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54화 (54/230)

제54화. 잿불 (2)

"깨어났네."

태성이 허허 웃었다.

"형님... 괜찮으시우?"

만웅의 동그란 얼굴이 그늘져 있었다.

"상원씨, 오래 기다렸어요."

진아의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정말로 잘못되는 줄 알았습니다."

문혁이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원은 머리를 흔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명희와 창훈이 누워 있는 부상자 구역에 누워 있었다.

"제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지요...?"

"몇 시간 됐수다. 쌔근쌔근 잘 주무시더만."

강수가 새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험은...."

"30분. 30분 남았습니다."

문혁이 대답했다.

"아아."

다행히 시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상원은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세 개는 큰 상원이 일어서자 수험자들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이 마치 상원을 우러러보는 것 같았다.

"다들 정수는 가져오셨나요?"

"그럼요."

진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것 보슈 형님."

만웅이 손을 뻗어 불꽃 곁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차원의 정수들이 있었다.

하나는 덜 식은 용암처럼 회색과 빨간색 불빛을 내뿜는 짙은 회색 잿더미였다.

그것이 바로 지옥의 정수, <세상 끝의 재>였다.

다른 하나는 커다란 해골이었는데, 눈구멍 속에서 도깨비 불같은 퍼런 불꽃이 이글대고 있었다.

그게 연옥의 정수인 <연옥의 해골>이었다.

그리고

"불신자."

온몸에 검은 핏발이 돋은 한창훈의 곁에 앉아있던 송혜경이 상원을 향해 이빨을 들이대며 으르렁거렸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건 흙먼지였다.

상아색 흙먼지가 그녀의 손 위에서 회오리치고 있었다.

그게 바로 부서진 광야의 정수인 <광야의 흙먼지>였다.

"정수."

혜경이 내뱉듯 말했다.

상원은 피식 웃으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잘했다."

상원이 정수를 넘겨받았다.

"크르르릉!"

두 눈이 새까매진 혜경이 상원에게 이빨을 들이댔다.

그러자 혜경의 주변으로 스파크가 일었다.

깜짝 놀란 혜경이 표정을 바꾸며 물러났다.

새하늘 약속이 그녀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4번 시험이 끝날 무렵 상원은 지하의 수호자를 이용해서 혜경의 수호신인 검은 숲의 목자와 새하늘 약속을 맺었다.

새하늘 약속은 당사자들을 통제한다.

약속을 어기려고 하면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된다.

지금 혜경이 그러는 것처럼.

그 고통을 이길 수 있을 때가 되면 약속은 깨지지만, 검은 숲의 목자는 당분간 그 정도로 강해지진 않을 것이다.

상원은 그때를 7번 시험 정도로 예측했다.

"혜경이가 잘 해냈네요."

창훈이 말했다.

그의 안색은 변함없이 파리했다.

창훈이 손을 뻗어 혜경의 머리를 쓰다듬자 혜경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하게 바뀌었다.

상원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승천 시험에서 검은 숲의 목자를 통제할 수 있는 건 그 화신의 남편인 창훈뿐이다.

상원은 창훈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깊은 숲의 목자가 먹잇감으로 정한 사내, 한창훈.

그는 지금도 검은 숲의 목자의 온몸을 파고드는 기운을 견디는 중이었다.

오로지 그의 아내를 위해서.

'저 고통을 내가 겪었을 수도 있지.'

상원은 한숨을 쉬었다.

새하늘교의 계획대로였다면 상원과 그의 누나 상은이 저렇게 시험을 헤쳐나가고 있을 것이었다.

'지금은 그냥 다 옛날얘기지만.'

마음이 무거워졌다.

비록 환상이었지만, 지하의 수호자가 보여줬던 누나의 모습은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의 숨결이 금방이라도 느껴질 것만 같았다.

상원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앞으로의 일에 집중하자.'

상원은 <광야의 흙먼지>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흙먼지를 머금은 돌풍이 팔뚝을 따라 회오리치는 게 느껴졌다.

한때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었지만 지금은 부숴져 버린 광야, 그곳을 본딴 차원의 흙먼지가 상원의 손바닥 위에서 회오리치고 있었다.

"이제."

상원이 그를 바라보는 수험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만신전을 세울 차례입니다."

