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48화 (48/230)

제48화. 요새의 수호자 (1)

상원의 몸이 회전문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한순간 풍경이 바뀌었다.

눈앞에는 퀴퀴한 공기가 가득 찬 동굴 대신 서울역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차가운 겨울 하늘 위로 한낮의 창백한 햇살이 쨍했다.

상원이 들어갈 때만 해도 새벽이었는데, 그새 시간이 많이 지난 것이다.

모방 던전 안에서는 시간이 빨리 흐르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꽤 지났다. 서둘러야겠는데.'

타오르는 성화 주변으로 잠이 든 한창훈과 눈을 멍하게 뜬 박명희를 비롯한 부상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리고 늘어선 다른 차원문들이 마치 은하가 회전하듯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지옥, 연옥, 부서진 광야 그리고 오래된 늪지를 모방한 던전으로 가는 차원문들이었다.

지옥에는 서울역의 성속성 수험자 중 가장 강한 넷을 들여보냈다.

능력치 총합 50인 윤진아가 그들을 이끌었다.

지옥은 넷으로 충분했다.

연옥에는 나머지 성속성 수험자들과 만웅의 패거리가 갔다.

연옥의 불사(不死)들은 성속성 수험자들이 처리할 것이고, 그들을 카운터치는 <검은 뱀 기사단>은 만웅의 패거리가 처리할 것이다.

손발이 조금 안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그 전력이면 5번 시험 모방 던전을 해결하기는 충분하다.

부서진 광야에는 검은 숲의 목자의 화신 송혜경을 보냈다.

검은 숲의 목자는 규격 외의 승천자로, 그 화신에게 끝없는 힘을 주지만 의지와 이성을 빼앗아간다.

상원은 4번 시험 당시 마신 <지하의 수호자>의 힘을 이용해서 검은 숲의 목자와 새하늘 약속을 맺었다.

새하늘 약속에 따라 송혜경은 부서진 광야의 정수인 <광야의 흙먼지>를 가져올 것이다.

상원만큼은 아니지만, 송혜경도 던전을 빠르게 홀로 깰 능력은 된다.

나머지 수험자들은 오래된 늪지로 보냈다.

전력으로 칠 수 있는 수험자들 중 스무 명 남짓의 성속성 능력자들과 만웅의 패거리, 그리고 혜경과 상원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보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원은 오래된 늪지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오래된 늪지의 마물들은 지옥이나 연옥의 마물들처럼 속성을 이용한 카운터를 칠 수 없다.

개다가 그 차원엔 항상 짙은 안개가 머물러있기 때문에 전진도 오래 걸릴 것이다.

서울역의 수험자들은 4번 시험을 무사히 넘겼기에 인원도 많고 서로 감정이 상하지도 않았다.

거기다 개성이 <길잡이>인 원강수가 길을 찾고 <해안선의 귀신>의 화신인 백문혁이 지휘하니 다른 성역에 정수를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기다릴 이유는 없지.'

상원은 브라이싱크론 지갑에서 끝없는 지하의 정수인 지하의 바윗돌을 꺼내 성화 안에 던져 넣었다.

[정수 <지하의 바윗돌>을 바쳤습니다.]

[다섯 개의 정수 중 하나를 모았습니다.]

[다섯 번째 시험이 끝날 때까지 18시간 33분이 남았습니다.]

"좋아."

나직하게 내뱉은 상원이 오래된 늪지로 가는 차원문으로 향했다.

연녹색으로 빛나는 차원문이 회전하는 나선 은하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상원은 차원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파스슥 하는 소리와 함께 상원의 손이 튕겨 나왔다.

그리고 손끝에 저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상원의 손끝에 연녹색 균열이 가 있었다.

"응...?"

다시 한번 손을 대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상원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불신자를 개성으로 가진 조상원은 그 어떤 스킬도 쓰지 못하고 그 누구와도 수호 계약을 맺지 못하는 대신 모든 스킬이 통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 상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이건 스킬이 아니다. 공간 자체가 나를 막고 있는 거야. 이건 차원 결계다.'

상원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5번 시험에서 차원 결계를 쓰는 놈이 있다고...?'

차원 결계는 그 차원의 출입 자체를 통제하는 고급 기술이다.

공간 계열의 최상급 승천자라 해도 5번 시험에서 벌써 차원 결계를 쓰는 건 무리였다.

