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만신전 (5)
짙은 갈색 차원문을 넘어선 곳에는 마신 <지하의 수호자>의 영토 <끝없는 지하>를 본딴 <모방 던전>이 있었다.
승천 시험의 집행국이 마신의 영토를 흉내 내서 만든 공간이었다.
이 차원의 정수가 만신전의 건축재료 중 하나인 <지하의 바윗돌>이다.
상원의 계획은 최대한 빨리 지하의 바윗돌을 얻고 오래된 늪지로 합류하는 것이었다.
냉기가 상원의 온몸을 감쌌다.
상원은 눈을 들어 앞을 보았다.
짙은 어둠이 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한기도 어둠도, 끝없는 지하와 비슷했다.
평범한 수험자들이라면 그 어둠과 한기로부터 턱없는 공포와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회귀 전에 이 차원에 들어왔던 수험자들도 그랬었다.
'그럴싸하긴 하다만.'
하지만, 상원은 모조품이 아닌 진짜 끝없는 지하를 겪었다.
마신이 직접 다스리는 공간에 비하면 이 공간의 어둠과 한기는 어린애 장난이었다.
[스킬 <동굴적 감각>을 발동합니다.]
[어둠 속이 훤히 보입니다.]
2번 시험에서 시청역을 가득 메운 1급 마물 <동굴 개미>들을 사냥하고 얻은 스킬 <동굴적 감각>이 발동했다.
동굴적 감각은 동굴 개미들이 어둠 속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해주는 패시브 스킬이었다.
상원에게도 어둠 속이 훤히 보였다.
상원은 끝도 없이 이어진 동굴 속에 있었다.
똑
높다란 천장에서 뻗어 내려온 종유석을 따라 차갑고 끈적거리는 물방울이 떨어졌다.
끝없이 지하로 내려가는 동굴, 이것은 끝없는 지하의 초입을 본떠 만들어진 공간이다.
"후우."
상원이 긴 숨을 내뱉었다.
긴 입김이 차가운 공간 속으로 흩어졌다.
상원은 두 손을 깍지끼고 앞으로 쭉 뻗었다.
우두둑
손가락의 뼈마디들이 내는 소리가 울렸다.
그때 알림 메세지가 떴다.
[성역 <보라매 공원>의 수험자들이 입장하였습니다.]
5번 시험에서 각 모방 던전의 구조는 이렇다.
만신전의 건축재료인 '차원의 정수'는 모방 던전의 한가운데 있는 제단에 있다.
모방 던전은 제단으로부터 뻗어나가며, 그 끝에 각 성역으로 이어지는 차원문이 있다.
요컨대 5번 시험은 누가 먼저 중앙에 도달하는지를 겨루는 경주 같은 것이다.
'아, 여기로 들어온 게 보라매 공원 사람들이었나.'
상원은 기억을 곱씹어보았다.
성역 <보라매 공원>에는 특기할 만한 전력은 없었다.
'그렇게 서두르지는 않아도 되겠다.'
상원은 제자리에서 뛰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시작하지."
나직하게 내뱉고, 상원은 비호처럼 앞으로 몸을 던졌다.
기기기기긱
곧 커다란 벌레들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큰 개만한 벌레들이 우글거리며 몰려오고 있었다.
시청역 지하를 가득 채웠던 마물들, 1급 마물 <동굴 개미>들이었다.
그 외에도 거미며 지네같은 커다란 독충들도 섞여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모방 던전에 들어온 수험자들은 저 동굴 벌레들과 씨름하면서 전진해야 한다.
5번 시험에 다다른 수험자들에게 1급 마물이 그렇게 어려운 상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 정도 숫자라면 긴장해야 한다.
상원의 경주 상대인 보라매 공원의 수험자들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상원은 벌레들과 씨름할 생각이 없었다.
'이놈들이랑 씨름하는 건 명백한 시간 낭비다.'
상원이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보폭을 넓혀서 도움닫기를 하듯 뛰기 시작했다.
콰직
상원의 튼튼한 다리가 땅을 디딜 때마다 거기 밟힌 벌레들의 껍질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 걸음마다 몇 미터씩 도약하며, 상원은 나는 듯 동굴 안쪽으로 달렸다.
