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만신전 (4)
"여러분들께서 들으신 대로 조금 있으면 다섯 차원으로 이어지는 각각의 차원문이 성화 옆에 열릴 겁니다."
그러면서 상원은 회귀 전에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다섯 개의 차원은 다섯 마신의 영역을 본뜬 던전이다.
<세상 끝의 마신>의 영토 <지옥>
<잠들지 않는 폭군>의 영토 <연옥>
<지하의 수호자>의 영토 <끝없는 지하>
<태초의 대족장>의 영토 <부서진 광야>
그리고 <오랜 땅의 이무기>의 영토 <오래된 늪지>.
각각의 영토를 본뜬 던전들로 이어지는 다섯 차원문이 성화 둘레에 나타났었다.
"우리는 다섯 조로 나눠서 각 던전에 들어갈 겁니다."
상원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한 번에 들어가면 안되나요?"
누군가 손을 들고 물었다.
"안됩니다."
상원이 대답했다.
"여러분들께서 알지 못하시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상원을 바라보는 수험자들의 눈에 궁금증이 어렸다.
"차원문들에는 여러분들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성역들, 그러니까 성역 <사당역 사거리>나 <여의도 광장>에 있는 수험자들도 차원문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차원에는 정수가 하나뿐이죠."
그 말에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성역에 있는 수험자들과 경쟁해야 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성역은 다른 성역들에 비하면 사정이 나을 테니까요. 다른 성역들은 3번과 4번 시험을 치르면서 결딴났을 겁니다."
상원이 성역 <서울역>의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고, 그리고 수험자들의 단합을 유지한 채로 4번 시험을 깬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서울역의 모든 수험자들을 다섯 차원에 동시에 투입해서 정수 다섯 개를 모두 모으는 것.
더구나 그 정수들을 놓고 다른 성역의 수험자들과도 경쟁해야 하니, 가급적이면 서울역의 모든 수험자들을 살리고 단합도 유지해야 했던 것이다.
"할 수 있습니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다섯 개의 빛기둥이 땅을 향해 내리꽂혔다.
지옥을 상징하는 짙은 회색.
연옥을 상징하는 검푸른색.
끝없는 지하를 상징하는 갈색.
부서진 광야를 상징하는 상아색,
그리고 오래된 늪지를 상징하는 연녹색.
"우와."
"아아...."
수험자들이 빛줄기를 바라보며 경탄의 소리를 질렀다.
몇십 초간 하늘에서 내리꽂히던 빛이 사라지자, 각각의 빛줄기와 같은 색깔의 차원문이 나타났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빛덩어리가 천천히 소용돌이쳤다.
"와... 저게 차원문이군요."
"신기하네요."
수험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 그러고 보니까 이 사람들 차원문 들어가는 거 처음인가?'
새하늘교의 경전과 노트를 읽으면서 차원문에 대한 내용은 수백 번도 더 읽었다.
[곧 하늘로부터 무지개같은 빛줄기가 내리매 가라앉은 이들과 저주받은 이들의 땅으로 가는 길이 열리더라.]
차원문에 대한 구절, 암기 천재 조상원은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읽는 것과 보는 것은 달랐다.
'나도 차원문 처음 봤을 때는 저렇게 반응했었던 것 같군.'
예전 일이 생각나서 상원이 살짝 웃었다.
"자, 여러분 여기를 보십시오. 조를 나누겠습니다."
상원의 말에 수험자들이 다시 고개를 돌려 상원을 보았다.
"우선 공격범위에 따라서 조를 나누겠습니다. 원거리 공격은 제 오른쪽으로, 근거리 공격은 제 왼쪽으로 나눠서 서주세요. 공격 특기가 아닌 분들은 성화 곁으로 서주십시오."
그러자 수험자들이 자연스럽게 셋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각 차원문에 들어갈 대장을 뽑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저를 대신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 분들을 믿고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요~."
상원의 말에 수험자들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를 대장으로 지정하는데도 수험자들이 동의한다는 건, 상원이 그들에게 그만큼 신뢰를 쌓았다는 증거였다.
상원이 호언장담한 대로 아무도 죽지 않고 4번 시험을 깨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상원은 세웠던 작전대로 수험자들을 배분하기 시작했다.
"성(聖)속성 수험자분들은 따로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각 집단에서 몇몇 수험자들이 앞으로 나섰다.
모두 합치니 그 수가 스물에 가까웠다.
'아... 서울역에 성속성이 이렇게 많았군.'
회귀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시험을 거치면서 서울역의 수험자들 중 반 정도가 죽었다.
성속성 수험자들도 대부분 그때 휩쓸려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스무 명 가까이 살아있었다.
'좋아, 이 정도면 아주 든든한 전력이다.'
상원은 고압적으로 명령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수험자들은 상원을 믿고 따른다 해도 그들의 수호신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상원은 원거리 집단에서 나온 성속성 수험자 넷을 지목했다.
원거리 성속성 집단 중 가장 강해보이는 사람들이었고, 그 넷과 나머지의 격차는 현격해보였다.
50번째 시험까지 겪었던 눈썰미만으로도 상원은 가장 강한 이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진아가 끼어 있었다.
“이 네 분은 <지옥>으로 갑니다. 지옥의 마물들은 성속성에 쥐약입니다. 네 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상원은 진아를 가리켰다.
"지옥으로 갈 네 분은 진아씨가 이끕니다."
"네. 알겠어요."
네 수험자들 중 진아가 가장 강하고, 수호신의 격도 진아의 수호신 <낙원의 수문장>이 가장 높아 보였다.
까탈스러운 성령들이라도 낙원의 수문장의 지휘는 달갑게 받을 것이다.
다른 세 수험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성속성 수험자 분들은 연옥으로 갑니다. 그리고 만웅아."
