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56화 (56/230)

제56화. 잿불 (4)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겨울비가 내렸는데, 멸망한 세계의 날씨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상원은 놀라지 않았다.

다음 시험들에서 볼 풍경들, 예컨대 불타는 비 같은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이 풍경은 기상 현상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은가.

상원은 손을 내밀어보았다.

손 위에 쌓이는 눈송이엔 재가 섞여 있어서 화산재라 해도 믿을 정도로 새까맸다.

산기슭에서 상원은 남산타워를 올려다보았다.

남산타워로 가는 길,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겨울바람에 흔들리며 을씨년스런 소리를 냈다.

대낮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어둠이 남산 전체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건 비단 먹구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산 타워 꼭대기에 있는 '그것'이 남산에 어둡고 음산한 기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후우."

상원은 크게 숨을 쉬었다.

한숨과 함께 새하얀 입김이 겨울 공기 속으로 퍼져 사라졌다.

일곱 별의 왕관을 이루는 첫 번째 별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물건 중 하나가 저 위에 있었다.

승천 시험에는 아이템이나 스킬을 비롯한 여러 가지 시스템이 있는데, <칭호>도 그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칭호는 위업을 달성하면 얻게 되며, 여러 가지 효과를 가진다.

물론 어려운 위업을 달성할수록 더 좋은 칭호를 받게 된다.

그중에서도 <일곱 별의 왕관>은 굉장히 특별한 칭호였다.

대부분의 승천자들마저 그 존재조차 모르는 이 칭호의 효과는 단 하나다.

바로 수험자에게 신격(神格)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신격이 수험자에게 주는 효과도 단 하나뿐이다.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상원이 승천 시험에 대해 모르는 사실은 없었다.

50번째 시험에 도달할 때까지는 그랬다.

마지막 시험에 가서야, 상원은 신격이 없으면 마지막 시험을 깰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 사실은 32권의 경전과 198권의 노트 그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으드득.

그걸 상기하니 저절로 이가 갈렸다.

어쨌든, 개성인 <불신자> 때문에 그 어떤 승천자와도 수호 계약을 맺을 수 없는 상원으로서는 일곱 별의 왕관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물론 살아있는 인간에게 신격을 내려주는 칭호인 만큼 그걸 얻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원도 <기계장치의 신>으로부터 이 사기적인 의체(義體)를 선물 받지 않았다면 승천 자체를 포기했을 것이다.

'가자.'

상원이 숲을 향해 발걸음을 디뎠다.

바닥에 쌓인 새까만 눈에서 뽀드득 소리가 났다.

우우우우우.

마기가 잔뜩 드리운 숲으로부터 마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상원은 어둠 속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 * *

사마에트의 강림과 함께 승천 시험이 선포된 지

2주.

그사이 무성하게 자란 수풀이 남산타워로 이어지는 차도를 덮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에 차도가 있었다'는 걸 구분할 정도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정상을 향해 뛰어가는 상원의 기세는 마치 철갑을 두른 전차 같았다.

마기가 짙은 탓인지 그 길에는 가끔 2급 마물도 나타났지만, 상원에게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이런 잔챙이들을 상대로 힘을 허비할 순 없었다.

산 정상에 가서 아껴둔 힘을 모두 쏟아부어야 했으니까.

상원의 앞을 가로막은 마물들은 볼링 핀처럼 튕겨 나갔다.

그렇게 상원은 남산타워에 도착했다.

"후우."

상원이 크게 숨을 쉬었다.

남산 꼭대기의 오래된 봉화대가 마기가 섞인 탁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마기에 오염된 봉화대 안에서는 시뻘건 지옥불이 넘실대고 있었다.

계란이 썩는 듯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인간... 인간이다!"

봉화대에서 남산타워로 향하는 길은 성인 남성만 한 마물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다.

좌우로 쭉 찢어진 눈에선 노란빛이 형형했고 귀까지 찢어진 입속에선 길다란 혀가 꿈틀거렸다.

2급 마물 이매(魑魅)였다.

"캬아아악!"

이매들이 쐐기 모양의 불덩이를 던졌다.

공격 스킬 <유황불 화살>이었다.

쾅!