"오오."

"드디어...."

수험자들이 기대감에 가득 찬 눈으로 상원을 바라보았다.

처음, 상원은 손에서 회오리치는 광야의 흙먼지를 성화 속으로 던져 넣었다.

확!

상아색 불꽃을 내며 성화가 크게 일렁였다.

[<광야의 흙먼지>를 바쳤습니다.]

시스템 메세지가 들렸다.

그 뒤로 세상 끝의 재와 연옥의 해골을 던져 넣고, 지갑에서 다른 두 정수를 꺼내 던져 넣었다.

정수를 넣을 때마다 성화는 짙은 회색과 푸른색, 그리고 갈색과 연녹색 빛깔을 차례로 내뿜었다.

다섯 번째 정수인 피를 먹는 연꽃를 던져넣고 나자 시스템 메세지가 들렸다.

[<피를 먹는 연꽃>를 바쳤습니다.]

[차원의 정수 다섯 개를 모두 바쳤습니다. 성역 <서울역>에는 그에 걸맞은 만신전이 세워질 것입니다.]

쿠구구구

굉음과 함께 천지를 울리는 진동이 시작되었다.

성화의 주위로 커다란 기둥들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하나하나의 지름이 족히 2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런 기둥들이 다섯 개였다.

기둥마다 다섯 차원을 상징하는 마물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기둥의 꼭대기에는 다섯 색깔 불꽃들이 타오르고 있었다.

"저게... 저게 만신전?"

"아... 대단해요."

수험자들이 감탄했다.

"대단한 위용이군."

상원이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정수 다섯 개를 바쳐 지은 만신전을 보는 건 상원도 처음이었다.

회귀 전 서울역은 정수 하나만 가지고 만신전을 지었다.

그때는 기둥이 하나였고 그 기둥도 지금처럼 굵고 아름답지는 않았다.

[다섯 정수의 만신전이 완성되었습니다.]

[성화의 기운이 강해집니다.]

만신전의 기능은 여러 가지인데, 그 중 대표적인 기능이 성화의 기운을 강화하는 것이다.

서울역의 수험자들은 성화가 내뿜는 따스한 빛이 강렬해지는 걸 느꼈다.

이제 성화의 회복 기능도 강화될 것이고, 그 빛은 아주 멀리까지 뻗어나갈 것이다.

그 말은 곧 서울역 수험자들의 행동반경이 아주 넓어진다는 뜻이었다.

이 환경에서 서울역 수험자들은 수월하게 코인과 신앙을 쌓아서 성장할 것이다.

[다섯 번째 시험, <만신전>을 통과했습니다.]

[보상 정산이 시작됩니다.]

"와아아아!"

이렇게 다섯 번째 시험이 끝났다.

수험자들은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었다.

상원은 성화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번 시험을 마치는 데 상원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상원에게 주어질 시험 완료 보상은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또 다른 메세지가 들렸다.

[위업이 충분히 누적되었습니다.]

[의체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업 효과로 의체가 수복됩니다.]

시스템 메세지와 함께 상원의 몸에서 녹색 빛이 쏟아져 나왔다.

'좋아.'

스킬포인트 분배를 위해 상원은 의체 관리 인터페이스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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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체 관리 시스템]

접근이 허가된 정보들만 표시됩니다.

레벨 4 (3%)

성능: 괴력 65, 용력 65, 술력 60

- 레벨업 효과로 능력이 올랐습니다.

스킬: 요새 수호자의 시선, 지하의 문(2), 하늘의 불씨(2), 마력 삼키기 [더보기]

- 레벨업 효과로 스킬포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원하는 스킬에 투자할 수 있습니다.

모래시계 충전 시간: 2분 2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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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은 스킬들의 목록을 살펴보았다.

먼저 눈이 간 스킬은 <지하의 문>이었다.

<지하의 수호자>의 권속들인 <지하 괴조>들에게서 베낀 스킬로서, 마신의 영토인 <끝없는 지하>에 드나들 수 있는 스킬이다.

스킬포인트를 하나 투자해서 스킬 레벨이 2였다.

이 스킬 덕분에 4번 시험에서 자기와 윤진아가 제물이 되는 공략법을 짤 수 있었다.

