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요새의 수호자 (4)
"카하하하핫!"
오상형이 미친 듯 웃고 있었다.
그의 눈은 눈동자가 사라져 완전히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피부엔 온통 검은 격자가 생겨 뱀 비늘처럼 되어 있었다.
저건 더 이상 '오상형'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의 수호신 <기어다니는 거수> 그 자체였다.
오상형이 아무리 많은 수험자들을 잡아먹고 강해졌다 해도 지금은 고작 5번 시험.
이 타이밍에 저 정도의 강신을 견디는 수험자가 있을 리 없다.
강신이 끝나면 오상형은 강신의 반발력으로 엄청난 상처를 입을 것이다.
3번 시험에서 윤진아가 검은 뱀 기사단을 상대하고 난 후 그랬던 것처럼.
설령 오상형이 이 차원에서 살아서 나간다 해도, 오상형의 심신은 멀쩡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정도면 시험 세 개는 그대로 건너뛰어야 한다.
'그것도 여기서 살아서 나갔을 때 얘기지.'
집행사 <엘가>가 천명했다.
여기서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집행사가 살려 보내기엔 오상형은 지나치게 강해졌다.
집행사에게 지금은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눈엣가시 둘을 한꺼번에 보내버릴.
"죽어...! 죽어라!"
오상형이 네 갈래로 갈라진 새까만 혀를 날름거렸다.
땅을 뒤흔드는 진동이 점점 강해졌다.
마치 천지가 울리는 것 같았다.
"꺄아아아악!"
"으... 이게 무슨...."
수험자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으우우우우우!"
"크아아아악!"
수험자들뿐만이 아니었다.
늪지 늑대인간들과 바늘 구렁이들도 울부짖고 꿈틀대고 자해했다.
미친 것처럼.
"이... 이런! 그게 무슨!"
백문혁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상원을 제외하면 지금 이 차원에서 가장 침착한 사람.
그의 수호신, 천재적인 군신 <해안선의 귀신>이 화신에게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승천자 <기어다니는 거수>가 드디어 미쳐버렸다고.
단지 이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자기 화신을 버려가면서까지 이 차원의 경계를 허물어버렸다고.
문혁의 눈빛에서 상원은 그걸 읽을 수 있었다.
집행사가 꾸민 그대로였다.
이 차원에 결계를 친 기어다니는 거수가 힘을 쓰고, 동시에 이 타이밍에 나타나면 안 되는 마물이 소환된다.
그걸 인과관계로 보이게 하는 것, 그게 집행사의 노림수였다.
해안선의 귀신같은 승천자의 눈에도 그렇게 보일 정도면, 다른 승천자들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완전한 오해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설명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규격 외의 존재가 이 차원에 강림하고 있었으니까.
우우우우우-.
수천 대의 관악기가 우는 것 같은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으으으윽."
"끄아아아아악!
수험자들이 무릎을 꿇었다.
개중에는 거품을 물고 땅을 뒹구는 자도 있었다.
드드드드드!
엄청난 진동이었다.
차원 자체가 깨져나가는 것 같은.
그리고 마침내, 엘가가 불러온 규격 외의 존재가 광대한 마법진으로부터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우우욱! 우웨에에엑!"
어떤 자들은 먹은 걸 모조리 쏟아내고 있었고,
"으으으... 으히히히힛!"
또 누구는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미친 듯 웃었다.
지금 이 차원에 오는 것은 그 존재만으로도 이런 혼란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끄하하하하핫! 죽어! 죽어!"
이제는 인간의 모습을 벗어나 버린 오상형, 아니 기어다니는 거수가 하늘을 향해 광소를 쏟아냈다.
심지어 기어다니는 거수 자신조차도, 저 존재를 본인이 불러왔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완벽한 함정이었다.
'대단하군, 엘가.'
그리고 상원은 큰 숨을 들이쉬었다.
마법진으로부터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맨 처음 나타난 것은 거대한 망루(望樓)였다.
짙은 회색 돌로 된 망루는 수천수만 년 세월도 끄떡없이 견뎌낼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망루의 좌우로 긴 성벽이 솟아났다.
"만리장성...?"
누군가의 말마따나, 그것이 강림하는 모습은 맨땅에서 만리장성이 솟아오르는 걸 연상케 했다.
세 개의 망루,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널따랗고 견고한 성벽.