불덩이들이 둔탁한 폭발음을 내며 상원에게 작렬했다.

하지만 상원은 어떤 타격도 받지 않았다.

상원의 개성은 <불신자>.

그에게는 어떤 스킬도 통하지 않는다.

"귀찮네."

중얼거린 상원이 지갑에서 <주지사의 샷건>을 꺼냈다.

레벨업을 하면서 괴력이 늘어난 덕에 총이 한결 가벼웠다.

웬만한 수험자들은 두 손으로 들기도 벅찬 샷건을 권총마냥 휘두르며, 상원은 이매 떼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시 한번 유황불의 포화가 쏟아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쾅!

샷건이 불을 뿜었다.

이매들이 피떡이 되어 사라졌다.

"끄으으으윽!"

무지막지한 반동에 총구가 하늘로 솟구쳤다.

상원은 유려하게 움직이며 그 반동을 흘렸는데, 마치 칼춤을 추는 것 같았다.

65의 용력이 그 움직임을 가능케 했다.

그 신속함에 이매들은 미처 반응하지도 못했다.

몇 번의 총성이 울리고, 남산타워 앞은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이제 상원을 방해할 건 없었다.

"좋아."

주위를 슥 둘러본 후 상원은 <하늘 계단 조각>을 꺼냈다.

은청색 금속 조각들이 상원의 주위를 천천히 떠다니기 시작했다.

상원은 고개를 들어 남산타워의 전망대를 바라보았다.

전망대에서는 실체화한 마기가 회색 연기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기에 히든 던전이 있다.

"해보자."

상원은 공중에 뜬 발판들이 하늘로 향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금속 조각 몇 개가 뭉쳐 상원 앞에 발판을 만들었다.

딱 발 하나가 올라가기 알맞은 크기였다.

상원은 발판 위로 발을 디뎠다.

발판 만들기는 생각만큼 잘 되진 않았다.

계단 조각은 성물, 다루는 데 상당한 마력이 들었다.

하지만 상원의 술력은 60에 달했다.

거대한 몸에서 끝도 없이 쏟아지는 마력을 바탕으로 상원은 계속 계단을 만들어 나갔다.

곧 상원은 하늘 계단 조각을 그럴싸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간다."

전망대를 노려보며 짧은 한마디를 내뱉고서, 상원은 하늘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조각들이 뭉쳤다 흩어지기 반복하며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상원은 전망대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때였다.

전망대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어린아이 덩치만 한 빨간 살덩어리에 촉수들이 붙어 있는 모양새가 마치 문어 같았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물, 1급 마물 <불꽃 문어>였다.

"끼리리릭."

문어들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전망대에서 튀어나온 문어 몇십 마리가 일제히 상원을 향해 날아왔다.

상원 가까이에 온 문어들이 아가리에 불덩이를 모았다가 쏘았다.

야구공만 한 불덩어리가 상원을 향해 쇄도했다.

불꽃 문어의 불덩이는 스킬이 아니기 때문에 상원이 개성의 힘으로 무효화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비책은 마련되어 있었다.

"흡!"

상원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마력이 전신을 맹렬하게 꿰뚫는 게 느껴졌다.

차르르륵!

은청색 비늘들이 상원의 주위를 회전하며 쇳소리를 냈다.

쾅!

상원에게 날아오던 불덩이가 조각에 부딪혀 사라졌다.

찰나의 순간, 남는 계단 조각들을 움직여 불덩이를 막은 것이다.

'좋아!'

상원이 <하늘 계단 조각>을 준비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지금 단계에서 평범하게 구할 수 있는 아이템들, 예컨대 록시가 파는 귀물급 보구 <날으는 양탄자>로는 불꽃 문어들의 불덩이를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하늘 계단 조각은 다르다.

3급 마물 <하늘악어>의 비늘로 만든 계단 조각은 1급 마물의 불덩이 정도는 쉽게 막을 수 있었다.

상원이 불꽃 문어들의 견제를 뚫고 전망대에 닿는 길은 하늘 계단 조각을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3번 시험에서 나오는 하늘악어를 때려잡는다는 무모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 것이다.

상원은 허공에서 너울대는 문어들을 쉽사리 따돌렸다.

"끼이이이익!"

