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희생 제의 (6)
<지하의 문>은 마신 지하의 수호자의 영토, 끝없는 지하와 다른 차원을 잇는 차원문을 여는 스킬이다.
이 스킬은 2급 마물 <지하 괴조>의 스킬로 수험자는 배울 수 없지만 상원은 의체의 힘으로 베껴 쓰고 있었다.
문제는 스킬이 완벽하게 베낀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원문을 정확히 원하는 지점에 열 수 없었다.
차원문이 성화 바로 앞에 열린 건 순전히 운이었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쉬며 상원은 걸음을 재촉했다.
지하의 수호자가 지배하는 공간에 오래 있어서 좋을 게 없었다.
진아가 상원의 손을 꼭 쥐었다.
"상원씨, 상원씨 잠깐만요."
다시 진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상원은 그게 진아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진아는 옆에서 걷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미묘하게 뒤에서 들렸기 때문에.
회귀하면서 승천자 <기계장치의 신>에게 받은 의체(義體) 신화의 몸이 아니었다면 구분할 수 없는 미묘한 차이였다.
'기계장치의 신... 그 영감한테 여러모로 신세 지는구만. 고맙수다.'
상원은 마음속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신화의 몸이 아니었다면, 일곱 별의 왕관을 얻어서 승천하겠다는 무모한 계획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회귀 전에는 아예 생각도 안 했었지. 어쨌든.'
그 너머로 분홍빛 성화가 이글거리는 차원문은 분명 코앞에 있었다.
하지만 걸음을 재촉해도 성화에는 좀처럼 닿지 못했다.
지하의 수호자에게 지배되는 공간이라 거리 감각이 망가진 탓이었다.
'윤진아는 잘하고 있나.'
상원이 옆으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사오니...."
진아는 눈을 감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 분홍 오오라가 맴돌았다.
승천자 <낙원의 수문장>이 그녀를 지켜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의리는 참, 대단하다. 이 정도면 금방 넘어가지는 않겠다.'
진아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상원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였다.
"상원아."
"!!"
잊을 수 없는, 잊으면 안되는 목소리가 들렸다.
상원이 진 원죄의 시작, 상원의 트라우마의 중심, 죽음으로부터 돌아와 일곱 별의 왕관을 얻으면서까지 상원이 승천해야만 하는 이유.
그의 누나 조상은.
"상원아."
으드득, 상원이 이를 갈았다.
'젠장, 여기서 이렇게 나오다니.'
상원의 걸음이 빨라졌다.
진아는 상원의 손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며 따라왔다.
"상원아 잠깐만. 이것 좀 볼래?"
상은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런 따뜻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어본 게 언제였는지.
10년, 아니 20년은 가까이 된 것 같았다.
상원은 눈물을 삼켰다.
"이 목도리 밤새 떴는데... 이게 최선이더라고. 치. 그래도 상원아, 니께 아빠 거랑 엄마 것보다 훨씬 이뻐."
'젠장... 그만....'
상원에게는 어떤 스킬도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이 공간은 스킬에 의한 게 아니었다.
마신이 공간 자체를 바꿔버린 것이다.
'얼른 나가야 된다.'
"상원아, 여기 좀 보라니까."
저벅, 저벅.
상원은 눈을 질끈 감고 계속 걸었다.
"또 가 버릴거니? 그때처럼."
욱신, 가슴이 아팠다.
10년 전 그때 그 순간의 기억이 엄습했다.
쇠사슬에 묶인 누나를 두고 도망쳤던 그때가.
"지금 가버리면 우린 영영 못 볼거야."
누군가 상원의 빈 왼손을 잡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 어찌 그 감촉을 잊을 수 있겠는가.
'그만....'
하마터면 목소리를 낼 뻔했다.
지금 돌아보면, 환상으로나마 누나를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원은 알고 있었다.
그건 지하의 수호자가 만든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일 뿐이라는 걸.
승천하기 전까지 구원은 없다.
그게 승천 시험의 법칙이다.
