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58화 (58/230)

제58화. 후란 (1)

"끄아아악!"

엘가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주위의 땅에서 검은 불꽃이 넘실댔다.

마신 <세상 끝의 불꽃>이 보내는 마기(魔氣)가 짙어져 불꽃 모양으로 형상화되는 것이었다.

마물 어미 문어가 있는 남산타워 전망대, 지금 이 곳은 <세상 끝의 불꽃>의 마기에 잠식당했다.

"끄... 끄으으윽!"

엘가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새하얀 그녀의 날개는 검은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머리에 솟은 뿔도 검은색으로 변하면서 점점 길게 자랐다.

등 뒤에 자란 꼬리 끝에는 삼각형의 돌기가 붙어 있었다.

집행자의 모습은 방금 전까지는 천사와 같았다.

지금은 악마가 따로 없었다.

"악마화."

상원이 중얼거렸다.

방금 전, 감찰사가 엘가를 징벌하면서 그녀의 권한을 박탈했다.

그 결과 집행사 엘가는 악마화하고 있었다.

수험자가 마기에 오염돼서 마인이 되는 것처럼.

승천자는 영적 존재고 수험자는 육적 존재다.

그 사이를 오가는 존재인 기관원은 이도 저도 아닌 정신체일 뿐이다.

마기로부터 혼을 지켜줄 고결한 영혼도, 단단한 육신도 없다.

그들이 거친 시험의 세계를 헤쳐나갈 수 있게 해주는 건 다름 아닌 '권한'이다.

권한이 박탈된 기관원이 마기에 노출되면 어떻게 되는가?

정신체가 영도 육도 없이 마기를 뒤집어쓴다면?

그 사례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그으으으윽...!"

비명이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도도한 집행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거대한 뿔과 꼬리, 검은 날개, 그리고 날카로운 손발톱.

관절마저 뒤틀려 그녀의 모습은 짐승에 가까웠다.

'곧 대화도 못 하는 상태가 되겠군.'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상원은 감찰사가 노린 바를 알 수 있었다.

기관원이 타락해서 마물이 됐다면, 그 격은 최소 4급이다.

감찰사는 상원의 눈앞에 4급 마물을 던져놓음으로써 상원까지 처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는 안 되지.'

저벅 저벅

상원이 웅크린 엘가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확!

엘가가 날개를 펼치며 상원에게 달려들었다.

상원의 얼굴을 향해 휘두른 손에는 단검 같은 손톱이 돋아 있었다.

"큭!"

상원이 거친 숨을 뱉으며 엘가의 손을 잡았다.

"크아아아악!"

짐승처럼 울부짖는 엘가의 입에서 침이 주르륵 흘렀다.

타락하는 기관원을 붙잡고 있는 건 130의 물리력으로도 쉽지 않았다.

아직 타락이 완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3급은 넘는다.

"후우."

상원이 숨을 크게 쉬었다.

상원에게 두 손을 붙잡힌 엘가의 눈에는 아직은 일말의 지성이 남아 있었다.

상원은 단전 밑바닥에서부터 기운을 끌어모았다가 한 호흡에 내질렀다.

천둥 같은 포효가 터져 나왔다.

"잘 들어라 엘가!"

쿠르르릉!

전망대의 유리창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으윽! 조... 상원...!"

그 소리에 잠깐 정신을 차린 건지, 엘가가 겨우 말을 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세상 끝의 불꽃! 그 마기가 닿지 않는 곳으로 보내주마!"

악마화는 마신 <세상 끝의 불꽃>의 권능이다.

엘가가 그 권능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면 악마화도 멈출 것이다.

상원이 엘가의 손을 놓자, 엘가가 다시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지금 마기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중이었다.

"끄으으윽! 끄으으으윽! 제... 제발...."

엘가가 손톱으로 바닥을 벅벅 긁었다.

"좋다, 엘가. <새하늘 약속>을 해라."

상원의 말과 동시에 시스템 메세지가 떴다.

[수험자 <조상원>이 정신체 <엘가>에게 <새하늘 약속>을 제안하였습니다.

성립 요건: 조상원은 엘가의 악마화를 막습니다.

성립 효과: 엘가는 조상원을 돕습니다.]

"이... 이게 무슨?"