문어 떼들이 내는 소리가 멀어졌다.

전망대가 빠르게 가까워져 왔다.

* * *

쨍그랑!

육중한 거구가 온 몸을 던지자 전망대의 유리창이 가볍게 박살났다.

상원은 몸을 굴려 관성을 흘려내고 주위를 경계했다.

전망대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바깥을 덮어, 밖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전망대 안은 거의 암실처럼 되어 있었다.

검고 끈적끈적한 덩어리들이 천장에서 바닥까지 뻗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석주(石柱) 같았다.

거기엔 주먹만 한 알들이 알알이 박혀 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모두 불꽃 문어의 알들이었다.

상원이 전망대로 날아오면서 본 알들은 모두 유체들이었다.

전망대 한가운데 이 알들을 낳은 <불꽃 문어 어미>가 있다.

[숨은 시험: 남산타워 꼭대기에 <불꽃 문어>의 부화장이 있다. 그 한가운데 어미가 있다.]

[어미에게서 <어미 문어의 다리>를 얻을 수 있다.]

[<어미 문어의 다리>를 <흑마술 양초>에 구워 먹으면 델타 루트로 가는 길을 볼 수 있다.]

상원이 노트에서 본 내용들이었다.

상원이 남산타워에 온 건 <어미 문어의 다리>를 얻기 위해서였다.

어미 문어의 다리를 정부청사에서 얻은 <흑마술 양초>에 구워 먹으면 7번 시험의 델타 루트를 탈 수 있다.

일곱 별의 왕관을 구성하는 첫 번째 별을 얻으려면 그 델타 루트에 가야 한다.

"후우."

상원은 샷건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전망대 가운데로 향했다.

과연, 전망대 가운데의 거대한 원통을 무언가가 감싸고 있었다.

핏줄같이 생긴 촉수 수십 가닥이 원통을 감싸고 있었는데, 어른 몸통보다도 굵어 보였다.

촉수들이 맹렬하게 꿈틀거렸다.

그 촉수들 끝에서 알들이 꿀럭거리며 튀어나왔다.

절로 혐오감이 들게 하는 모습, 저 촉수 덩어리가 바로 <불꽃 문어 어미>였다.

'저게 도대체 어딜 봐서 문어냐고.'

어미 문어를 처음 보았을 때 소름 돋았던 기억이 스쳐 갔다.

그 뒤로는 하도 많이 본 탓에 감상이랄 게 없어져 버렸지만.

어미 문어를 향해 다가간 상원이 촉수 하나를 손에 쥐어 뜯어냈다.

쩌저저적

살점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촉수가 상원의 키보다 길게 뜯어져 나왔다.

상원은 뜯겨 나온 촉수를 지갑에 담았다.

이 촉수를 전송받은 록시는 이걸 구워 먹을 수 있는 <어미 문어의 다리>로 가공해줄 것이다.

챙겨야 할 물건을 얻은 상원이 돌아섰다.

그때였다.

"멈춰라, 수험자 조상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알 기둥들 사이에서 인영이 나타났다.

까마귀의 깃털처럼 윤기가 흐르는 흑발과 눈처럼 새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피부는 너무나 하얘서 옷과 피부가 잘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커다란 두 눈에 박힌 새까만 눈동자가 상원을 쏘아보았다.

3번 시험부터 상원을 줄곧 견제하고 있는 집행사 엘가였다.

"엘가."

상원도 엘가를 쏘아보았다.

5번 시험에서 그녀는 상원을 비롯한 서울역의 수험자들을 차원 째로 소멸시켜버리려고 했다.

"니가 거기서 나올 방법은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기분 나쁘시오? 예외 사례가 두 눈 뜨고 살아 있으니."

엘가와는 반대로 상원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수험자."

엘가가 상원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상원은 그녀의 몸짓에서 그녀가 잔뜩 화났다는 걸 알았다.

"너는 이제 시험에서 배제될 것이다."

엘가의 아름다운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무슨 말이오?"

그 말에 상원이 눈썹을 꿈틀했다.

"왜냐하면, 마인은 시험을 치를 수 없기 때문이다. 수험자... 아니, 마인(磨人)조상원."

집행사가 씹어뱉듯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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