를 따른다.
웬만한 성역이라면 존폐를 걸어야 하는 규모였다.
하지만 상원은 걱정하지 않았다.
최상급 성령 <낙원의 수문장>의 화신 윤진아와 괴물 <검은 숲의 목자>의 화신 송혜경, 그리고 안정적으로 성장한 수많은 수험자들이 성역을 지키고 있다.
거기다 천재적인 전략가 <해안선의 귀신>의 화신 백문혁이 전장을 지휘하고, 차원의 정수 다섯 개를 모두 갖춘 만신전의 불꽃이 수험자들을 받쳐준다.
지금 성역 <서울역>의 전력은 9~10번 시험을 손실 없이 치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서울역을 그 수준에 올려놓은 건 대부분 상원의 공이었고.
문제는 눈앞에 있는 전쟁기념관이었다.
"꾸아아아악!"
"꺼르르르릉!"
광장에서 바글거리는 야수들의 포효가 들렸다.
저 광경을 보면서 과연 그 누가 한때는 그곳이 성역이었음을 짐작하겠는가.
수많은 야수들이 지키는 곳, 저기가 7번 시험의 토템이 있는 야수의 진지였다.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택할 7번 시험의 전략은 다수의 수험자가 성역을 지키고 별동대를 움직여 토템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상원과 만웅은 성역 서울역의 별동대였다.
"젠장... 그러니까, 저기를 들어가야 된다고요?"
"그래."
상원의 말에 만웅이 침을 꿀꺽 삼켰다.
토템을 제거하는 건 상원 혼자로도 충분했다.
오히려 상원 혼자 움직이는 게 더 편했다.
하지만 상원이 만웅을 데려온 건 첫 번째 별을 얻기 위해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고, 그 일을 하는데 만웅이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넌 지금 충분히 강하니까."
상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 만웅의 능력치가 총합 40을 넘겼을 것이다.
7번 시험에서 그 정도면 아주 준수한 편이었다.
2급 마물과도 비벼볼 수 있고, 상원이 진지를 돌파하는 동안 제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다.
"만웅아. 나서서 뭐 하려고 하지 마라. 내 뒤를 따라오면서 몸 지키고. 그리고 이따가 내가 차원문으로 들어가면 내가 얘기한 대로 하면 된다. 알겠지?"
만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에이 씨."
몸을 돌려 내려가는 상원을 만웅이 바삐 따랐다.
* * *
군부대의 높은 담벼락 너머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크르르릉!"
담벼락 건너편에서 야수들이 짖는 소리가 들렸다.
가볍게 몸을 날려 담벼락을 넘은 상원은 담벼락과 건물 사이의 사각지대로 몸을 숨겼다.
그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상원은 그림자 안에 몸을 숨기고 군부대 안의 모습을 살폈다.
처참했다.
땅바닥에는 백골이 가득 널려 있었고 온 사방에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모두 죽은 사람들의 흔적이었다.
"끔찍하네 아주...."
상원을 따라 담을 넘어온 만웅이 말했다.
"목표는 토템, 그리고 차원문이다. 쓸데없는 충돌은 일으킬 필요가 없어."
나직한 상원의 말에 만웅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꾸으으으윽!"
"그르르르릉."
상원과 만웅이 몸을 숨긴 건물 근처로 잔나비와 들범 무리가 으르렁거리며 지나갔다.
들범 한 마리와 잔나비 네다섯 마리가 한 조를 이루고 있었다.
킁킁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양새가 마치 순찰을 하는 것 같았다.
"가자."
상원과 만웅은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몸을 숨기며 전쟁기념관을 향해 나아갔다.
중간에 몇 번은 들킬 뻔했고, 실제로 두 번은 마물과 맞닥뜨렸다.
그때마다 상원은 조용하고 신속하게 마물들을 해치웠다.
마물들이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그런 상원을 보면서 만웅은 또다시 아득한 격차를 느꼈다.
아무리 1급이라 해도 그렇게 소리 없이 순식간에 해치워버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본인은 알고 있었다..
더구나 2급 마물은 일대일로는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그런데 2급 마물 하나와 1급 마물 다섯을 순식간에 절명시켜버린 것이다.
"어우... 형님.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강해지는 거유?"
"코인과 신앙을 열심히 모아라. 그러면 돼."
간단한 상원의 대답에 만웅이 피 하는 소리를 냈다.
"진담이다. 자, 일단 토템부터 깨러 가자."
상원은 만웅을 다독이고 길을 재촉했다.
첫 번째 별을 얻기 위해선 서둘러야 했다.
그렇게 얼마간 나아가자 전쟁기념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우 씨... 힘드네 이거."
만웅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꾸아악! 꾸아아아악!"
"크르르르릉!"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비교적 차분했던 야수들이 미친 듯 날뛰고 있었다.
야수들이 괴성을 지르며 어딘가로 몰려갔다.
기념관 본관 쪽이었다.
쾅!
야수들이 몰려간 기념관 본관 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형님... 이게 무슨 일이우?"
"음."
상원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잔나비들은 동료 의식이 강한 마물이다.
순찰 돌던 놈들까지 기념관으로 몰려간다는 건 필시 그쪽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이었다.
7번 시험에서 이런 소란을 일으킬 변수는 하나뿐이다.
진지에 쳐들어온 수험자들과 전면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어떤 간 큰 수험자가 수백 마리 야수들과 전면전을 벌인단 말인가?
