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후란 (2)
서울역 안의 작은 사무실,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강수와 명희, 그리고 문혁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그래요?"
강수의 말에 대답하는 문혁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그렇다니까. 진짜 수백 마리는 돼 보였어."
"문혁씨도 알잖수. 이 사람이 눈썰미 하나는 기가 막혀요."
강수가 침을 튀기며 말했고 명희가 그걸 거들었다.
그들은 사냥 나갔다가 본 잔나비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문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돌아 커다란 지도에 표시를 했다.
지도는 서울역을 중심으로 반경 2km를 표시해둔 것이었는데, 광화문역이나 충정로 같은 주요 지점들이 크게 표시되어 있었다.
성역 <서울역>을 지휘하는 문혁의 전술 지도였다.
"그러니까 이 근처란 말씀이시죠?"
문혁이 서울역 남쪽, 숙대입구역 근처에 빨간 마커로 표시를 했다.
"어 맞아. 거기서 왼쪽, 왼쪽으로 이동한 것 같아."
문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숙대입구역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화살표를 쳤다.
문혁의 시선이 다른 곳에 닿았다.
서울역의 동남쪽에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가 그어져 있었다.
그 옆에는 문혁이 직접 쓴 글씨가 있었다.
잔나비, 수백 규모.
그리고 더 오른쪽에도 똑같은 화살표가 있었다.
둘 다 만웅의 부하인 준배가 얼마 전 보고한 내용이었다.
이번에 강수가 보고한 내용까지 해서 세 개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였다.
전쟁기념관.
"심상치가 않습니다."
문혁이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때였다.
쿵, 쿵.
누군가 사무실 문을 노크했는데, 그 소리가 망치로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소리만 듣고도 문 앞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세상에 세상에! 빨랑 들어와요!"
명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끼익.
문이 열리며,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의 거한이 문틀을 비집고 들어왔다.
키가 어찌나 큰지 정수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였다.
상원이었다.
"세상에, 이게 얼마만이야."
강수가 너스레를 떨며 상원의 팔을 두드렸다.
"오늘로 딱 3줍니다. 볼일은 다 보셨습니까?"
"아, 네. 모두 끝났습니다."
문혁의 말에 대답하며 상원은 지도를 보았다.
상원의 눈에도 빨간 화살표 세 개가 들어왔다.
"이제 곧이군요."
상원의 말에 세 남녀가 상원을 보았다.
"뭐가 말씀이십니까?"
"내일이면 일곱 번째 시험이 시작될 겁니다."
대답과 함께 상원은 큰 숨을 쉬었다.
드디어 내일이다.
일곱 별의 왕관을 이루는 일곱 별, 그 중 첫 번째 별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3주 동안, 상원은 성역 서울역의 지휘를 문혁에게 맡겨두고 주변의 히든 던전들을 모두 소탕하고 다녔다.
그건 3주 전 기계장치의 신과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 * *
"레벨 4야. 순조롭네."
커다란 태엽을 등에 박은 다람쥐가 말했다.
"록시의 전서구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하얘지던데, 영감님은 그 다람쥐 바꿀 생각 없어요?"
상원은 긴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기계장치의 신이 빙의한 다람쥐가 앉아 있었다.
다람쥐가 앉은 모양새가 마치 세상 다 산 노인네 같았다.
"없다 임마. 이거 눈에 띄는 걸로 바꿨다가 기관에 걸리면 뼈도 못 추려."
다람쥐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럼 그 태엽이라도 어떻게 하면 안 돼요?"
"안돼. 이 쪼그만 설치류 속에 위대한 승천자가 들어있다는 표시가 안 나잖아."
눈에 띄겠다는 거야 안 띄겠다는 거야, 라는 생각을 하며 상원은 다람쥐를 내려다보았다.
"야 임마 표정 풀어라. 너 무슨 생각 하는지 얼굴에 다 써져 있거든?"
