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잿불 (1)
'언제 밤이 되었을까.'
상원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르게 빛나는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했다.
덥고 습한 한여름 밤의 공기가 뺨을 스쳤다.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여긴...."
여기를 어떻게 잊겠는가.
미간을 찡그리면서, 상원은 꿀꺽 침을 삼켰다.
10년 하고도 더 오래전 그날.
상원이 아버지와 누나를 버리고 새하늘교를 탈출하던 날.
누나가 갇힌 <하늘방>을 뒤로 하고 달려 나왔던 그 여름밤의 길이었다.
"오랜만이야."
누군가 등 뒤에서 상원을 불렀다.
상원은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총총한 별빛 아래, 돌아다니는 반딧불 곁에, 그녀가 있었다.
단정한 머리칼과 맑은 눈,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
조상은이었다.
미치지 않은 누나가 거기 있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어머니가 자살했다.
그 충격 때문이었을까, 누나는 미쳐버렸다.
아버지가 상원과 상은을 데리고 새하늘교에 귀의한 뒤로 10년, 상원은 상은과 같은 방에 갇혀 있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누나라 해도, 말도 통하지 않고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사람과 10년 동안 한 방을 쓰는 건 끔찍한 고역이었다.
그 10년 동안 상원은 상은을 그리워했다.
옆에 있는 누나가 아니라, 미치지 않는 누나를.
17세의 조상은, 그렇게 그리워했던 누나가 거기 있었다.
"누나."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건 그의 누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하지만 부를 수밖에 없었다.
상은이 웃으면서 상원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상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엄마를 닮은 상은은 아빠를 닮은 상원보다 키가 훨씬 컸다.
그래서 상원은 알았다.
지금 자기는 2미터를 훌쩍 넘는 신화의 몸을 둘러쓰고 있지 않다는 걸.
왜소하고 음침한 불신자 조상원의 몸으로 돌아왔다는 걸.
뚝.
눈물 한 방울이 상원의 볼을 타고 흘렀다.
"왜 울고 그래?"
상은이 부드럽게 웃었다.
"울지 마, 상원아."
그녀가 상원의 눈물을 닦았다.
"아아."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누나가 아니라는 걸.
하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심장은 쿵쾅댔고 손발이 떨렸다.
상은이 두 팔을 벌려 상원의 어깨를 감싸려 했다.
'안된다.'
상원은 거세게 상은을 밀쳐냈다.
주춤, 상은이 물러났다.
"왜 그래?"
상원이 상은을 노려보았다.
불신자 조상원, 그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넌."
까드득, 상원이 이를 갈았다.
"누나가 아니야."
여름밤의 어둠 속에서 상은의 껑충한 실루엣이 휘청거렸다.
"상원아... 그게 무슨?"
"누나는 죽었어."
상원이 나직하게 말했다.
"누나는, 죽었어."
상원은 그 광경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래, 봤지. 너는 봤어."
상은이 씹어뱉듯 말했다.
그녀의 눈이 노래졌다.
그 눈 가운데 날카로운 눈동자가 또렷했다.
휘익
더운 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우수수 소리를 냈다.
'아, 기억났다.'
그제야 상원은 깨달았다.
이 날은 상원이 탈출하던 날이 아니었다.
상원이 다시 하늘방에 돌아왔던 그 날이었다.
"지하의 수호자!"
상원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순간 풍경이 바뀌었다.
* * *
10몇 년 전 그 날 새하늘교를 탈출하고 나서, 상원은 하늘방을 다시 찾아간 적이 있었다.
지역 신문 귀퉁이에서인가 작은 기사를 본 후의 일이었다.
'지역 신문이 맞기는 했던가?'
상원은 흘끗 본 것이라도 잊어버리지 않는 암기 천재였지만, 그 사건을 어디서 본 것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새하늘교 집단 자살 사건.
한 날 한 시에 한 곳에서 사이비 종교의 신도 47명이 죽었다.
어느 매체라도 특종으로 대서특필 할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상원이 그 기사를 보았던 곳을 제외하고는 어느 매체도 이 사건을 다루지 않았다.
마치 그 사건을 상원에게만 알리려고 했던 것처럼.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하지만 상원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몇십 년간 사람의 손길이라고는 닿지 않은 것 같은 울창한 숲속 공터에 서 있는 낡은 예배당에.
상원이 가족을 버리고 탈출했던 하늘방에.
오랜 세월에 지나, 상원은 다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수많은 반딧불이 비추고 있는 낡은 예배당 앞에.
10몇년 전 그날과 똑같았다.
끝없는 지하의 주인, 마신 지하의 수호자가 그 날의 기억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면 안되는데.'
상원은 생각했다.
하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홀린 듯 상원은 문으로 다가갔다.
쥐 몇 마리가 찍찍 소리를 내며 풀숲으로 사라졌다.
낡은 예배당 문의 손잡이엔 거미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상원은 예배당 문을 열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형언할 수 없는 악취가 훅 풍겨왔다.
"욱."
구역질이 올라왔다.
상원은 코를 막고 예배당 안을 보았다.
커다란 예배당 안으로 달빛이 치밀어왔다.
조명 하나 없는 산 속인데도 방 안은 어찌 그리 밝은지 모를 일이었다.
그 방 안에서 수많은 형체들이 대들보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집단 자살한 신도들의 시체였다.
그들의 얼굴은 고통에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떨리는 다리를 애써 주체하며 상원은 방 안으로 걸어갔다.