순간 상원의 머릿속을 스치는 얼굴이 있었다.
'아... 그놈이 이 근처 이태원에서 시작했다고 했었지.'
<육마귀> 중의 하나, 박정수였다.
* * *
상원과 만웅은 건물 한편에 몸을 감추고 본관 앞 광장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수험자 몇 명이 수백 마리 잔나비들과 싸우고 있었다.
누가 봐도 싸움이 성립하지 않는 숫자였지만, 오히려 수험자들이 잔나비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아니, 그건 싸움이라기보다는 학살에 가까웠다.
수험자들 하나하나의 무용이 상당했다.
만웅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이 시점에서 최상급으로 분류되기엔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 중 선두에 선 수험자의 무용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고작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년은 자기 몸보다도 훨씬 커 보이는 도끼를 회초리마냥 휘두르고 있었다.
강력한 영령 <부월을 쥔 왕시해자>를 수호신으로 삼은 광전사, 그가 바로 박정수였다.
육마귀 중 하나인 박정수와 그 수하들은 성역 <이태원>의 수험자들이었다.
쩍!
거대한 도끼날이 잔나비의 몸뚱이를 쪼갰다.
"흥. 별것도 아닌 것들이."
박정수가 피식 웃으며 도끼를 허공에 휘둘렀다.
그러자 쫙 하는 소리를 내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끄으으으윽!"
"끄르르르릉....!"
정수가 다가가자 기세에 눌린 잔나비들이 낑낑대며 물러났다.
도저히 중학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패기였다.
"와... 대단한데? 일단 나보다는 세겠어."
만웅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 강한 마물들을 이렇게 쉽게.... 주군, 대단합니다."
"엄청난 패기에요. 몸이 짜릿짜릿해."
"으... 소, 소름이...."
박정수의 뒤에 있던 수험자들이 한마디씩 했다.
연극을 하는 듯 과장된 말투였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지만 박정수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저게 박정수의 정체성 중 하나였다.
관심을 갈구하던 소년이 무시무시한 힘을 손에 넣었으니, 주변에 띄워주는 사람들이 필요한 건 당연했다.
"어우, 저게 뭔짓이야? 주군? 왕 놀이라도 하나. 그러고 보니 저 양반들 옷도 다 깔맞춤한 것 같은데."
그 소리를 들으며 만웅이 한마디 했다.
상원은 '너네 식구들도 까만색 깔맞춤 아니냐'는 말을 삼켰다.
"크으으흐흐흐하하하하! 킹슬레이어의 그레이트 액스가 피를 갈구한다!"
변성기가 채 지나지 않은 소년이 쉰 소리를 지르며 마물떼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쨌든 박정수는 강했다.
본관 앞을 가로막은 잔나비떼가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어우, 저 꼬맹이 개념은 없는 게 그래도 쎄기는 쎄네."
만웅의 말은 사실이었다.
마물로 들끓던 전쟁기념관 앞마당이 깨끗이 쓸려나가고 있었다.
이태원의 수험자들은 어느새 본관 정문에 다다라 있었다.
흉흉한 기세에 짓눌린 잔나비들은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다.
"우리도 가자. 저기에 토템이 있다."
상원의 말에 만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자는 본관을 향해 피로 물든 광장을 내달렸다.
그 사이 이태원 수험자들은 본관 안으로 사라졌다.
스릉
만웅이 빼어 든 칼에서 살벌한 귀기가 흘렀다.
만웅의 수호신 <자칭 협객>의 권능 <귀기를 담은 연장>이었다.
"잠깐."
나이프를 뽑아 든 만웅이 본관 안으로 뛰어들려는 걸 상원이 제지했다.
쾅!
"으아아아악!"
본관 안에서 굉음과 함께 비명이 들렸다.
그 소리에 만웅이 꿀꺽 침을 삼켰다.
"지금!"
타이밍을 재던 상원이 브라이싱크론 지갑에서 주지사의 샷건을 뽑아 들고 본관 안으로 뛰어들었다.
* * *
본관에 들어서자 3층까지 이어진 거대한 홀이 나타났다.
홀 저편에 부서진 목재와 돌덩이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2층 높이를 넘어가는 토템들이 늘어서 있었다.
서울역을 비롯해 야수들의 공격 목표가 된 성역을 상징하는 토템이었다.
토템들의 꼭대기 부분에서 갈색 불꽃이 타올랐는데, 몇몇 토템들은 불이 꺼져 있었다.
야수들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벌써 성역의 불꽃이 꺼져버렸다는 의미였다.
"크아아아악!"
"꾸아아아악!"
그 홀 가운데서 이태원의 수험자들이 마물들과 싸우고 있었다.
"크하하하! 더! 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박정수가 미친 듯 웃었다.
본관을 지키고 있던 잔나비와 들범들은 박정수의 도끼날에 갈려 나갔다.
"젠장, 형님. 같이...."
그때였다.
"꺼르르르르릉!"
먼저 뛰어든 상원의 뒤로 만웅이 들어서자마자 둔중한 포효가 들렸다.
그 기세에 순간 박정수마저 도끼질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았다.
홀의 반대편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르르르릉!"
전체적인 생김새는 성성이와 같았지만 털은 은빛이었고 입 주위로 거대한 엄니가 삐져나와 있었다.
토템을 지키는 수문장, 3급 마물 성성이의 상위 종 <성성이 우두머리>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