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55화 (55/230)

제55화. 잿불 (3)

성전상인 록시의 커다란 전서구가 상원과 만웅 앞의 돌 더미 위에 앉았다.

새하얀 깃털이 폐허의 잿더미와 대비되었다.

그 대비가 강렬해서 순간 비둘기가 성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입을 열기 전까지는.

"투자자님, 깜짝 놀랄 일이 있수!"

겉으로 보기엔 순백색 비둘기였지만 목소리는 경박한 록시의 목소리 그대로였다.

그 차이에 만웅이 풉 웃었다.

"어어? 왜 그러셔? 웃겨?"

"아니... 그게 아니고."

록시의 말에 만웅이 쩔쩔맸다.

상원에게 있어 록시는 투자 대상이요 좋은 도우미였다.

하지만 만웅 같은 평범한 수험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록시는 이 구역의 유일한 상인이기 때문이다.

시험을 풀어나가는데 필수적인 아이템을 파는 상인이 독점 상인이라면 고객들은 쩔쩔맬 수밖에 없다.

"그게 뭡니까, 록시."

"구루루룩."

상원이 끼어들자 전서구가 구룩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우리 투자자님, 지갑 좀 열어 보시겠수?"

'아.'

그 말에 상원은 직감했다.

지갑의 또 다른 기능이 해금된 것이다.

성전 상인 록시와 전속 계약한 투자자만이 살 수 있는 물건 세 개 중 하나인 브라이싱크론 지갑.

겉보기엔 평범한 카드 지갑이지만 사실은 아공간으로 통하는 통로다.

이 지갑 덕분에 일곱 별의 왕관을 얻기 위해 챙겨야 하는 수많은 물건들을 손쉽게 가지고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지갑의 기능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 사이 만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웅이 상원에게 고맙다는 눈짓을 보냈다.

상원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구루루루룩."

상원이 지갑을 꺼냈다.

그와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성전 상인 <록시>가 보낸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두 번째 기능은 지갑을 통해 물건을 직접 전달받는 것이었다.

수험자들과 상인 간 거래는 보통 대면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평범한 수험자들은 시험과 시험 사이 시간에 상인이 와서 장을 열기를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상원은 지갑의 기능을 통해 성전 상인 록시와 언제 어디서든 소통할 수 있을뿐더러 물건도 실시간으로 전달받을 수 있다.

그건 상원이 브라이싱크론 지갑의 기능을 해금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새하늘교에서 승천 시험에 대해 빠짐없이 공부한 상원이 가진 특권이었다.

"어여 열어보슈."

비둘기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지갑을 보았다.

어서 확인해보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상원이 씩 웃었다.

[물건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좋습니다."

상원이 대답했다.

그러자 지갑에서 은청색 금속 조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 변 길이가 5센티미터 정도 되는 마름모꼴 조각들이 40개 정도 됐다.

조각들은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궤도를 그리며 상원의 주위를 떠다녔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성물급 아이템 <하늘계단 조각>을 얻었습니다.]

성물급.

승천 시험에서 아이템 등급은 유물급 - 귀물급 - 성물급 - 신기급으로 나뉜다.

다른 수험자들이 귀물급 아이템조차도 얻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동안, 상원은 벌써 성물급을 얻었다.

이 역시 상원이 승천 시험에 대해 빠짐없이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전 32권과 노트 198권의 내용이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모두 상원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좋다!'

상원이 씩 웃었다.

성물급 아이템 <하늘계단 조각>.

하늘악어 시체에서 나온 비늘에 귀물급인 <날으는 양탄자>를 비롯한 아이템 몇 개를 조합해 만든 물건이었다.

세 번째 시험에서 무리해서라도 3급 마물 하늘악어를 잡고자 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이 아이템이 있어야만 6번의 숨은 시험을 깰 수 있다.

"내 손으로 만들었지만... 참 대단한 아이템이더만. 투자자님, 그거 한 번 시험해 보슈."

