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43화 (43/230)

제43화. 만신전 (1)

상원과 태성은 성화 곁에 앉아있었다.

상원은 윗옷을 벗은 채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거대한 근육이 도드라졌다.

"어떻게 이런 몸이 있지."

태성이 상원의 맥을 짚고 있었다.

"많은 수험자들의 맥을 짚었지만... 이런 몸은 처음이오. 이건 몸 자체가 사람 몸이 아닌데."

"그렇습니까?"

상원이 물었다.

"네. 일단 맥박이 너무 느린데. 이게 살아있는 사람의 맥박이라니. 놀랄 노자네."

태성이 다른 손으로 상원의 팔뚝을 짚었다.

상원의 부드러운 근육이 탄력적으로 흔들렸다.

"근육이 평소에는 이렇게 부드러운데... 힘 한 번 줘보시겠소?"

상원이 팔에 힘을 주자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이건 돌덩이도 아니고 바위네 바위. 침도 안 들어가겠소."

태성이 손을 뗐다.

"대단하구만. 내가 침질 한 게 50년 하고 5년인데, 이렇게 단련된 육체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해봤어. 도저히 사람이라고 할 수준이 아니야. 젊은이, 원래 뭐하던 사람이오?"

"그냥 공부하던 사람입니다."

상원이 씁쓸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상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상원이 원래 하던 일이 공부다.

다른 사람들이 흔히 하는 공부는 아니었지만.

새하늘교의 암기천재 조상원.

사업 실패, 아내의 자살 그리고 딸의 실성이라는 악재를 연이어 겪은 아버지는 어린 상원을 데리고 사이비 종교 새하늘교에 귀의했다.

그렇게 교단에 갇혀서 경전과 노트를 외우는 생활을 반복했다.

10년을.

"운동 같은 건 따로 안 하셨고?"

"예... 없습니다."

"그렇군. 이것도 수호신과 스킬의 영향인가. 여튼 대단하구려. 이정도면 더 볼 것도 없겠어."

태성이 허허 웃으며 하얀 수염을 쓰다듬었다.

"젊은이 능력치 같은 건 못 보지만... 몸만 봐도 알겠어. 지금 서울역에 있는 사람들 중에선 젊은이가 제일 강하구만. 압도적으로."

태성의 말에 상원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참 대단하긴 하네. 몸 속 구조가 일반인이랑은 완전히 다른데. 근골격계도 그렇고 순환계도 그렇고. 심장은 펌프가 아니라 모래시계 같은데. 도대체 승천자라는 이들의 능력은 그 한계를 모르겠구려."

상원은 태성의 눈썰미에 감탄하고 있었다.

일반인을 치료하는 것과 수험자를 치료하는 건 완전히 다른 영역의 일이다.

수험자에게는 스킬과 수호신의 가호가 있고, 그게 수험자의 몸에도 영향을 미치니까.

더구나 상원의 의체인 신화의 몸은 승천자 기계장치의 신이 권좌에 오르기 위해 평생에 걸쳐 만든 작품이다.

그 몸에는 평범한 심장 대신 신기급 아이템인 <황금시대의 모래시계>가 박혀 있다.

'진맥 한 번에 그 정도로 꿰뚫다니. 오태성, 그리고 <청낭의 의선>... 대단하다.'

사람 몸을 본 게 50년이 넘은 침술가와 청낭의 의선쯤 되는 승천자의 조합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오태성... 4번 시험에서 그런 식으로 떨어지긴 참 아까운 인물이었군. 이정도 치료사라면... 확실한 아군으로 만들어둬야겠는데.'

승천 시험판에서 믿을만한 치료사를 구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 같은 일이다.

수험자들이 결성한 원정대들이 치료사들을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것도 그런 이유다.

"대단해 대단해. 이 정도 몸이면 마물들을 그렇게 쉽게쉽게 때려잡는 것도 이해가 되고. 뭐랄까... 그 자신감도 이해가 되는군."

태성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상원은 태성의 눈동자를 보았다.