그리고 5번 시험에서 엘가가 봉쇄해버린 차원을 탈출할 때도 이 스킬을 썼다.

그야말로 생명의 은인 같은 스킬이었다.

하지만 상원은 이 스킬을 더 쓰지 않기로 했다.

끝없는 지하에 갔을 때 지하의 수호신은 상원이 하늘방에 돌아갔던 그 날의 기억을 보여주었다.

'또 들어갔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가 없다.'

이 스킬을 또 썼다간 정말로 끝없는 지하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후우.'

투자한 스킬포인트 하나가 아깝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원은 고개를 털고 다른 스킬들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보인 스킬은 <결투장>이었다.

만웅의 수호신인 <자칭 협객>의 성현인 <야인의 결투장>을 베낀 스킬.

가상의 결투장을 만들어서 지정한 상대방과의 1:1 상황을 만드는 스킬이었다.

이 스킬도 요긴하게 써먹었다.

'하지만... 요새 수호자한테 이거 썼다간 그 반발력에 내가 가루가 돼버렸겠지.'

결투장의 방벽은 무적이 아니다.

방벽에 가해지는 부담은 일정 부분 스킬 시전자가 감내해야 했다.

자연스레 상원의 시선은 마지막 스킬에 닿았다.

5급 마물 요새 수호자의 상징격인 스킬.

한 방에 수험자 수백 명을 폭사시켜버렸던 스킬, <요새 수호자의 시선>이었다.

위력 하나만큼은 비할 바가 없는 강력한 스킬.

'더 볼 것 없지.‘

[<요새 수호자의 시선>의 레벨이 2로 올랐습니다. 스킬 효과가 강화됩니다.]

레벨까지 올리면 얼마나 엄청난 스킬이 탄생할 것인가.

상원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이걸로 상원은 일곱 별의 왕관에 한 발짝 더 다가갔다.

* * *

현실은 악몽보다 더했다.

성역의 바깥은 그야말로 인외마경이었다.

1월로 접어든 서울의 한파에 더해 하늘에는 하상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햇빛조차 들지 않았다.

살을 에는 추위와 함께 가끔 무서리와 눈보라가 몰아쳤다.

온통 폐허가 된 거리엔 시체와 마물이 즐비했다.

생전 처음 보는 끔찍한 식물들이 폐허 위로 자라났고 그 위를 마물들이 돌아다녔다.

밤이 되면 시체들이 비척거리며 일어나 살아있는 사람들의 피와 살을 탐식했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새하늘교 사람들조차도 거부한 현실.

이제부터 수험자들이 해야 할 일은 이 환경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다섯 번의 시험을 거치며 성화가 꺼져버린 성역도 부지기수였다.

이런 성역의 수험자들은 새로운 환경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어서 좀비나 마인으로 전락할 것이다.

하지만 서울역은 달랐다.

다섯 정수를 넣어 만든 만신전의 불꽃은 아주 멀리까지 뻗어나갔다.

서울역의 수험자들은 그 불꽃을 받으며 편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스걱!

만웅의 날카로운 나이프가 큰 개를 닮은 마물의 다리를 갈랐다.

"깽!"

다음 일격에 마물의 모가지가 떨어져 나갔다.

깔끔한 칼솜씨였다.

"많이 늘었네."

"아이고 형님, 감사합니다."

상원의 말에 만웅이 코를 슥 비볐다.

만웅이 마물의 사체를 준비해온 자루에 담았다.

성화의 불꽃으로 정화하면 마물의 살도 맛있는 음식이 된다.

두 사람은 식량을 구하는 중이었다.

시험 없이 지낸 지도 일주일이 다 돼갔다.

그 사이 서울역의 수험자들은 사냥을 나가 실력을 쌓았다.

서울역 수험자들은 시험을 시작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져 있었다.

"하하, 이정도면 다음 시험 봐도 될 것 같은데요."

만웅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였다.

구우우우

큰 울음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 커다란 비둘기가 원을 그리고 있었다.

록시의 전서구였다.

그 말인 즉 다음 시험을 시작할 때가 됐다는 뜻이었다.

"젠장...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상원은 피식 웃으며 만웅이 자기 입을 때리는 꼴을 보았다.

"어... 투자자님! 거기 계셨수?"

경박스레 외친 전서구가 상원을 향해 날아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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