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잿불 (5)
집행사 엘가가 상원을 마인이라 부르고 있었다.
마인(魔人)이란 무엇인가?
새하늘교의 경전인 승천계시록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보니 악마의 권능과 세력을 흠숭하는 자들이 있으니, 이 마인들에게는 승천길이 열리지 않으리이다.]
마인이란 본래는 수험자였으나, 악마의 힘을 받아들여 타락한 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더이상 수험자가 아니다.
오로지 주인이신 마신(魔神)들에게 종사하는 마물일 뿐.
집행사 엘가의 말대로 마인은 시험을 치를 수 없다.
그게 승천 시험의 규칙이다.
"무슨 수를 쓴 거냐?"
엘가가 물었다.
"무슨 말이지?"
상원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마인인 네가 어떻게 시험을 치른 건지 물었다."
그 말에 상원이 피식 웃었다.
"내가 마인이라는 거냐?"
엘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지?"
상원이 물었다.
"이게 그 증거다."
엘가가 대답하며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에 커다란 원이 생겼다.
'아, 이건.'
시험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스킬 <기관의 눈>이었다.
집행자들이 소속된 <기관>은 저 능력을 통해서 수험자 하나하나를 감시할 수 있다.
기관의 눈은 기관에 소속된, 사마에트를 필두로 한 집행자들이 사용하는 관리 도구였다.
보통 수험자들은 승천할 때까지 볼 일이 없다.
상원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원 안에는 뿌옇게 안개가 낀 널따란 늪지에서 요새의 수호자와 싸우고 있는 상원이 있었다.
5번 시험에서 오래된 늪지를 모방한 던전에 들어갔을 때의 모습이었다.
그때 집행사 엘가는 시험에 난입해서 5급 괴수 <요새의 수호자>를 불러놓고 상원을 차원째로 소멸시키려고 했었다.
"우우우우우우."
수호자의 울음소리는 관악기 수천 대가 동시에 우는 소리를 연상케 했다.
굉음과 함께 5급을 뛰어넘는 스킬 <요새 수호자의 시선>이 상원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상원은 멀쩡하게 서 있었다.
상원은 요새 수호자를 무시하고 제단을 열어서, 새빨간 <피를 먹는 연꽃>을 지갑에 집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서부터 풍경이 먼지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엘가가 발동한 <차원 삭제>가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원은 모방 차원과 함께 삭제될 게 뻔한 운명이었다.
그때였다.
상원이 지갑에서 긴 천을 꺼내 눈에 둘렀다.
2급 마물 <지하 마녀>가 주는 아이템 <마녀의 눈가리개>였다.
눈을 가린 상원이 허공의 어딘가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러자 상원의 몸이 쑥 사라졌다.
"조상원."
엘가가 상원을 노려보았다.
집행사의 새까만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저건 2급 마물 <지하 괴조>의 스킬 <지하의 문>이다."
반대로 그녀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그래."
상원이 덤덤히 대답했다.
상원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수험자는 마물의 스킬을 쓸 수 없다."
그녀의 말에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행사의 말이 맞다.
수험자는 마물의 스킬을 쓸 수 없다.
<스킬 복사기> 같은 개성도 마물의 스킬을 베끼지는 못한다.
원칙적으로는 그렇다는 얘기다.
원칙적으로는.
"예외는 모두 검토했다."
집행사가 상원의 말허리를 잘랐다.
"결론은 하나뿐이다. 마인 조상원, 너는 부정한 방법으로 시험을 치르고 있다. 더 이상...."
으드득, 집행사가 이를 갈았다.
"네놈이 이 신성한 시험을 더럽히게 둘 수 없다."
요컨대, 마물의 스킬을 쓰는 상원이 정상적인 수험자일 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상원이 비정상인 건 맞다.
하지만 상원이 <지하의 문>을 쓰는 건 그가 마인이라서가 아니었다.
'니가 틀렸다 엘가.'