그리고 그 성벽을 떠받치고 있는 강대한 어깨.
"아...."
"저런... 저런 게 있다고?"
수험자들이 아연실색해서 말했다.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 수험자들이 겪은 마물이라곤 끽해봐야 3급인 성성이와 하늘악어 뿐이다.
2급 마물도 일대일로는 이길 수 없는 지금 수험자들에게 3급은 그야말로 규격 외의 존재.
그런 그들에게 저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우우우우-."
수천 대의 관악기들이 우는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몸통이 굽은 탓에 목과 승모근이 나타난 후에 머리와 팔뚝이 동시에 나타났다.
무시무시한 근육질 어깨 아래로 건물 같은 팔뚝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황소처럼 생긴 머리가 달려 있었다.
샛노란 눈 안에 붉은 불길이 이글거렸고, 해골처럼 생긴 이빨이 금속질로 빛났다.
온몸을 뒤덮은 새까만 비늘은 그 어떤 무기라도 튕겨낼 것 같았다.
성곽을 어깨에 얹은 미노타우로스가 땅바닥으로부터 명치까지 솟아오른 모습이었다.
'미친... 지금 저걸 여기 불렀다고?'
상원은 직감했다.
엘가가 반드시 자기를 끝장낼 생각이라는 걸.
"으으으... 살려줘... 살려주세요."
"끄아아악! 끄아아아악!"
제정신을 잃어버린 수험자들과 마물들이 미친 듯 날뛰었다.
제단보다도 훨씬 거대한 산과도 같은 존재.
후반의 수험자들도 쩔쩔매는 괴물.
엘가가 여기에 부른 존재는 바로, 5급 마물 <요새의 수호자>였다.
"젠장."
까드득, 상원이 이를 갈았다.
상원은 바로 문혁에게 뛰어갔다.
넋을 잃은 문혁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지금 타이밍에 5급 마물은 그 존재만으로도 수험자들을 미치게 할 수 있었다.
문혁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문혁씨!"
상원이 고함을 질렀지만, 문혁은 여전히 눈이 풀린 채로 멍하게 있었다.
짝!
상원은 문혁의 따귀를 때렸다.
정신이 든 것인지, 문혁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사... 상원씨?"
"문혁씨! 잘 들으세요! 지금 서울역의 수험자들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문혁 씨밖에 없습니다!"
그 말에 문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 요법에 들어갑니다. 제가 주의를 환기 시킬 테니까, 수험자들이 정신을 차리면 이 사람들 데리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여기서 나가세요. 알겠죠? 어떤 수를 써서든 여기서 탈출해야 됩니다!"
"아... 알겠습니다."
수많은 사선을 건너온 경험이 힘을 발휘했을까, 문혁은 순식간에 정신을 찾았다.
상원은 강한 눈빛을 문혁에게 보내고 주지사의 샷건을 뽑아 들었다.
쾅!
천둥 같은 총성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쾅! 쾅!
상원은 샷건을 난사했다.
무시무시한 반동에 손아귀가 뭉개질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서울역의 수험자들을 최대한 살리려면, 그래서 일곱 별의 왕관을 얻으려면 이 방법뿐이었다.
그 엄청난 소음에 수험자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어...?"
"이... 이런."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문혁씨!"
상원이 외쳤다.
"흐으읍."
문혁이 큰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가슴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의 눈동자가 옅어졌다.
그의 두 콧구멍에서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마법진으로부터 불어오는 돌풍에 그의 옷자락이 휘날렸다.
백문혁은 트랜스에 접어들고 있었다.
탈락을 감수하고, <해안선의 귀신>이 그의 화신에게 깃들고 있었다.
"전군!"
그 한 마디에 서울역의 모든 수험자들이 문혁을 돌아보았다.
수험자들의 눈동자에 경외심이 감돌고 있었다.
"후퇴하라!"
절규와 함께, 문혁이 왈칵 피를 토했다.
"으... 으으...."
"으아아아!"
문혁의 한 마디에 서울역의 수험자들이 줄행랑을 쳤다.
신속하게, 그런 동시에 질서정연하게.
이 혼돈에서 수험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건 전적으로 해안선의 귀신 덕분이었다.
불세출의 군신 해안선의 귀신이 그 성스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것이 그의 성현, <사즉필생의 지휘>였다.
별운검을 뽑아든 문혁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 해 강신을 버티고 있는 것이다.
'과연!'