"얼레? 이 얼굴 완전 포커페이스던데요? 무슨 로봇인 줄. 영감님은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모르겠냐? 내가 한 땀 한 땀 만든 물건인데 그걸 모르겠어?"
그 말마따나, 상원이 들어있는 의체(義體)인 신화의 몸은 승천자 기계장치의 신의 작품이었다.
표정 하나하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도 당연했다.
"그나저나 이번엔 또 웬일이래요? 선물이라도 주시려고?"
"어, 그래 선물. 선물 줘야지. 그런데 말이야."
다람쥐가 상원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너 지금 경험치가 23%네?"
"예, 그런데요?"
"7시험 전까지 5레벨 만들 수 있겠냐?"
상원이 눈썹을 찡그렸다.
"7시험 전까지면 중심 시험을 깨는 것도 아니고 남산타워 같은 고레벨 던전이 있는 것도 아닌데.... 글쎄요, 3주 동안 77%를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기계장치의 신은 의체의 레벨을 올리려면 위업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승천 시험은 수많은 시험과 던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핵심이 되는 50개의 시험을 중심 시험이라고 부른다.
당연히 중심 시험이 위업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6번 시험과 7번 시험 사이에서 위업이라 부를 만한 던전은 서울역 근처에 단 하나뿐이었다.
어미 문어가 있는 남산타워.
"잘 들어 불신자. 너는 7시험 들어가기 전에 무조건 레벨 5를 찍어야 돼."
"왜죠?"
"왜냐니. 첫 번째 별 얻어야 될 거 아냐?"
상원은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람쥐를 바라보았다.
"너... 첫 번째 별 어떻게 얻을 생각이었는데?"
"영감님 주신 모래시계로요. 거기다 <요새 수호자의 시선>도 있고요."
상원의 말에 다람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불신자 선생. 말은 된다만 확률이 너무 낮아."
상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래도 방법은 그것밖에 없죠."
"그러니까 5레벨이 돼야 된다는 거야. 내가 지금 줄 선물은 5레벨은 돼야 활성화되거든."
다람쥐가 쪼르르 상원의 팔을 타고 목 뒤로 올라왔다.
다람쥐가 조그만 앞발로 목 여기저기를 꾹꾹 누르는 게 느껴졌다.
그러자 시스템 메세지가 떴다.
[기능 <강신 회로>에 대한 접근 권한이 부여되었습니다.]
낯선 메시지에 상원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뭔가요? 강신 회로?"
"응. 끝내주는 물건이지."
"어떻게 쓰는 건데요?"
"그건 차차 알게 될 거야. 어쨌든 레벨 4인 지금은 그냥 무용지물이야. 그러니까 지금 당장 튀어 나가서, 7시험 시작되기 전까지 무조건 레벨5를 만들어 와."
다람쥐가 씩 웃었다.
* * *
3주 동안 상원은 서울의 던전이란 던전은 모조리 뒤지고 다녔다.
얼마나 숨 가쁘게 돌아다녔는지 무쇠 같은 몸에도 피로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제대로 잠도 자지 않고 3주를 돌아다닌 끝에 상원은 레벨 5를 달성할 수 있었다.
상원은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
[의체 관리 시스템]
접근이 허가된 정보들만 표시됩니다.
레벨 5 (0%)
성능: 괴력 70, 용력 70, 술력 70
스킬: 요새 수호자의 시선(3), 지하의 문(2), 하늘의 불씨(2), 마력 삼키기 [더보기]
모래시계 충전 시간: 22분 4초
강신회로: 없음
-----------
<요새 수호자의 시선>에 스킬포인트를 더 주었다.
상원이 가진 스킬 중 최강의 스킬이었다.
그런데 정작 눈길이 가는 것은 <강신회로>라는 물건이었다.
도대체 저것은 무엇이길래, 기계장치의 신은 저게 있으면 첫 번째 별을 얻을 수 있다고 얘기했을까.
'글쎄. 직접 써보면 알겠지.'