집행사가 상원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어느새 그녀의 등 뒤에는 커다란 날개 한 쌍이 나타나 있었다.
상원이 피식 웃었다.
"웃어...?"
냉정했던 말투는 온데간데 없었다.
상원은 그녀가 이성을 잃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상원을 견제하려는 엘가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3번 시험에서는 최상급 승천자들의 항의로 물러나야 했다.
5번 시험에서 상원을 차원째로 소멸시키려 했던 시도도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실패했다.
집행사로서는 급발진을 할 만한 상황이었다.
"오라를 받아라, 마인!"
엘가가 품에서 <집행사의 포승줄>을 꺼냈다.
어느새 그녀의 이마에는 뿔 한 쌍이 돋아 있었다.
"그래, 엘가."
상원도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네 말이 맞아. 나는 마물의 스킬을 썼다."
상원의 말에 엘가가 웃었다.
어딘가 뒤틀린 것 같은 기괴한 웃음.
'집행사, 그렇게 웃을 수도 있었군.'
"순순히 인정하는구나. 이리 와서...."
"그런데."
상원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잘못 생각했다. 나는 마인이 아니야."
상원의 대답에 엘가의 눈썹이 꿈틀했다.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그건 일개 집행사가 판단할 바가 아니지."
상원이 씩 웃었다.
상원이 지하의 문을 쓴 게 5번 시험이 끝날 때였으니까 지금으로부터 1주 전이다.
그러니까 엘가가 그걸 지켜본 것도 1주 전일 거란 얘기다.
집행사들이란 꼼꼼하기로는 비할 데 없는 자들이지만, 상원이 마물의 스킬을 썼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 1주일이나 걸릴 이유는 없다.
엘가가 상원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데 1주나 걸린 이유는 다른 걸 준비했기 때문일 것이다.
상원은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감찰사!"
상원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전망대 안에 울려 퍼졌다.
"어서 나와서 판단하시오! 당신에게 감별을 요구한 집행사의 말대로, 내가 마인인지 아닌지!"
그 말에 엘가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걸 니가 어떻게...?"
"내가 대답할 이유는 없지."
상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섭리의 집행자 사마에트를 필두로 한, 흔히들 <기관>이라 부르는 집단에는 여러 종류의 요원들이 근무한다.
그들 중 엘가 같은 <집행사>들은 시험의 집행을 담당한다.
승천자들이 승천 시험에 몰입할 수 있도록 시험을 조절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다양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없는 권한도 많다.
예컨대 특정한 존재가 <수험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
그건 집행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엘가가 조상원을 시험으로부터 축출하기 위해 준비한 방법이 조상원에게 마인 판정을 내리는 것이라면, 당연히 판정할 수 있는 요원을 데려올 수밖에 없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처럼, 엘가 곁에 서 있는 키 큰 여인처럼.
엘가와 달리 새까만 옷을 입은 그녀는 엘가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마치 명상에 든 부처 같았다.
"이자로군요."
감찰사의 목소리는 기계음처럼 높낮이도 없었다.
"예, 감찰사님."
엘가가 깍듯이 대답했다.
감찰사들은 집행사보다 한 단계 위의 존재다.
집행사나 감찰사 같은 기관원들은 그들의 위격(位格)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집행사의 한 쌍의 날개나 사마에트의 일곱 쌍의 날개처럼.
감찰사의 곁에서 하얗게 빛나는 구슬 네 개가 회전하고 있었다.
두 쌍, 그게 감찰사의 격이었다.
정확히 집행사보다 한 단계 위.
"좋아요."
감찰사가 상원에게 다가왔다.
상원은 침을 꿀꺽 삼켰다.
50번째 시험까지 가면서 상원은 기관원들을 몇 번 본적이 있다.
하지만 그중에 감찰사는 없었다.
집행사를 본 적은 많았으니 상원이 엘가 앞에서 기가 죽지 않는 건 당연했다.