많은 세월을 살아오며 켜켜이 주름이 싸인 눈꺼풀 아래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단순히 나이가 많다고 해서 이타심과 희생정신이 생기는 건 아니다.

오태성보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이기적이고 교활한 수험자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어떤 사연이 있겠지.'

상원은 이 늙은 남자의 사연을 들어보기로 했다.

"어르신."

상원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이유로... 희생을 자처하셨습니까?"

상원의 물음에 태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살아있는 게 죄스러워서 그렇소."

성화를 바라보는 태성의 표정이 멍했다.

"하늘에서 사마에트가 처음 내려왔을 때 말이요. 새타니 떼들이 덮쳤을 때... 난 그때 손주 놈이랑 같이 있었다오. 다섯 살 난 코흘리개였지."

꿀꺽, 태성이 침을 삼켰다.

마른 목에 목젖이 도드라졌다.

"그때 내가 있던 데가 명동이었어요. 정신없이 도망쳤지... 정신없이. 정신 차려보니까 세상에, 명동역까지 와있더라고. 그런데... 손주가 없었소."

노인의 늘어진 눈꼬리를 따라 눈물이 한 방울 툭 흘렀다.

"교통사고 나서 하나 있는 아들이랑 며느리 먼저 보내고 손주놈 하나 데리고 살면서 세상에 남은 미련 없다 싶었는데... 그런데."

태성의 젖은 목소리가 흔들렸다.

눈물이 방울방울 흘렀다.

"뭐가 그리 아까운 목숨이라고... 손주놈을 버리고 살아버렸어."

으흐, 하고 늙은 남자가 울었다.

"어르신."

상원이 태성의 두 손을 잡았다.

"그렇게 피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태성의 말을 들으면서 상원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10년 전, 누나와 아버지를 버리고 새하늘교에서 도망쳐 나왔던 그때를.

상원이 도망치지 않았다면, 그래서 집단 승천을 위한 계획이 어그러지지 않았다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새하늘교 집단자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와 누나도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저도 그런 생각을 수없이 해봤습니다만. 저지른 죄가 있다면 떳떳하게... 속죄해야 합니다."

상원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새하늘교에서 도망치고 10년, 상원은 죽지 못해 살았다.

그리고 승천 시험이 현실이 되었을 때 상원은 속죄할 방법을 찾았다.

승천해서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려놓는 것.

"젊은이."

상원의 손을 잡은 태성의 얼굴이 아득해졌다.

상원의 가슴 속 슬픔과 한이 손을 통해 전달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요."

상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손에 살짝 힘을 주었을 뿐.

"승천하십시오... 시험을 마치고 승천하면...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상원의 말에 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 이상해. 젊은이를 보고 있으면 믿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오."

테성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됐다.'

상원은 생각했다.

4번 시험에서 굳이 태성이 나설 때까지 기다렸던 건, 태성으로 하여금 상원에게 신뢰감을 갖게 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앞으로 있을 시험도 잘 부탁드립니다."

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말씀 잘 들었습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눈 밑에 음영이 짙게 드리운 창훈이었다.

얼굴이 말끔해진 진아가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아아, 그 몹쓸병 걸린 환자분이구만. 이리 와서 앉아요 한 번 더 봐드릴게."

창훈의 아내, 혜경의 수호신 <검은 숲의 목자>.

그가 자기 화신을 각성시키기 위해 창훈에게 심어 놓은 씨앗이 창훈을 갉아먹고 있었다.

씨앗이 창훈을 다 갉아먹고 발아하면 혜경이 각성할 것이고, 그러면 상원이 홀로 감당하기는 어려운 변수가 된다.

그래서 상원은 씨앗이 발아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상원은 그 방법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게 13번째 시험까지만 버티면, 검은 숲의 목자는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된다.

'한창훈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느냐... 그게 문젠데.'

상원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창훈이 태성 옆에 앉아 윗도리를 벗었다.

창훈의 윗몸에 온통 검은 핏발이 돋아 있었다.

태성은 창훈의 몸을 짚어보고는 여기저기 침을 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핏발이 눈에 띄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태성은 창훈의 신병(神病)을 다스리고 있었다.