* * *
한참을 달려 상원은 마침내 커다란 방 앞에 다다랐다.
방은 천장이 뻥 뚫려 있어서 마치 우물 구멍을 올려다보는 것 같았다.
끝없는 지하 특유의 끈적끈적해 보이는 싯누런 하늘이 쭉 뻗어 있었다.
방 한가운데는 커다란 제단이 있었다.
널따란 바닥은 동그란 모양으로 볼록 솟아 있었고 벌레의 다리를 닮은 커다란 장식물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마치 말려있는 손아귀 같았다.
저것이 차원의 정수인 <지하의 바윗돌>을 얻을 수 있는 제단이었다.
방의 반대편에 새까만 동굴이 보였다.
보라매 공원의 수험자들이 제단에 다다르는 길이었다.
그 길에서는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상원은 마물들을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며 제단을 향해 질주했다.
반면 보라매 공원의 수험자들은 동굴 벌레들을 하나하나 잡아가며 전진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겨우 10분의 1이나 왔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이건 내가 가져갑니다.'
상원은 제단을 향해 뚜벅 뚜벅 걸어갔다.
그때였다.
"키이이익!"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새까만 그림자들이 바닥에 드리웠다.
상원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날개를 퍼덕거리며 사람을 닮은 형체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오고 있었다.
얼굴과 몸통은 벌거벗은 여성이었지만, 팔 대신 새까만 박쥐 날개가 달려 있었다.
날개 가운데 붙은 엄지발톱은 커다란 갈고리 마냥 흉흉했다.
2번 시험의 지하철에서도 등장했었던 2급 마물 지하 괴조들이었다.
그들의 수가 상당했다.
이 정도면 다섯 번째 시험의 웬만한 성역 하나에 맞먹는 전력이었다.
"어서 와라."
씩 웃으며 상원은 브라이싱크론 지갑에서 커다란 물건을 꺼냈다.
상원의 아래팔보다 조금 더 긴, 새까맣고 묵직한 쇳덩어리였다.
록시에게 구입한 유물급 보구, 웬만한 귀물급보다도 강한 무기인 <주지사의 샷건>.
휘릭
웬만한 수험자들은 두 손으로 들지도 못할 무쇠 덩어리가 상원의 손끝에서 화려하게 회전했다.
그리고 쇄도하는 지하 마녀들을 향해 산탄(散彈)이 쏟아졌다.
쾅!
천둥 소리같은 총성이 울려 퍼졌다.
무지막지한 진동에 손아귀가 뭉개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이딴 걸 무슨 생각으로 만든 거지.'
괴력 60인 상원이 느끼기에도 상당한 반동이었다.
요구 능력치만 해도 괴력 40이다.
유물급의 효용은 시험 초반을 넘기지 못하는데, 시험 초반에 이런 걸 쓸 수 있는 화신이 있을 리 없다.
그 대신 효과는 확실했다.
퍽!
상원에게 날아들던 지하 괴조들이 순식간에 핏덩어리가 되어 공중에 흩어졌다.
5번 시험 같은 초반에 2급 마물들을 한 방에 정리하는 무기는 몇 개 없다.
피묻은 깃털 한 줌이 상원에게 떨어졌다.
"그르륵!"
지하 마녀들이 멈칫했다.
하지만 늦었다.
그들은 이미 샷건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와 있었다.
철컥
상원은 샷건을 휘릭 돌려 다음 탄환을 장전했다.
쾅!
또다시 천둥 같은 총성이 울렸다.
지하 마녀 또 한 무리가 핏덩이가 되어 흩어졌다.
그들의 모습은 인간을 닮았다.
인간을 닮은 생명체를 학살하는 데, 상원은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상원에겐 인간을 닮은 존재들에 대한 연민 같은 건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50개 하고 네 개의 시험을 더 겪으며 그런 감정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쾅! 쾅!
그렇게 몇 번의 총성이 더 울려 퍼졌다.
새까맣게 하늘을 뒤덮던 지하 마녀의 수는 눈에 띄는 속도로 줄어들었다.
빈 자리로 싯누런 하늘이 천천히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 * *
저벅 저벅
널따란 공간 안에 상원의 발소리가 울렸다.
