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만신전 (2)
널따란 천막 안.
상원과 록시가 커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었다.
"이거... 말씀하신 게 이게 맞수?"
록시가 품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 크기 정도 되는 은색 마름모꼴 금속 조각이었다.
상원이 금속 조각 집어 마력을 불어 넣었다.
손등의 표식이 파랗게 빛났다.
그러자 웅-하는 소리를 내며 금속 조각이 둥실 떠올랐다.
"맞습니다."
상원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참."
록시가 이마의 땀을 닦았다.
"저번에 갈퀴 발톱도 그렇고, 지금 만드는 것도 그렇고. 이게... 귀한 재료들 갖다가 생판 처음 보는 물건 만들려니까 참 살 떨립니다."
록시가 한숨을 푹 쉬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래도 사장님 실력이 좋으시니까 제가 믿고 맡깁니다."
상원이 록시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휴... 참, 뭐랄까. 말이 좀 이상하긴 한데, 그래도 끽해야 귀물에서 성물의 경계에 있는 아이템이니까 장사치 나부랭이가 어떻게 만드는 거지. 아시잖수. 상인이 하는 일은 재료랑 아이템을 조달하는 거유. 무두질이나 제작은 전문 장인을 찾아가셔야 돼요. 우리 투자자님 지금 하시는 거 보니까 앞으로 어마어마하고 으리으리한 것들을 요구하실 것 같은데. 내 솔직히 말씀드리리다. 열 번째 시험 가기 전에 무두장이랑 대장장이 찾으셔야 될 거유."
"예,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상원이 대답했다.
"내가 실력 좋은 친구들 알고 있는데, 소개시켜드릴까?"
"아니오, 괜찮습니다."
상원은 따로 염두에 두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실력 좋은 무두장이와 대장장이를 사귀는 것, 그것도 일곱 별의 왕관을 얻기 위한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요? 실력 좋은 친구들인데. 하기사, 우리 투자자님이 뭐 다 계획이 있으시겠지."
록시가 금속 조각을 품에 넣었다.
"그래, 볼일은 더 없으슈?"
"아, 사장님. 필요한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요?"
"저도 이제 무기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오오!"
상원의 말에 록시의 눈이 빛났다.
상원이 말을 마치자마자 록시가 두 손으로 상원의 커다란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상원의 표식이 파랗게 빛났다.
상원의 눈앞에 카탈로그가 떴다.
카탈로그는 [무기] 탭에 맞추어져 있었다.
"잘 생각하셨수다. 우리 투자자님이 무지무지 강한 거 내가 알고 있지만, 무기가 있는 거랑 없는 거랑은 진짜 하늘과 땅 차이요."
[무기] 탭에는 수많은 유물급 아이템이 전시되어 있었다.
승천 시험에서 아이템의 등급은 유물-귀물-성물-신기 순으로 올라간다.
시험 초반인 지금은 카탈로그에 유물급이 대부분인 게 당연하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아이템은 <별운검>이었다.
<해안선의 귀신>을 받은 백문혁이 산 아이템.
가성비가 좋아서 수많은 유물급 아이템들 중에서도 사랑받는 아이템이었다.
상원도 회귀 전에는 별운검으로 초반을 넘겼었다.
그 외에도 <단단한 볼프뵈히르트>니 <백년전쟁의 장궁> 같은 아이템들이 보였다.
다들 초반에 쓰기에는 상당히 좋은 물건이었고 가격도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상원이 찾는 물건은 따로 있었다.
"록시, 다 좋은 물건들입니다만 제가 찾는 건 따로 있네요."
"아 그래요? 뭐... 놀랍지도 않네. 뭐 쓰시게?"
"그거 있지요? <주지사의 샷건>."
그 말에 록시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건 도대체 어떻게 아슈? 진짜 우리 투자자님은 정체가 뭐요?"
"예전에 카탈로그에서 봤습니다."