단지 지금 할 수 있는 건 빛을 향해 걷는 것뿐.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마침내 차원문이 한 발짝 앞에 다가왔다.
성화 곁에 이제는 거의 다 타버린 주술 나무 네 동이와 그 사이에 누워 있는 한창훈이 보였다.
그리고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송혜경도.
네 번째 시험을 치르는 동안 송혜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한창훈을 계속 지켰을 뿐.
한창훈은 혜경의 삶의 희망이었고, 동시에 그녀의 수호신 <검은 숲의 목자>의 먹이였다.
어쩔 수 없는 때가 아니면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더 이상 그렇게 두어서는 안된다.
5번 시험에서 최상의 결과를 얻으려면 송혜경을 투입해야 한다.
차원문이 성화와 이어진 걸 보았을 때 상원이 세운 계획이 바로 송혜경을 통제하는 방법이었다.
"진아씨."
진아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상원의 손을 세게 쥐었다.
"미안합니다."
망설임 없이 상원은 왼손을 놓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진아를 번쩍 집어 들어서 차원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날아간 진아를 성화가 삼켜버렸다.
성화는 그녀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상원 본인이 나가는 게 문제였다.
"상원아."
상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꿀꺽, 상원이 마른 침을 삼켰다.
"지하의 수호신."
상원이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원은 빙글 돌았다.
상원의 뒤쪽 광활한 공간을 끝도 없이 거대한 존재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수천 수만 마리 뱀들이 검은 혀를 날름거리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꿈틀거리는 뱀들 사이에 그녀가 있었다.
상원이 10년 전 새하늘교의 성지 <하늘방>에 버리고 왔던, 그의 누나 조상은이.
다만 그녀의 피부는 창백했고 눈은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이리 와."
그녀가 뻗은 손에 새까만 손톱이 돋아 있었다.
미소 짓는 그녀의 입에서 세 갈래로 갈라진 새까만 혀가 날름거렸다.
"같이 가자."
그녀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가 미치기 전, 상원에게 짓곤 했던 그 부드러운 미소였다.
그리고 상원은 보았다.
그녀의 새까만 입술 아래 흉흉하게 빛나는 송곳니를.
"어디."
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잡아보시오."
날카로운 손톱이 돋은 손을 바라보며, 상원은 뒤로 몸을 던졌다.
"샤아아아악!"
지하의 수호자가 날카롭게 울었다.
그녀가 뻗은 손이 아슬아슬하게 상원의 옷깃을 스쳤다.
손톱이 스친 곳이 까맣게 부식되어 바스라졌다.
샛노란 눈알 한가운데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가 상원을 바라보았다.
손을 뻗은 그녀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멀어졌다.
현실 세계의 따스한 공기와 성화의 온기가 상원을 감쌌다.
'이 공기가 이렇게 그리워질 줄이야.'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하의 수호자가 뻗은 손가락이 차원문을 넘어온 것이다.
"저게 뭐야?"
"마... 맙소사."
경악에 물든 수험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포감이 그들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럴 것이다.
티끌만큼이나마 현세에 강림한 마신의 격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상원은 다시 위를 보았다.
지하 괴조가 나타날 때와 비슷한, 끝없는 지하와 현실을 잇는 검은 구멍이 공중에 나타났다.
그 블랙홀 같은 구멍에서, 하늘악어나 성성이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한 뱀의 아가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마신이 티끌만큼 현세에 강림한 모습이, 저 거대한 아가리다.
"우욱... 우웨에에엑."
"으으... 으으으."
누군가는 구토를 했고 누군가는 울부짖었다.
마신의 격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집채 만한 성화 정도는 한입에 삼켜버릴 것 같은 아가리 아래는 상원과, 한창훈이 있었다.
상원을 제외하고, 마신에게 덤벼들 만한 또라이는 단 하나뿐이다.
저 남자의 아내, 저 먹이의 주인.
송혜경.
'마신에게 덤빌 수 있고... 그리고 마신에게 덤빌 수밖에 없지. 그냥 있다간 먹잇감을 뺏기게 생긴 상황인데.'