'어떻게 된 거지. 아니, 아니다. 생각해보자.'

상원이 들어가려는 곳은 평범한 차원이 아니었다.

오로지 5번 시험을 위해 만들어진 모방 던전.

그렇다면 가능성이 하나 더 있다.

'공간 계열 능력으로 차원문을 틀어막은 게 아니라, 이 모방 던전 자체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거라면.'

상원이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래, 그거구나.'

서울 육마귀 중 하나인 하나교주 유성희는 신도들의 스킬을 공유하는 그 사기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미친 듯 성장했다.

그리고 그 능력의 수혜를 받는 건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하나교도들도 서로 스킬을 공유하면서 괴물같이 성장했다.

하나교도들이 많이 모여있는 몇몇 성역에서는 그들이 왕처럼 군림하면서 수험자들을 통제했다.

그런 성역 중 하나가 여의도 광장이었고, 그렇게 통제당했던 수험자 중 하나가 아주 나중에 서울 육마귀로 성장하게 되는, <뱀주인> 오상형이었다.

상원은 잊을 수 없었다.

상원을 쏘아보던 샛노란 눈, 그 한가운데 박힌 날카롭게 찢어진 눈동자를.

'젠장, 유성희를 견제했더니 이젠 오상형이 괴물이 됐구나.'

상원은 짧은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오디나스의 스킬 <원혼 군주의 절규>를 하나교도 박명희에게 들려줌으로써, 상원은 하나교도들을 견제했다.

산송장이 되어 드러누운 박명희와 원래 스킬 말고 다른 스킬은 쓰지 못하게 된 원강수를 통해서 상원은 견제가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하나교도들은 당분간 그들의 스킬을 공유하지 못할 것이고, 심하면 시험 두세 개는 그냥 건너뛰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성역 <여의도 광장>의 수험자들은 자유롭게 성장했을 것이다.

뱀주인 오상형을 포함해서.

'아마 오상형이라면... 거기서 나오는 마물들은 모조리 독식했겠구만. 수험자도 좀 잡아먹었겠네.'

뱀주인 오상형, 그의 수호자는 최상급 신령이자 강력한 뱀신인 <기어다니는 거수>.

<기어다니는 거수> 정도 되는 뱀이라면 같은 뱀신의 영토인 오래된 늪지를 본뜬 모방 던전 정도에는 결계를 칠 수 있다.

"후우."

상원은 기억을 뒤지기 시작했다.

32권의 경전과 198권의 노트, 그 어딘가엔 분명히 기어다니는 거수의 결계를 푸는 방법이 있었다.

상원이 눈을 감자, 그의 눈앞에 끝없이 긴 복도가 펼쳐졌다.

말이 복도였지 천장이 까마득해서 거대한 성당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복도 벽에는 거인들이 드나들 것 같은 아치형 문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수십 개의 방이 늘어선 거대한 복도, 이게 상원이 태어날 때부터 그의 머릿속에 있던 <기억의 궁전>이었다.

저벅 저벅, 상원은 복도를 따라 걸었다.

방 위에는 '수험자', '마물', '스킬'같은 명패들이 걸려 있었다.

상원이 경전과 노트를 읽으면서 정리한 새하늘 시험에 대한 지식들이었다.

걷고 걸어서 상원은 유독 커다란 문 앞에 섰다.

그 문에는 '신령'이라는 명패가 걸려 있었다.

네모난 방 꼭대기까지 솟은 책장엔 책들이 빽빽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상원은 사다리를 가져와 높은 곳에 꽂힌 책 하나를 뽑아냈다.

단단한 녹색 표지에 싸인 책의 제목은 <기어다니는 거수>였다.

상원은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지식들이 선명한 빛을 내며 머릿속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 * *

상원은 눈을 떴다.

연녹색으로 빛나는 차원문이 느리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후우.

상원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커다란 폐에 공기가 차며 튼튼한 성과 같은 갈비뼈를 좌우로 밀어냈다.

숨을 끝까지 들이쉬었을 때, 상원은 배꼽을 당겨 배를 홀쭉하게 짜내며 천천히 진언을 읊었다.

"옴 고시바 사바하."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차원문에서 일렁이는 파문이 뻗어나갔다.