"그... 래요. 한 번 보슈."
록시가 의자에서 일어나 뒤쪽에 있는 궤짝 더미들을 향했다.
그리고 그 중 한 궤짝에서 크고 검은 쇳덩어리를 꺼냈다.
어찌나 무거운지 쇳덩어리를 든 록시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록시가 쇳덩어리를 내려놓자 쿵 소리가 났고, 상원의 팔에까지 진동이 전해져 왔다.
<주지사의 샷건>.
보통 샷건에서 총열과 개머리판을 잘라낸 이 물건은, 시험 초반에 구할 수 있는 무기 중 가장 강한 무기다.
가격도 그렇게 비싸지 않다.
하지만 아무도 쓰는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잘못 만든 물건이기 때문이다.
상원이 총에 손을 대자 시험의 표식이 파랗게 빛나며 설명창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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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사의 샷건
종류: 무기
등급: 유물
요구 능력치: 괴력 40, 용력 20
가주의 지사가 종결자로서 인류를 위해 싸우던 시절 사용한 샷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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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은 유물이지만 그 위력은 독보적이다.
웬만한 귀물급 아이템보다도 강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성물급에도 비빌 수 있다.
그러나 이 아이템을 아무도 쓰지 않는 이유는 요구 능력치 때문이다.
괴력 40.
괴력 40이면 최상급 화신들도 10번대 후반 시험은 가야 바라볼 수 있는 수치다.
그리고 그정도 까지 가서 굳이 이 물건을 쓸 멍청이는 없다.
이것보다 훨씬 효율적인 아이템이 많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상원은 능력치 창을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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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체 관리 시스템]
접근이 허가된 정보들만 표시됩니다.
레벨 3 (49%)
성능: 괴력 60, 용력 60, 술력 50
스킬: 지하의 문(2), 하늘의 불씨(2), 마력 삼키기, 동굴적 감각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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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력 60에 용력 60이면 이 괴물같은 총을 충분히 다루고도 남는다.
"역시, 멋지군요."
상원이 씩 웃으며 샷건 손잡이를 쥐었다.
샷건은 물리력 120인 상원에게도 묵직하게 느껴졌다.
웬만한 수험자는 두 손으로 들어 올리기도 힘든 총이었다.
상원은 그런 샷건을 한 손으로 휘릭 돌렸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그 광경을 보는 록시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우리 투자자님... 도대체 능력치가 어떻게 되시우?"
수험자의 능력치는 수험자 상호간은 물론 상인도 볼 수 없다.
"이런 거 할 정도는 됩니다."
상원이 록시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 유물급 아이템 <주지사의 샷건>을 구매하였습니다.
시스템 메세지가 떴다.
상원은 샷건을 브라이싱크론 지갑에 집어넣었다.
"고맙습니다 록시."
"아니우. 내가 고맙지 뭘."
"물건은 여섯 번째 시험 전까지 꼭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믿고 맡기슈."
상원은 록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 * *
상원은 계단에 걸쳐 앉아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록시의 커다란 천막 밖으로 수험자들이 쭉 줄을 서 있었다.
'회귀 전보다 많네.'
회귀 전에는 세 번째 시험과 네 번째 시험을 거치면서 수험자 수가 거의 반토막이 났다.
그리고 백문혁이나 오태성같은 거물들도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서울역의 수험자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잘 풀리고 있다.'
상원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앞으로 시험을 해쳐 나가려면 최대한 많은 수험자를 살려두어야 한다.
그때였다.
"불신자 선생, 잘 있었어?"
높고 새된 목소리.
상원에겐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숙여 보니 다람쥐가 고개를 들고 상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등짝에는 커다란 태엽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상원에게 의체(義體) <신화의 몸>을 선물해준 자.
권좌를 노리는 승천자, 기계장치의 신.
이 다람쥐는 승천자 기계장치의 신의 화신이었다.
'도대체 이 작자가 어디서 솟아난 거지?'