상원은 감탄했다.
패닉에 빠진 수험자 수백 명을 지휘하는 건 해안선의 귀신이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강림을 버티는 건 백문혁이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일을 해야지.'
서울역의 다른 수험자들이 퇴장하는 동안, 상원은 요새의 수호자를 상대해야 한다.
상원이 이놈을 붙잡아두지 못하면 서울역의 수험자는 그 누구도 여기서 살아서 나갈 수 없다.
요새의 수호자는 그런 괴물이다.
"후우."
큰 숨을 들이쉬고 상원은 뒤를 돌아보았다.
요새의 수호자, 그 괴물의 거대한 그림자가 제단 위에 드리워졌다.
"넌! 넌 끝이다!"
오상형이 소리쳤다.
오상형은 모른다.
저 괴물은 본인이 소환한 게 아니라는 걸.
"우우우우우우!"
요새의 수호자가 나직이 울었다.
그리고, 그가 휘두른 주먹이 수험자들 위로 떨어졌다.
쾅!
땅이 울렸다.
건물이 무너져서 사람을 덮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요새의 수호자가 휘두른 주먹에 여의도 공원 수험자들 수십 명과 마물 수십 마리가 이 한 번에 절명해버렸다.
"어... 어?"
"뭐야... 같은 편 아니야...?"
당황한 수험자들 위로 다시 한번 주먹이 떨어졌다.
주먹질 단 두 번에 여의도 공원 수험자 대부분이 단명해버렸다.
"으... 으?"
기어다니는 거수가 퍼뜩 정신이 든 것 같았다.
"이... 이게 무슨?"
요새의 수호자를 올려다보며 깨달았을 것이다.
저건 자기가 부른 게 아니라는 걸.
고작 지금의 오상형에게 빙의해서는 저런 걸 부르기는 턱도 없다는 걸.
"으아아아악! 도망쳐! 당장! 도망쳐!"
오상형이 미친 듯 소리를 지르며 서울역 수험자들이 퇴장한 곳 반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여의도 공원으로 이어지는 포탈이 있는 곳이었다.
괴력이 받쳐주어서인지, 달리는 속도는 그 거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상형님! 상형님!"
"같이 갑시다!"
그의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얼마 남지 않은 여의도공원 수험자들이 상형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5번 시험 정도면 능력치에 어느 정도 투자한 후다.
여의도 공원 수험자들은 순식간에 요새의 수호자의 거리 밖으로 벗어났다.
"으... 저놈... 명치까지밖에 안 나왔으니까... 여기까지 못 오겠지."
"제... 젠장! 무슨 저런...!"
멀찌감치 떨어진 수험자들이 외쳤다.
"크... 크! 꼴좋다!"
오상형이 외쳤다.
그때였다.
"우우우우우."
다시 한번 수천 대의 관악기가 울었다.
그리고, 땅바닥으로부터 솟아오른 연녹색 빛이 요새의 수호자의 비늘 사이사이로 흐르며 눈을 향해 모였다
요새의 수호자가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 도망...!"
상형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콰아아아아!
굉음과 함께 요새의 수호자의 눈에서 연녹색 빛줄기가 폭사했다.
빛줄기는 여의도공원 수험자들을 삼켜버리고서도 끝없이 날아갔다.
"으... 으어?"
"아아아아...."
그 공격 한 번에 여의도 공원 수험자들은 모조리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오상형까지도.
서울역의 수험자들이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5급 마물인 요새의 수호자를 6급에게도 비벼볼 수 있게 만든 힘, 스킬 <요새 수호자의 시선>이었다.
"후우."
이제 상원이 나설 차례였다.
"문혁씨! 빨리!"
상원이 절규했다.
"후퇴! 후퇴하라!"
상원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린 문혁이 다시 지휘를 시작했다.
상원은 물러설 수 없었다.
'내가 여기서 물러서면... 일곱 별의 왕관은... 못 얻어! 그럴 순 없다!'
으득!
이를 갈면서, 상원은 샷건을 뽑아 들고 요새의 수호자를 향해 돌진했다.
쾅!
땅바닥에 박힌 주먹을 밟고, 상원의 거구가 팔을 밟고 올라갔다.
윗팔을 지나, 어깨를 딛고, 어깨 위로 솟아오른 성벽을 달려서 상원은 요새 수호자의 거대한 머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쾅!
샷건이 불을 뿜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