상원은 한숨을 푹 쉬었다.
"왜 그러슈 형님?"
"아니다."
만웅이 물음에 상원이 짧게 대답했다.
상원과 만웅은 서울역의 동남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웬일인지 하늘이 맑았다.
검은 밤하늘 한가운데 박힌 커다란 달이 하얗게 빛났고, 별들은 쏟아질 듯 반짝이고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밤은 특히 위험했다.
밤이 되면 마물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폐허가 된 거리는 마물이 들끓는 평소와는 달리 한산했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1급 마물들을 상대하는 건 상원과 만웅에겐 일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웬일로 이렇게 조용하대? 무섭게시리."
때로는 혼란보다 적막이 두려운 법이다.
거리를 채운 적막이 오싹한지 만웅은 두 팔을 문질렀다.
거리가 왜 이렇게 조용한지, 상원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궁금한가?"
"아 그럼... 궁금하죠. 왜 이러는거에요?"
"따라와라."
상원이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꾸악! 꾸아아악!
어두운 밤 저 멀리 불빛이 반짝였고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원과 만웅은 근처의 높은 건물을 찾아 올라갔다.
승강기가 고장 난 탓에 20층이 넘는 건물 꼭대기까지 걸어서 올라가야 했지만, 능력치를 쌓은 두 사람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상원과 만웅은 옥상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상은 너무나도 어두워서 한때는 이곳이 천만 명이 사는 도시였다는 사실이 연상되지 않을 정도였다.
하늘을 향해 뻗은 성화의 기둥들 말고는 어떤 빛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멸망한 세계의 야경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저게... 뭐유?"
만웅이 숨을 헉 들이키며 말했다.
만웅이 가리킨 곳은 전쟁기념관과 그 주변의 군부대였다.
시험이 시작된 지 몇 달, 만웅도 그간 여러 지옥도를 겪어 왔었다.
하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낮은 건물들이 모여 있는 널따란 땅에 커다란 원숭이를 닮은 1급 마물 <잔나비>들이 득시글거렸다.
1급이래도 일반인은 쉽게 죽일 수 있는 맹수들, 그 숫자가 천은 족히 넘어 보였다.
잔나비떼 사이엔 호랑이를 닮은 커다란 마물들도 끼어 있었다.
2급 마물 <들범>이었다.
숫자보다 무서운 건 그들의 태도였다.
수험자들이 익히 상대해 온 잔나비는 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야수에 가까웠다.
그런 잔나비들이 마치 도열한 군대라도 되는 양 차분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불타는 부대 건물들은 군진(軍陣)의 불꽃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잔나비와 들범들이 진을 친 연병장 가운데로 눈에 띄게 거대한 마물 하나가 나타났다.
고릴라를 닮은 모양새에 코뿔소보다 큰 덩치, 상원이 2번 시험에서 상대했던 3급 마물 <성성이>였다.
"꺼르르르릉!"
"꾸아아아악!"
"꾸아악!"
성성이가 하늘을 향해 선창하자, 수백 수천의 잔나비 떼가 성성이를 따라 미친 듯 울부짖었다.
"그르르릉!"
성성이는 그 거구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 뒤를 잔나비와 들범 떼들이 따랐다.
누가 봐도 그 모습은 적을 치러 움직이는 군대와 같았다.
"뭐 이런... 도대체... 저것들 도대체 다 어디로 가는 거유?"
"성역으로."
만웅의 물음에 상원이 짧게 대답했다.
저 거대한 야수 무리들은 지금 성역을 치러 움직이는 것이었다.
성역 하나마다 최소 수백은 되는 성성이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우리... 서울역, 서울역으로도 가는 거 아니우?"
만웅의 말에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르르르릉!"
"꾸아아아악!"
짐승들의 포효가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 울려 퍼졌다.
날카로운 발톱과 살벌한 이빨들이 성역을 향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일곱 번째 시험 <후란(猴亂)>을 시작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