상원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새하늘교에서 승천 시험에 대해 배우면서, 상원은 모든 승천자들의 이름과 특징을 외웠다.
그런데 그 목록에 기계장치의 신은 없었다.
"잘 하고 있네."
다람쥐가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 불신자 선생, 지하철로 성성이 잡는 거 보면서 솔직히 보통 아니라고 생각은 했는데. 이야, 오디나스를 쫓아내고 하늘악어까지 때려잡을 줄은 몰랐네. 거기다 아무도 안 죽고 4번 시험 끝낸 건 진짜 대단했다."
다람쥐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어이구, 숨넘어가겠습니다."
"괜찮아 임마."
다람쥐가 조그만 가슴을 잔뜩 부풀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상원은 피식 웃었다.
"어, 웃어? 웃기냐?”
다람쥐가 작은 손을 들어 올렸다.
“아뇨 하나도 안 웃긴데요.”
상원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엥? 에이씨 재미없기는. 여하튼, 우리 불신자 선생 지금까지는 아주 잘해줬는데 말이야. 앞으로는 이거 없으면 힘들 것 같아서.”
그러더니 다람쥐가 배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다람쥐가 원래 배주머니가 있었나?’
상원은 살짝 미간을 구겼다.
"자 이거. 뭔지 기억나지?"
다람쥐가 꺼낸 건 손가락 크기 정도 되는 황금색 열쇠였다.
다람쥐의 말마따나 그건 상원이 아주 잘 아는 물건이었다.
기계장치의 신의 연구실에서 봤던 물건, 상원의 심장에 박힌 <황금시대의 모래시계>를 작동하는 열쇠였다.
"지금까지 쭉 보니까 이제 이거 너한테 맡겨도 될 것 같다. 허투루 쓸 것 같지가 않네."
상원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다람쥐가 쪼로록 달려와 상원의 왼쪽 가슴에 열쇠를 박았다.
그러자 열쇠가 꽂힌 부분에서 황금색 빛이 퍼져 나왔다.
시스템 메세지가 들렸다.
- 수험자 <조상원>에게 <황금시대의 모래시계>에 대한 접근 권한이 부여되었습니다.
- 의체 관리 시스템을 로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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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체 관리 시스템]
접근이 허가된 정보들만 표시됩니다.
레벨 3 (49%)
성능: 괴력 60, 용력 60, 술력 50
스킬: 지하의 문(2), 하늘의 불씨(2), 마력 삼키기, 동굴적 감각 [더보기]
모래시계 충전 시간: 2분 2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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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체 관리 시스템에 표시되는 정보 목록에 '모래시계 충전 시간'이 추가되었다.
"시험 시작한 지가 6일인데... 6일 동안 2분 3초면 그렇게 빠르지는 않네요."
"임마 그거 개조하고 개조하고 해서 겨우 겨우 충전 속도 올린 게 그거야."
"시험 50개를 한 번에 되돌릴 정도면 어느 정도를 충전해놨던 겁니까?"
"그것까진 니가 알 것 없고."
다람쥐가 고개를 저었다.
"알겠지. 무지 무지 모아봐야 몇 분이야. 진짜로 죽기 직전에나 써야된다 이거."
"알다마다요."
상원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어떻게 쓸 생각이냐?"
"꼭 써야 할 데가 생각났습니다."
<황금시대의 모래시계>의 접근 권한이 생기면서, 회귀 가능성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이 능력이 있다면... 그래, 첫 번째 별은 확실히 얻을 수 있겠구나.'
"권좌, 안겨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상원이 씩 웃었다.
"그래, 좋아. 기대하고 있ㅇ... ㄹ... ㄱ."
픽
다람쥐가 쓰러졌다.
다람쥐의 등에 박혀 있던 태엽이 털썩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래, 좋아. 시작해보자."
상원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먼 하늘에서 동이 터왔다.
다섯 번째 시험의 시작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