기관의 정점인 사마에트는 말 그대로 상식 밖의 존재였기 때문에 거대한 산맥을 보는 것 같은 느낌만 받았다.
감찰사는 달랐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상원도 상당한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감찰사가 품에서 염주를 꺼냈다.
축 늘어진 염주는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상원은 그 물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감찰사들이 진실을 알고자 할 때 쓰는 도구, <미혹을 꿰뚫는 고리>였다.
감찰사는 저 염주를 감긴 대상의 실체를 알 수 있게 된다.
"판정을 시작하겠습니다."
감찰사가 염주를 상원의 목에 둘렀다.
그러자 원형으로 떠오른 염주가 상원의 주변을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감찰사가 손을 뻗어 손바닥을 염주 가까이 댔다.
염주가 보내오는 정보를 읽고 있는 것이었다.
상원은 정수리에서부터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엘가가 다시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원에게는 뻔히 보였다.
'이 게임은 내가 이겼다. 그런 거겠지?'
그녀를 향해서 상원은 다시 한번 웃어 보였다.
"뭐야."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웃어? 드디어 미친 거냐 마인?"
엘가가 상원에게 다가오는 걸 감찰사가 팔을 들어 막았다.
감찰사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의 표정이 심각했다.
가느다랗게 뜬 눈 사이로 황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상원은 알 수 있었다.
판정은 끝났다는 걸.
감찰사는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상원은 그녀의 고민을 끝내기로 했다.
"판정 결과를 말씀해주십시오, 감찰사님."
엘가를 쏘아보며, 상원은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상원의 말에 엘가가 고개를 돌려 감찰사를 보았다.
"감찰사... 님...?"
엘가의 목소리에 일말의 의문이 담겨 있었다.
"판정 결과를 밝힙니다. 수험자 조상원."
꿀꺽.
엘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당신은... 마인이 아닙니다."
침묵이 전망대를 뒤덮었다.
유달리 조용한 전망대 안에서 어미 문어의 촉수가 꾸물럭거리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무슨!"
엘가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그런... 그럴 리가!"
"집행사, 지금 관찰사의 판정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겁니까?"
상원은 머리 뒤로 두 손을 깍지끼고 있었다.
고개 숙인 감찰사의 표정이 침통했다.
"집행자 엘가."
감찰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무고한 수험자를... 마인으로 무고하였습니다. 게다가... 차원 10032568097에 5급 마물을 소환하였으며... 동 차원을... 수험자 6백여 명이 접속한 상태에서... 강제 소멸시키려 한... 하였습니다...."
감찰사의 목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졌다.
그녀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잠깐! 잠깐만!"
엘가가 소리쳤다.
"그건... 그건! 감찰사님... 제가... 제가 소명을...!"
"집행사 엘가."
감찰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아... 이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상원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집행사 엘가가 시험 진행 중인 차원을 소멸시키려고 한 것, 그건 상원이 보기에도 대단한 무리수였다.
기관 입장에선 그걸 묵인하면서까지도 예외 사례인 조상원을 제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상원은 살아남았고, 심지어 5급 마물이 등장하는 걸 본 승천자가 6백이 넘는다.
상원도 문제지만 승천자들은 더 문제다.
이제 기관은 꼬리를 잘라야 한다.
"즉결합니다. 현 시간부로 집행사 엘가의 집행 권한을 박탈합니다."
"감찰사! 잠시만... 잠시만...!"
감찰사는 집행사의 권한을 직권으로 박탈할 수 있다.
그게 감찰사가 무서운 이유다.
이미 엘가의 목소리를 들을 감찰사는 사라지고 없었다.
집행사가 권한을 빼앗긴 채로 승천 시험 한가운데 내던져진다는 것.
그건 단순히 권한 존부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으으으윽... 끄아아아악!"
엘가가 곧 처절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때 상원이 말했다.
"도와줄까, 엘가?"
상원의 목소리가 선선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