엘가의 목소리가 떨렸다.

새하늘 약속은 약속한 두 사람을 속박한다.

엘가로서는 참담할 수밖에 없었다.

도도한 집행사이며 긍지 높은 기관원인 엘가는, 자신이 죄인으로 몰았던 하찮은 수험자에게 구조를 구걸할 수밖에 없게 됐다.

심지어 새하늘 약속에 의해 조력을 강제당하면서.

"끄으으윽."

엘가의 신음엔 그 참담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

"뭘 망설이는 거야. 이대로 일말의 지성도 없는 괴물이 되고 싶은 거냐? 그럼 그러던지."

상원이 손을 거두려 하자, 엘가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제... 제발.... 도와줘."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악마화된 말단 기관원이 어떻게 되는지 그녀라고 모를 리 없다.

그건 그냥 본능과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짐승일 뿐이다.

그런 존재로 전락하느니 수험자에게 조력을 약속하는 게 낫다.

'됐다.'

상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상원은 재빨리 브라이싱크론 지갑에서 <지하 마녀의 눈가리개>를 꺼내 눈에 감았다.

세상 끝의 불꽃, 그 무시무시한 마신의 마기가 닿지 않는 곳을 상원은 알고 있었다.

바로 또 다른 마신인 <지하의 수호자>의 영토인 <끝없는 지하>였다.

짙은 남색 천이 상원의 눈을 가렸다.

[스킬 <지하의 문>을 사용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시야한 쪽에 빛나는 차원문이 나타났다.

끝없는 지하로 통하는 포탈이었다.

상원은 엘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게... 무슨?"

엘가가 물었다.

그녀로서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끝없는 지하에 던져진 정신체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게 뭔지 알고 있지? 당신이 아까 직접 말한 그 스킬이잖아. 마물의 스킬."

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지하 괴조의 스킬 <지하의 문>.

마인으로 지목했던 수험자에게 그 증거로 든 스킬로 구원받는다.

엘가로서는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그런 수치심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그으윽...."

엘가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상원의 사자후에 간신히 잡았던 정신줄을 다시 놓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지금 당신이 악마화를 피할 방법은 이것뿐이야."

손을 당기자 엘가의 몸이 쑥 딸려왔다.

"약속! 약속은!"

다시 정신이 돌아왔는지 엘가가 다급하게 외쳤다.

"당신은 악마화되지 않아. 무슨 문제라도?"

상원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마신의 땅으로 보낸다니! 내가 살아야 너를 도울 거 아냐!"

엘가가 버둥대며 말했다.

"그런 게 걱정돼? 걱정 마. <지하의 수호자>는 정신체 같은 거 관심도 없어. 그 자가 관심 있는 건 신선한 피와 살이지."

상원은 그대로 엘가를 들어서 지하의 문으로 집어 던졌다.

"거기서 잘 계시라고. 나중에 꺼내줄 테니까."

상원은 안대를 풀었다.

엘가는 끝없는 지하로 통하는 새까만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조상원."

그녀는 아직 상원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어찌나 손을 세게 쥐고 있는지 그녀의 손등에 핏줄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잠시나마 마기의 영향을 벗어난 덕에 그녀의 눈빛은 다시 또렷해져 있었다.

"고맙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으마."

상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가가 상원의 손을 놓았다.

한때는 격조 높은 기관원이었던 정신체가 한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멀어지는 그녀의 눈빛에서 상원은 기관에 대한 한없는 원망과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

* * *

6번 시험이 끝났다.

한때 성역이었던 충정로, 그곳에 간 문혁 일행은 꺼져버린 성화에서 무사히 <잿불>을 가져왔다.

충정로를 떠돌던 좀비며 마인들은 모두 한때는 수험자들이었다.

그들을 해치우는 게 상당히 껄끄러웠던 모양인지, 잿불을 회수해 온 문혁의 표정은 어두웠다.

상원은 그 덕에 우리가 또 하나의 시험을 무사히 넘겼다고 문혁을 다독였다.

그 사이 상원은 챙겨야 할 물건을 챙겼다.

바로 7번 시험에서 델타 루트에 진입하기 위한 <어미 문어의 다리>였다.