"끄아아악!"
그녀가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지르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팔을 휘둘러 뱀의 아가리를 후려쳤다.
그 거대한 뱀의 머리가 휙 돌아갔다.
'대단하긴 대단하네.'
바닥에 주저앉은 상원이 공중을 올려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지하의 수호자를 너무 물로 봤군.'
덤빌 수 있다는 게 마신과 대적할 수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고작 네 번째 시험, 마신의 티끌과 맞설 수 있는 수험자가 있을 리 없다.
상원도 그건 불가능하다.
뱀이 아가리를 쩍 벌리자, 뱀의 목구멍에서 작은 뱀 대가리들 수백 개가 튀어나왔다.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 뱀 대가리들이 혜경의 사지를 감쌌다.
"끄아아아악!"
뱀에게 묶인 혜경이 비명을 질렀다.
"여보!"
창훈이 외쳤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구해드릴테니."
상원이 창훈의 어깨를 짚으며 얘기했다.
"검은 숲의 목자!"
돌바닥을 디디고 우뚝 선 상원이 소리를 질렀다.
"불신자!"
검은 숲의 목자가 강림함에 따라 눈이 완전히 새까매진 혜경이 쉰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널 꺼내주마."
그 말에 혜경이 의혹에 찬 표정으로 상원을 돌아보았다.
"단, 조건이 있다."
이 수가 먹히면 5번 시험에서 쓸 수 있는 말이 하나 늘어난다.
"새하늘에 맹세해라! 나를 돕겠다고. 그러면 풀어주마."
그와 동시에 시스템 메세지가 떴다.
[수험자 <조상원>이 승천자 <검은 숲의 목자>에게 <새하늘 약속>을 제안하였습니다.
성립 요건: 조상원은 검은 숲의 목자를 풀어줍니다.
성립 효과: 검은 숲의 목자는 조상원을 돕습니다.]
승천자들은 새하늘에 한 맹세를 어길 수 없다.
일시적으로는.
그 기간은 승천자의 힘과 격에 따라 달라진다.
검은 숲의 목자 같은 또라이라면 시험 하나에서 세 개다.
그래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
"어쩔테냐?"
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끄으으으윽!"
그녀의 온 얼굴에 검은 핏발이 돋았다.
검은 숲의 목자는 예측 불가능하기로는 그 제멋대로인 승천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그리고 그의 힘은 더 유명했다.
지하의 수호자에게 잡혀서 저렇게까지나 버틸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그녀도 한계였다.
왈칵, 그녀의 입에서 검은 피가 쏟아졌다.
"이대로 탈락할 테냐? 먹이를 눈앞에 놔두고."
상원이 창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얘기했다.
"매... 맹세한다!"
그녀가 외쳤다.
"좋아."
지하의 수호자가 현실로 넘어온 저 문은 상원이 연 것이다.
그리고 마신은 자기 영토를 벗어난 곳에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방법은 간단하다.
상원이 연 문을 닫으면, 저 마신의 티끌은 그대로 바스러져 버릴 것이다.
[스킬 <지하의 문>을 해제합니다.]
공중에 열린 블랙홀이 닫히며, 끝없는 지하로부터 넘어오는 힘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
온 사방에 마신의 비명이 쩌렁쩌렁 울렸다.
뱀 대가리가 돌덩이가 되어 툭툭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혜경이 털썩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수험자 <조상원>과 승천자 <검은 숲의 목자> 사이의 <새하늘 약속>이 체결되었습니다. 검은 숲의 목자는 조상원을 돕습니다.]
약속의 지속 시기는 길어야 시험 세 개.
하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여보, 여보."
창훈이 비척비척 혜경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잠든 그녀의 입과 코에서 끈적한 검은 피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괜찮다.
저 정도 상처는 금방 나을 테니까.
“하아.”
상원이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신이 강림한 탓에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울역은 평화로웠다.
아무도 희생하지 않고 네 번째 시험이 끝났다.
털썩 바닥에 누워 상원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