록시의 말에 상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늘계단 조각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 조각 하나하나에 마력을 불어넣고 하늘로 향하는 발판을 상상할 것.

노트에 쓰인 대로 상원은 계단을 상상했다.

그러자 조각 열 개 정도가 상원 앞에 모여 발판을 만들었다.

상원이 한쪽 발로 발판을 디디고 올라갔다.

- 다음 발판을 상상하고 발을 옮길 것.

계단을 올라가듯 발을 옮기자 다른 조각들이 날아와 발판을 만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투명한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것 같았다.

이 조각들은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을 만든다.

이름이 <하늘계단 조각>인 이유가 그것이었다.

"어... 형님? 그거 뭡니까? 무슨 허공 답보라도 돼요?"

만웅의 입이 떡 벌어졌다.

도대체 저 인간의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말에 상원이 피식 웃었다.

'허공 답보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조각들이 지갑 속으로 도로 빨려 들어갔다.

무려 성물급 아이템이다.

이 아이템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건 술력 60인 상원으로서도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더군다나 상원은 암기 천재였지만 마력을 운용하는 덴 영 소질이 없었다.

숨은 시험에 들기 전에 조각 쓰는 법을 열심히 연습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상원이 외쳤다.

"록시! 고맙습니다. 물건은 틀림없습니다."

"좋수 좋수 투자자님! 하하하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만 하쇼!"

파안대소하는 비둘기의 얼굴에 퍽 정감이 갔다.

"저... 사장님, 저도 물건 좀 사면...."

"떽! 손님은 이따가 성역에서 봅시다."

만웅의 말을 단칼에 거절한 비둘기가 멀리 날아갔다.

아마 상원 말고 다른 전속 계약자들에게 날아가는 것일 게다.

전속 계약한 수험자가 상원 혼자만은 아닐 테니.

"와... 회칼로 쑤셔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양반이 형님한테는 그냥 끔뻑 죽네. 어떻게 구워삶았어요?"

지평선을 향해 날아가는 전서구의 뒷모습을 보며 만웅이 코를 슥 문질렀다.

"아는 게 힘이란다."

"예?"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하라고."

"아니... 뭐, 공부? 공부요?"

"아니다 만웅아. 너는 그냥 칼 쓰는 거나 열심히 익혀라."

상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때였다.

[여섯 번째 시험 <잿불 회수>를 시작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뜨는 데는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어... 갑자기?"

만웅이 중얼거렸다.

[성화에 <잿불>을 바쳐야 합니다.]

[잿불은 꺼진 성화에 있습니다.]

[24시간 안에 <잿불>을 바치지 않으면 성화가 꺼집니다.]

"어... 그래, 그렇구만. 네, 네. 알겠수다."

만웅은 그의 수호신 <자칭 협객>과 중얼중얼 대화를 나누었다.

"자 형님, 이제 그러면 그 잿불 주우러 가면 되는 거유?"

"아니."

"에... 왜요?"

"잿불은 이미 얻으러 갔거든. 백문혁 씨가."

"아."

상원의 대답에 만웅의 입이 벌어졌다.

"문혁이 간 데가... 충정로? 그쪽이잖아요?"

"그래. 그 쪽에 잿불이 있다."

서울역과 가장 가까운 성화는 충정로에 있었다.

성역 <충정로역>.

다섯 번째 시험이 끝난 후 상원은 종종 북서쪽으로 올라가 충정로에서 피어오르는 성화를 보곤 했다.

상원의 예측이 맞다면, 충정로는 차원의 정수를 하나도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고 성화는 곧 꺼질 것이었다.

역시나, 예측대로였다.

충정로의 불기둥은 점차 가늘어지다가 며칠 못가 꺼져버렸다.

"와... 그건 어떻게 아셨수?"

"다 방법이 있지."

상원이 회귀 전 잿불을 얻은 곳도 충정로였다.