지하 괴조들의 피가 바닥에 가득 고여 있었고 그 위로 부서진 살점과 깃털 뭉치가 널려 있었다.
상원은 그 위를 천천히 나아갔다.
끈적한 피가 신발 밑창에 달라붙었다.
제단을 지키는 수십 마리 지하 괴조들을 모두 해치우도록, 보라매 공원으로 가는 통로는 여전히 잠잠했다.
지금쯤이면 5분의 1이나 왔을까.
'다들 헛수고들을 하셨군.'
마침내 상원은 제단 앞에 다다랐다.
벌레 다리처럼 생긴, 3층 건물 높이는 될 듯한 높다란 장식물들이 무릎 높이로 솟은 돌바닥을 둘러싸고 있었다.
둥그런 돌바닥의 넓이는 큰 방 정도 되어 보였고, 그 위에는 복잡한 문양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다.
상원은 돌바닥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돌바닥에 새겨진 문양들이 짙은 누런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바닥으로부터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고,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짙게 느껴졌다.
제단이 차원의 정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원은 천천히 돌바닥 중앙으로 걸어갔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빛줄기는 이제 상원의 허리 높이까지 치솟았다.
상원이 마침내 제단 중앙에 다다랐다.
쩌저저적!
굉음과 함께 커다란 균열이 제단의 중앙으로부터 바깥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거세게 울리기 시작했다.
제단으로부터 뻗어나간 균열이 동굴 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제단이 완전히 무너졌다.
장식물의 부서진 파편들이 쾅쾅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상원은 가볍게 몸을 날려 파편을 피했다.
짙은 먼지 바람이 방을 뒤덮었다.
먼지 바람이 걷혔을 때, 균열이 시작된 제단의 중앙에 낯선 물건이 나타났다.
투박해 보이는 커다란 바윗돌이었다.
짙은 진흙 색깔의 바윗돌엔, 짙은 누런색 결정들이 박혀 있어 마치 다듬지 않은 보석 원석처럼 보였다.
그것이 바로 모방 던전의 정수, <지하의 바윗돌>이었다.
[성역 <서울역>의 수험자 <조상원>이 차원의 정수를 획득하였습니다.]
바윗돌에 손을 대자 시스템 메세지가 떴다.
이렇게 상원은 5번 시험의 첫 번째 목표를 달성했다.
지금 이 던전에 들어온 상원의 상대방, 보라매 공원의 수험자들은 고작 상대방 수험자 하나가 이토록 짧은 시간에 차원의 정수를 얻어갔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고생하시오."
그들은 듣지 못할 말을 상원은 나직이 뱉었다.
쉬웠다.
회귀 전 <부서진 광야>의 모방 던전에서 정수를 얻기 위해 <사당역 사거리>의 수험자들을 상대했던 때에 비하면, 정말 너무나도 쉬웠다.
상원이 바윗돌에 브라이싱크론 지갑을 대자 바윗돌이 지갑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사실은 이 바윗돌을 옮기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브라이싱크론 지갑이 있는 상원에겐 쉬운 일이었다.
아공간으로 가는 통로인 이 지갑은, 성전 상인 록시와 전속 계약을 맺은 투자자만이 살 수 있다.
보통 수험자나 심지어는 웬만한 승천자들도 이 지갑의 존재조차 모른다.
새하늘교에 있으면서 속속들이 외운 경전 32권과 198권의 노트, 그렇게 얻은 지식 자체가 상원의 무기였다.
게다가 한 번 회귀하면서 얻은 경험과 여러 가지 사기적인 성능이 담긴 신화의 몸까지.
지금의 상원은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다섯 번째 시험에서 차원의 정수 네 개를 더 모아서, 완벽한 만신전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지 두 번째 별을 얻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진다.
일곱 별의 왕관이란 그런 것이다.
상원의 후견자인 기계장치의 신이 권좌를 얻기 위한 방법, 그리고 불신자 조상원이 승천해서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이렇게 격이 다른 존재가 되어야만, 그리고 섬세한 계획들이 모두 맞아들어가고 운까지 따라야만 그나마 얻을 꿈이라도 꿀 수 있는 것.
정수를 하나라도 얻지 못한다면 승천은 물 건너가는 것이다.
상원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성역 <서울역>으로 이어진 길을 빠르게 되돌아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