"예 형님."
만웅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너도 동생들이랑 같이 연옥으로 가라. 웬만한 불사(不死) 마물들은 성속성 수험자들이 처리할거다만, <검은 뱀 기사단>은 너랑 동생들이 처리해야 된다."
"알겠습니다."
만웅이 코를 슥 문질렀다.
"예 형님."
만웅의 뒤에 늘어선 패거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연옥 조는 김만웅씨가 지휘하겠습니다."
진아 때와는 달리 성속성 수험자들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그들 중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는 자는 없었다.
"연옥에 들어가서 마음껏 사냥하십시오. 하지만 검은 뱀 기사단이 나타나면, 그땐 김만웅씨의 지휘를 받으십시오."
격이 높은 성령들이라면 길거리 출신인 만웅의 지휘에 반발했을 것이다.
그것까지 고려해서 상원은 가장 강한 성속성 수험자 넷을 지옥조로 빼버렸다.
"그리고 다음."
상원은 무리 분류에 참여하지 않은 수험자들을 바라보았다.
한창훈과 박명희를 비롯해서 부상이 심한 수험자들이 성화 곁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한창훈의 옆에 앉은 송혜경이 상원을 향해 이를 드러내보였다.
"검은 숲의 목자."
"크르릉!"
혜경의 눈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새하늘 약속>을 발동한다."
상원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상원의 손바닥에 찍힌 인장과 혜경의 목덜미에 찍힌 인장이 파란 빛을 내며 빛나기 시작했다.
승천 시험의 규칙이 두 수험자에게 새하늘 약속의 이행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불신자... 네놈...."
검은 숲의 목자가 씌인 혜경이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검은 숲의 목자! 새하늘 약속을 이행하라. 부서진 광야에 들어가서 차원의 정수를 가져와."
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크아아악!"
혜경이 이를 드러내자, 그녀의 주변에서 파란 불꽃과 스파크가 튀었다.
잠시 저항하던 그녀는 곧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불신자... 너.... 언젠간 반드시 네놈 목을 꺾어버리겠어."
"아이고 무서워라."
상원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상원씨."
걱정스런 눈으로 혜경을 바라보던 남편 창훈이 말했다.
"괜찮은 건가요?"
"괜찮습니다. 부서진 광야에서 핵을 가져오는 건 혜경씨 혼자로도 충분합니다."
검은 숲의 목자가 다른 수험자와 보조를 맞추려고 할 리 없다.
오히려 날뛰어서 다른 수험자들을 공격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러면서 상원은 회귀 전 '부서진 광야'에서 맞닥뜨렸던 상대들을 떠올렸다.
그때 상원은 성역 <사당역 사거리>의 수험자들을 상대했었고, 목숨을 건 혈전 끝에 그들을 물리치고 겨우 겨우 차원의 정수를 구했다.
'이번엔 그렇지 않을 거다. 그 전력으로 <검은 숲의 목자>를 상대할 수는 없지.'
상원이 검은 숲의 목자와 새하늘 계약을 맺은 이유가 이것이었다.
부서진 광야의 정수를 가장 안정적으로 구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오래된 늪지>에는 나머지 분들이 모두 들어갑니다. 이 조의 지휘는 백문혁씨가 맡습니다."
그러자 백문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많은 사람을요?"
"할 수 있습니다."
상원이 문혁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특수부대 출신인 문혁은 다른 수험자들과는 달리 전장을 많이 겪어 본 사람이었다.
거기다 그의 수호신 <해안선의 귀신>은 지휘력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 그리고. 원강수씨."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강수가 흠칫 놀라며 상원을 보았다.
"늪지 조의 길잡이는 원강수씨가 맡습니다. 여기 있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길을 잘 찾는 사람입니다."
상원 자신을 제외하고.
"아... 아이고, 그런 큰일을 나한테...."
"길잡이 특성에 멀리 보기 스킬까지 있는 사람보다 길을 잘 찾는 사람이 있을까요?"
상원이 부드럽게 웃었다.
"아... 알겠어. 알겠수다. 흠흠."
강수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분! 걱정 붙들어매쇼! 우리 아이... 아니, 우리 듬직한 대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아주 길 찾는 건 끝내준다니까. 걱정 붙들어 매셔."
상원의 칭찬에 그새 기합이 들어갔는지, 강수가 어깨를 으쓱 하며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어 그런데....."
문혁이 고개를 갸우뚱 했다.
"하나가 남습니다?"
그 말에 수험자들이 웅성웅성했다.
"아. 그렇죠. 하나가 남습니다. <끝없는 지하>."
상원이 지갑에서 <주지사의 샷건>을 꺼내 휘릭 돌렸다.
"거긴 저 혼자 들어갑니다. 금방 찾아서 늪지 조로 합류할 겁니다. 늪지 조는 그렇게 서두르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 말에 수험자들이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상원 씨라면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아."
"빨리 와줘요 대장님."
수험자들의 웃는 표정이 편안했다.
상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올라갔다.
다시, 서울역의 수백 수험자들이 상원을 올려다보았다.
"주어진 시간은 24시간이고, 다른 성지의 수험자들보다 더 빨리 정수를 얻어야 됩니다. 쉬운 일은 아니니 다들 힘내주셔야 합니다. 그렇지만."
상원이 수험자들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죽지 마십시오 여러분. 승천도 살아야 할 수 있는 겁니다."
새하늘교도들을 다시 만난다면 하고 싶었던 그 말을, 상원은 자기도 모르게 서울역의 수험자들에게 하고 있었다.
수험자들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갑시다."
그 말을 남기고, 상원은 날랜 범처럼 짙은 노란색 포탈을 향해 뛰어들었다.
짙은 어둠이 상원을 감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