'신병을 가라앉힐 정도의 실력이라니!'

상원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제 4번 시험이 끝났는데 잠깐이나마 신병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면, 최상급 치료사로 거듭나는 것도 가능했다.

'<선서의 이행자>나 <최초의 수확자>도 넘어설 수 있겠다!'

상원은 거대 원정대들이 자랑했던 치료사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태성도 그들 못지않게 성장할 잠재력이 있었다.

그리고 태성이 도와준다면, 창훈을 14번 시험까지 살려두는 일은 수월할 것이다.

"저도 딸을 보냈습니다."

태성이 침을 놓는 동안 창훈이 중얼거렸다.

상원 옆에 앉은 진아가 처연한 얼굴로 창훈을 바라보았다.

"아내는 정신줄을 놓아버렸고...."

창훈이 혜경을 바라보고 말했다.

광인에게만 깃드는 검은 숲의 목자, 그의 화신이 되어버린 아내를.

그녀는 불꽃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승천... 승천하면 모든 걸 돌려놓을 수 있겠지요."

창훈이 고개를 돌려 상원을 보았다.

상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이 많소."

태성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버티는 게 일인데... 어떡하지요? 점점 버티는 게 어려워집니다."

창훈이 힘없이 웃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방법은 언제나 있으니까."

상원이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그때였다.

"불신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혜경이 이를 드러내고 상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검은 숲의 목자가 완전히 씌었는지, 그녀의 눈은 완전히 새까매져 있었다.

검은 숲의 목자, 상원에 대한 그의 증오는 당연했다.

성미 같아서는 벌써 창훈을 잡아먹고 화신을 각성시켜서 마음껏 날뛰었어야 되는데 상원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새하늘에 맹새하는 굴욕까지 겪었다.

"크아아아!"

괴성을 지른 혜경이 순식간에 달려와 상원의 목을 졸랐다.

"언니? 언니!

"여보... 갑자기...."

진아와 창훈의 외침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상원의 목을 조른 그녀의 팔에 검은 털이 부숭부숭했다.

검은 숲의 목자의 화신에게 나타나는 신체 변형 현상이었다.

검은 숲의 목자가 생각보다 빠르게 자기 화신을 잠식하고 있었다.

물리력 120짜리 의체가 얼얼한 아픔을 느낄 정도의 힘이었다.

하지만 상원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식 웃으며, 상원이 물었다.

"검은 숲의 목자. 넌 배우는 것 하나 없을 정도로 멍청한 거냐?"

"크륵?"

검은 숲의 목자가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돌아가서 너와 내가 맺었던 맹약에 대해서 잘 생각해봐라. 오이소프, 르 리기어 이여 니 시응 나사오."

씹어뱉듯 내뱉은 상원이 주문을 읊었다.

새하늘교에 들어갔을 때 처음 배웠던, 검은 숲의 목자를 퇴치하는 주문이었다.

"끄아아악!"

단말마와 함께 검게 물든 그녀의 눈이 다시 하얗게 변했다.

강신(降神)이 해제된 혜경이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 어? 여보. 은수... 은수 깨워야 되는데? 얘가 참,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안 일어나는 거야...."

검은 숲의 목자가 눌러둔 광기가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죽은 딸의 이름을 부르며 중얼거리는 그녀의 입에서 침이 주륵 흘렀다.

"아... 언니."

진아가 울면서 혜경을 꼭 끌어안았다.

아내를 바라보는 창훈의 눈이 처연했다.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창훈씨. 그럼 창훈씨도 아내도... 자유로워질겁니다."

상원이 목을 문지르며 말했다.

"구우우우!"

그때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렸다.

수험자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록시의 커다란 전서구가 하늘에서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곧 다섯 번째 시험이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자... 다들 준비합시다. 다섯 번째 시험은 네 번째 시험처럼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상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쯤이면 그게 풀렸겠네. 지금 상황에선 가성비 최고인 무기.'

사야 할 물건을 염두에 두고, 상원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곧 록시의 전서구가 상원을 향해 날아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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