시체들은 문 쪽으로부터 반대편을 향하는 삼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문에서 멀어질수록 삼각형은 좁아졌다.
문에서 반대편 삼각형의 꼭짓점에 매달린 시체는 상원이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사업 실패, 아내의 자살, 딸의 실성, 그리고 아들의 탈출.
모든 것을 잃고 무너져버린 남자.
어디에도 기댈 수 없었던, 있는 거라곤 자존심뿐이었던 무능력한 가장.
말도 안 되는 사이비 종교에 모든 것을 의탁하고 평안을 찾은 사람.
상원의 아버지였다.
그의 오른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상원은 고개를 돌렸다.
시체들이 이룬 삼각형의 꼭짓점이 향하는 곳, 그곳에는 상원이 버린 그의 혈육이 있었다.
반듯하게 누운 조상은, 그녀의 심장에 피 묻은 단검이 꽂혀 있었다.
아버지의 손에 묻은 피는 누나의 피일 것이다.
아버지의 손에 목숨을 잃은 상은은,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새하늘교의 신도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상원은 그들이 죽은 이유를 알았다.
상원과 상은 없이 승천 시험을 통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승천 시험에 들어 좀비가 되느니 마인이 되느니 하는 끔찍한 꼴을 겪느니 스스로 죽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10년 동안 상원의 이웃이자 친구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모두 죽어버린 것이다.
상원이 탈출해서.
그래서 상원은 10년 후 승천 시험이 현실이 됐을 때, 속죄하기 위해 시험에 매달린 것이다.
하지만 50번째 시험까지를 겪고 회귀한 상원은, 지하의 수호자가 보여주는 그 날의 풍경 앞에서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은."
상원이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 역시 고통에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상원은 알았다.
그의 아버지는 끝까지 비겁하게 도망쳤다는 걸.
"당신은 그렇게 죽으면 안 되지."
10년 전 여기 왔을 때는 하지 못한 말을 상원은 내뱉었다.
"당신들도."
상원이 다른 시체들을 보면서 말했다.
"남자애 하나가 탈출했다고 집단 자살할 거였어? 그게 당신들의 신앙이었나?"
상원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시체들은 아무 말 없이 흔들거릴 뿐이었다.
그때였다.
"원망스럽니?"
상원은 고개를 돌렸다.
상은이 서 있었다.
상원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제정신을 찾은 스물일곱 살의 조상은이었다.
단검이 뽑힌 가슴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다.
상은이, 아니, 지하의 수호자가 상원에게 다가왔다.
다가올수록 그녀의 모습이 바뀌었다.
샛노란 눈,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 뱀처럼 구불거리는 머리카락, 세 갈래로 갈라진 혓바닥.
인간이라고 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잊어버려 상원아."
그런데 그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오래전 누나에게서 느꼈던 따뜻한 정감이 느껴졌다.
딱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대들보에 매달려 있던 시체들이 한순간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새파란 달빛이 비추는 예배당 안에, 상원과 그녀 단둘이 있었다.
"그냥, 여기서 나랑 있자."
그녀가 상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새까만 손톱이 상원의 볼에 닿았다.
그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상원은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그동안 고생했어. 이제 여기서 편하게 쉬어."
하지만 상원은 알고 있었다.
이 시험에 그런 따뜻함 같은 건 없다는 걸.
"지하의 수호자."
상원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알고 있잖아."
그 목소리에서 아주 오래된 고목 나무 같은 피로감이 묻어 나왔다.
"이 시험에, 안식 같은 건 없어."
툭
그녀의 머리가 한 움큼 바닥에 떨어졌다가 뱀으로 변해 구불구불 사라졌다.
"안식에 이르는 길은 단 하나, 승천뿐이야."
상원의 말에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어딘가 슬퍼 보이기도 했다.
"불신자."
여러 개의 목소리가 겹쳐서 울렸다.
"알고 있나? 넌 승천할 수 없어."
상원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니. 할 수 있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모르는구나."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신들이 군림하는 세상에서, 불신자란 어떤 존재인지."
그 말에 상원이 눈을 감았다.
저 말을 진작 들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어차피 승천하지 못하는 자신이 50번 시험까지 가는 일은 없었겠지.
'아니다, 그게 아니다.'
상원은 고개를 저었다.
50번째 시험까지 갔기에 신격을 나누어 받아야만 승천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수호 계약을 맺지 못하는 자신은 일곱 별의 왕관을 얻어야만 승천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지하의 수호자."
상원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고마웠다. 잠깐이라도, 누나 얼굴을 보여줘서."
진심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상원은 돌아섰다.
"여기 오는 일은 다시는 없을 거다."
다시 나타난 시체들이 대들보를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시체들을 해치면서 상원은 문을 향해 나아갔다.
"넌 아무것도 몰라!"
그녀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지쳤다.'
상원은 생각했다.
여기 남아서 추억을 곱씹으며 침전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원은 뼛속 깊이 알고 있었다.
승천 시험의 진정한 안식은 오로지 승천뿐이라는 걸.
"후우."
깊은 숨을 들이쉬면서 상원은 마음을 다잡았다.
삐걱
상원은 문을 열었다.
성화가 내뿜는 분홍빛 열기가 상원을 감쌌다.
* * *
상원은 눈을 떴다.
"여긴."
상원이 몸을 일으켰다.
서울역의 거대한 성화가 따스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수많은 수험자들이 상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원씨."
"기다리고 있었어요."
"무사하셨네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상원을 반기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상원을 반긴 적이 있었던가.
상원은 생각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