그때 상원은 잿불을 가지러 가는 조에 끼어 있었다.

'그때도 죽을 동 살 동 고생했었지.'

회귀 전의 기억이 스쳐 갔다.

그때 서울역 성화에 봉헌된 정수는 고작 하나였다.

그래서 상원은 성화의 불꽃이 닿지 않는 곳에서 마물들 그리고 기괴하게 변형되어버린 수험자들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에 비하면 지금 충정로는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정수 다섯 개가 봉헌된 서울역의 성화는 충정로까지 충분히 미친다.

그러므로 충정로로 간 수험자들은 성화가 주는 회복 효과를 받으며 수월하게 잿불을 회수해올 수 있다.

"그러니까... 문혁이 동생을 미리 거기로 보낸 거란 얘기죠?"

"그럼."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문혁을 비롯한 정예 수험자 몇 명을 충정로로 보냈다.

그 정도라면 여섯 번째 시험을 깨는 건 문제 없다.

"대단하다 대단해. 진짜 우리 회장 이후로... 헙."

거기까지 말한 만웅의 표정이 굳었다.

상원이 만웅의 안색을 살폈다.

만웅을 만난 이후 그렇게까지 어두운 표정을 짓는 건 처음이었다.

상원에게 손가락을 베일 뻔 했을 때도, 3번 시험에서 <흑풍회 살수>들에게 죽을 뻔했을 때도 이런 표정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천적을 연상하는 먹잇감의 표정이었다.

만웅같이 담 큰 자라도 생각만으로 오금을 지리는 인물.

만웅이 회장이라 부르는 자, <육마귀> 중 하나인 콘크리트 회장 강상중은 그런 자였다.

애초에 상원이 만웅과 친해진 이유도 만웅과 강상중의 관계를 이용해서 강상중을 치기 위함이었다.

'그놈...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갈아 없애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김만웅이를 잘 구슬려놓는 것밖에.'

"만웅아."

상원이 만웅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표정이 안 좋다. 가서 쉬어라. 아이템도 좀 사고. 6번 시험은 거저 넘어가지만, 7번은 장난이 아니다. 조심해야 된다."

"으... 알겠수다."

만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형님, 형님은 안 가슈?"

"아, 나는 따로 들를 데가 있어서."

"어디 가시는데요?"

"남산."

상원의 대답에 만웅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거기는... 아니다, 뭐 형님이 하시는 일에 다 뜻이 있겠지."

만웅이 코를 슥 비비며 돌아섰다.

"조심히 갔다 오슈."

"그래."

* * *

무너진 문명의 폐허 위로 차가운 겨울비가 쏟아졌다.

상원의 옷을 적신 빗물은 순식간에 말랐다.

다섯 개의 정수를 봉헌 받은 성화가 최적의 상태를 유지시켜주고 있었다.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마물들은 상원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지금 성역 바깥을 돌아다니는 마물은 끽해야 1급.

능력치 총합이 190인 상원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성화의 온기를 받으며 상원은 겨울비 아래를 신속하게 움직였다.

거리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불타는 자동차, 거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마물들과 죽지도 못한 채로 산 자의 살을 찾아 헤매는 수험자들.

종말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예전에는 이 불합리함에 분노하기도 했지만, 지금 상원에게는 그저 풍경일 뿐이었다.

새하늘교의 종말 <승천 시험>이 어느 날 갑자기 현실이 됐을 때, 상원은 그게 질 나쁜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이 빌어먹을 시험에 분노했었고, 또 한동안은 그저 살아남기 급급해 견디기만 했다.

이제는 목표가 확실했다.

<일곱 별의 왕관>을 완성하고 승천한다.

나머지는 필요 없었다.

움직일수록 공기가 탁해졌다.

성역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윽고 상원은 남산의 기슭에 다다랐다.

던전 <남산타워>가 먹구름 낀 겨울 하늘 아래서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연기를 줄줄 내뿜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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