상원이 차원문에 손을 넣었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손이 튕겨 나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앞서 보았던 연녹색 균열이, 이번에는 스멀스멀 팔을 따라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중 결계였다.

'벌써부터 이 정도라니, 오상형이 이놈 처먹기는 많이도 처먹었구나.'

피식, 상원은 웃음을 흘렸다.

상원은 다른 손도 차원문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그쪽 팔에서도 균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균열은 기어다니는 거수의 맹독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균열이 심장에 닿으면, 죽는다.

하지만 상원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결계를 깰 방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숲의 목자를 다스리는 방법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상원은 눈을 감고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그와 함께 두 손의 검지와 중지, 약지와 소지를 붙여서 새의 발과 같은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번개처럼 빠르게 진언을 내뱉었다.

"옴 세레자 루가다 레지아 레이자 옴 페레다."

쩍!

상원의 진언이 끝나자, 차원문 안에서 마치 얼음을 깨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차원문 바깥으로 초록색 조각들이 튕겨져 나왔다.

그 조각들은 마치 뱀의 비늘 같았다.

기어다니는 거수가 친 결계가 깨진 것이다.

'서둘러야겠군.'

오상형이 이 정도로 성장했다면 안에 있는 수험자들의 안위가 위험했다.

아무리 수많은 수험자가 들어갔고 거기다 백문혁이 지휘를 맡는다고 해도, 전장은 상대방의 홈그라운드나 다름없었다.

"간다."

상원은 빛나는 차원문 속으로 몸을 던졌다.

* * *

"세상에... 세상에...."

강수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다른 수험자들의 도움으로 그는 높은 나무 위에 올라왔다.

<훤히 보기> 특성을 가진 그의 눈에 전장의 지독한 참상이 그려졌다.

오래된 늪지의 모방 전장, 지독한 냄새가 나는 진창과 웅덩이로 가득한 늪지 한가운데 짙은 회색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제단이 있었다.

수백 명이 올라가도 충분할 것 같은 그 널따란 제단의 한가운데, 녹색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꽃을 중심으로 수백 명의 수험자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한쪽은 백문혁을 비롯한 서울역의 수험자들, 그리고 다른 한쪽은 성역 여의도 광장의 수험자들과 마물들이었다.

수험자 수는 서울역 쪽이 두 배는 넘었다.

게다가 백문혁의 지휘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늪지 늑대인간과 바늘 구렁이같은 마물들이 여의도 광장쪽을 돕고 있었다.

"저것들이 어떻게 같이 싸우는 거야."

강수가 소름이 오소소 돋은 팔을 문질렀다.

"크아아악!"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 늪지 늑대인간들이 달려들었다.

그 위로 여의도 광장 수험자들의 수많은 스킬과 바늘 구렁이의 바늘이 쏟아졌다.

"막아!"

문혁의 외침과 함께 최전방에 있던 수험자들이 방어 스킬을 전개했다.

티디디딩!

<역장>이며 <바람의 흐름> 같은 스킬들이 전개되자, 날아오던 스킬들이 방향을 잃고 빗나갔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늑대인간들의 발톱과 수험자들의 병장기가 부딪혔다.

"끄아아아악!"

"으으으윽!"

서울역 수험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아이고, 아이고 맙소사."

부상을 입은 수험자들은 후방으로 물러나 오태성의 치료를 받았다.

태성의 손은 미친 듯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청낭의 의선>이 함께하는 그의 실력으로도 메우지 못할 정도로 서울역 수험자들은 밀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반대쪽을 바라보며 강수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양반들 표정은 왜 저래?"

서울역 수험자들을 밀어붙이는 여의도 광장 수험자들의 얼굴에서는 공포가 읽혔다.

그리고 곧, 강수는 그게 왜인지 알 수 있었다.

여의도 수험자들의 진영 한가운데 있는 한 남자만이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껑충한 키에 마른 몸, 그리고 샛노랗게 빛나는 눈을 한 채로 그 남자는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참을 수 없는 오한이 일었다.

"캬아아아아악!"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는 더이상 인간의 소리라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와 함께 마물들의 공격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수험자들의 비명도 잦아졌다.

"아이고... 아이님, 빨리 오셔야 될 것 같어."

강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였다.

쾅!

서울역 수험자들이 왔던 곳, 그 먼 곳에서 천둥 같은 총성이 들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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