문어 다리가 없으면 일곱 별의 왕관을 이루는 첫 번째 별을 얻을 수 없었다.

수확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한때 집행자였던 엘가와 새하늘 약속도 맺었다.

일곱 별의 왕관을 얻기 위해선 정신체의 힘을 빌려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상원은 그때 엘가의 힘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새하늘 약속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약속의 억제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지고, 어느 순간 당사자가 억제력을 이겨낼 수 있게 되면 약속은 깨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송혜경의 수호신인 <검은 숲의 목자>와 맺은 약속은 7번 시험이 끝날 때쯤이면 깨질 것이다.

하지만 엘가는 끽해야 하급 기관원이었던 자다.

상원이 그녀의 힘을 이용하는 순간까지 그녀는 약속을 깰 수 없을 것이다.

"좋다."

서울역 한구석의 벤치에서 상원은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하얀 입김이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 * *

그리고 몇 주가 흘렀다.

평소와 같았다면 봄바람이 불어올 시기였지만 먹구름이 잔뜩 드리운 서울 하늘 아래로는 한파가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도 봄이 오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멸망한 세계에 봄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시험이 시작되고 서너 달이 지나자 세상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었다.

새싹 대신 아스팔트를 뚫고 솟아오른 징그러운 넝쿨들이 건물 벽을 타고 자랐고, 부서진 거리로는 좀비 같은 마물들이 우글댔다.

그 거리에서 하나교도 원강수와 박명희는 마물을 사냥하고 있었다.

푹!

"끄으으으윽!"

원강수의 폴대에 미간을 꿰뚫린 <새타니>가 단말마를 뱉으며 절명했다.

[코인 4를 얻었습니다]

[신앙 4를 얻었습니다]

새타니를 사냥한 대가로 강수는 코인과 신앙을 얻었다.

마물을 사냥해서 코인과 신앙을 얻고 그걸 바탕으로 성장하는 것, 그게 평범한 수험자들이 성장하는 방식이었다.

"아이 썅! 아파 죽겠네."

새타니의 긴 손톱에 팔을 긁힌 강수가 상처를 쥐고 소리를 질렀다.

원강수의 개성은 <길잡이>.

6번 시험이 끝난 시점이었지만 전투 전문이 아닌 수험자들에겐 1급 마물은 아직 어려운 존재였다.

"아이구, 거 엄살은. 이리 줘봐요."

박명희가 강수의 등을 때리고는 강수의 손을 낚아챘다.

이어서 그녀의 손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긴 상처가 단숨에 아물었다.

기초적인 치유 스킬이었지만 효과는 상당했다.

박명희의 개성 <신실한 간호사> 덕분이었다.

"아이구, 우리 명희 없으면 어떡했으려나 몰라."

"그러니까 좀 작작 나대요. 멸치 같은 양반이 뭘 믿고 그렇게 까불어대."

강수의 너스레에 명희가 핀잔을 주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은 서로의 눈에서 착찹함을 읽었다.

3번 시험에서 강력한 저주 스킬 <원혼 군주의 절규>를 맞은 명희는 한 달 동안이나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도록 다른 하나교도들의 스킬은 공유되지 않았다.

하나교에 대한 신앙과 교주 유성희에 대한 충성심, 그것들을 되살리기엔 멸망한 세계에서의 두 달은 너무 혹독했다.

"다들 어디서 뭘 하나."

명희가 내뱉은 혼잣말엔 짙은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아이, 뭐 하러 그런 얘길 해. 그런 거 생각하지 마. 서울역이 우리 새 둥지야, 새 둥지."

버럭 화를 내는 강수였지만, 그의 눈빛도 아득해져 있었다.

그때였다.

"꾸아아악!"

"꾸아아아아악!"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수백 마리 짐승 떼가 한 번에 울부짖는 소리였다.

강수가 눈 위에 손을 얹고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스킬 <훤히 보기>를 발동합니다.]

시스템 메세지와 함께, 강수의 눈에 먼 곳에서 움직이는 형체들이 들어왔다.

"흡."

강수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왜요? 왜? 뭔데?"

"이거... 뭔가 심상치가 않아. 빨리... 빨리 돌아갑시다."

강수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한눈에 봐도 수백은 되어 보이는 1급 마물 <잔나비>들이 무리를 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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