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희생 제의 (5)
"이걸로 됐다."
시스템 메세지를 보며 상원은 나직이 말했다.
불가능한 업적 일곱 개를 달성했을 때 얻는 칭호 <일곱 별의 왕관>.
그 중 두 번째 별을 얻기 위해선 성역 <서울역>의 수험자들이 단결을 유지해야 했다.
'4번 시험을 깨면서... 단결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해.'
4번 시험이 성역을 결단내는 이유는 수험자들의 불신을 조장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희생의 낙인에 찍힌 자는 1시간이 지나면 그 낙인을 복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 두 사람을 모두 악마문에 집어넣어야 시험이 끝나는 것이다.
4번 시험이 시작되면 수험자들은 갖은 갈등을 겪은 후에 희생양을 선택한다.
보통 그렇게 선택된 희생양은 제 발로 악마문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나서 희생양이 두 번째 희생양을 선택하면, 그제야 수험자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전심전력으로 희생양들을 악마문에 밀어넣게 된다.
간혹은 불어난 희생양들이 수험자들을 모조리 살해하는 성역도 나온다.
'잔인하기 그지없는 시험이지.'
회귀 전을 떠올리며 상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는 4번 시험에 대한 지식이 쓸모가 없었다.
구조를 알고 있다고 사람들이 서로 불신하는 걸 막을 수는 없었으니까.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탈락하지 않은 건 전적으로 오태성 덕분이었다.'
태성이 희생양을 자처하고 낙인을 받자마자 악마문으로 돌진하지 않았다면, 회귀 전 상원의 여정은 4번 시험에서 끝났을 것이다.
이번에는 달랐다.
4번 시험의 내용에다가 오태성의 존재까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원은 세 가지 목표를 달성할 작전을 세울 수 있었다.
첫 번째, 윤진아를 키우는 것.
다섯 번째 별을 얻기 위해선 윤진아를 회귀 전보다 강하게 키워놓아야 한다.
그래서 진아가 낙인을 받게 했다.
그녀는 낙인의 마기를 견딜 수 있다.
낙인이 주는 능력치 버프를 바탕으로 그녀는 수없는 마물들을 도륙했다.
그정도로 코인을 긁어모았다면 최고위 주신들의 화신 못지않게 강해질 것이다.
두번째, 오태성의 신뢰를 얻는 것.
태성은 치료계 중에선 손에 꼽는 승천자인 <청낭의 의선>의 화신이었다.
상원은 태성이 희생양을 자처할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태성이 자청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진아가 낙인을 받게 했다.
태성이 심리적인 빚을 지도록.
이런 상황이라면 정의로운 태성이 상원을 외면할 수는 없다.
'적어도 호감은 됐을 게다.'
그리고 마지막, 가장 중요한 목적.
서울역 사람들이 서로를 불신하지 않고 네 번째 시험을 깨는 것.
4번 시험을 깨더라도 서울역 사람들이 서로를 불신하게 된다면 두 번째 별은 얻을 수 없다.
세 가지 목적을 모두 달성하기 위한 상원의 작전은 다행히도 지금까지 모두 제대로 진행되었다.
레벨업으로 얻은 스킬포인트를 지하의 문에 찍었다.
오태성이 자처하기를 기다렸다가 진아가 낙인을 받게 했다.
진아는 1시간 동안 마물을 잡으며 코인과 신앙을 있는대로 긁어모았다.
그리고 상원 자신이 진아가 만든 낙인을 받고 악마문으로 들어왔다.
4번 시험은 끝났다.
상원은 목표한 바를 모두 이루었다.
'이제 돌아가는 게 문제네.'
새까만 손톱이 돋은 빨간 손들에 붙잡혀, 상원과 진아는 지옥으로 이어지는 차원문에 들어섰다.
주변에는 탁한 회색 연기와 비명을 지르는 새빨간 영혼들이 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아...."
진아가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의 이마에 새겨져있던 낙인은 어느새 지워져 있었다.
희생의 낙인의 주 역할은 악마문에 들어갈 희생자를 표시하는 것.
희생자들이 악마문에 들어갔으니 소임을 다 한 낙인이 지워진 것이다.
하지만 상원은 알고 있었다.
낙인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진아의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는 걸.
그 낙인이 언젠가 진아를 더 강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이야기다. 어쨌든.'
"끔찍해요."
진아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차분한 톤으로 돌아와 있었다.
낙인의 효과가 다 해 제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낙인이 주던 고양감과 자아도취도 사라졌다.
그러니 이제 지옥의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감촉도, 소용돌이 치는 마기와 원혼들도 끔찍하게 느껴질 것이다.
"조금만 참으세요. 금방 끝납니다."
상원이 덤덤하게 말했다.
두 사람을 잡아 끄는 팔의 반대쪽 끝이 보였다.
팔들은 붉게 빛나는 차원문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저곳이 악마들의 고향, 마신 <세상 끝의 불꽃>의 영토, 승천 시험의 <지옥>이었다.
마침내 두 사람을 붙잡은 손이 차원문에 닿았다.
후끈한 열기와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가 느껴졌다.
'다시 오는 건데도... 적응은 되지 않는군.'
꿀꺽, 상원이 침을 삼켰다.
"상원씨."
진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리 진짜 돌아갈 수 있는 거죠?"
"그럼요."
상원이 말을 마치자, 붉은 차원문이 두 사람을 삼켰다.
* * *
차원문의 바깥, 지옥.
지평선의 저 끝까지 하늘은 온통 검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여기저기 솟은 높다란 화산들이 끊임없이 탁한 연기를 내뿜었다.
땅도 온통 굳어버린 검은 용암 투성이였고, 그 사이로 시뻘건 마그마가 부글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여기가... 여기가 지옥이죠?"
진아가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어... 여기가 어디야."
"끄으으윽."
여기저기서 신음소리와 말소리가 들려왔다.
진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붙잡고 꿈틀거리며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상태가 좀 나은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주변을 연신 둘러보았다.
흑인도 백인도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성지의 희생양들입니다. 우리같은."
상원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제... 젠장!"
그들 중 누군가가 몸을 일으키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급속도로 일그러졌다.
"어... 뭐... 뭐야?"
다시 한 번.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 어떻게 이런...?"
그녀의 반응을 본 다른 수험자들도 비슷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같았다.
"스킬... 스킬이 안 써져요!"
"뭐야... 내 수호신? 수호신이 대답을 안해!"
그들을 바라보는 진아의 눈이 흔들렸다.
"어떻게 된 걸까요?"
"수호신들이 버린 겁니다. 자기 화신을."
상원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여기는 지옥이고, 다섯 마신 중 하나인 <세상 끝의 불꽃>이 다스리는 영역입니다. 그 세상 끝의 불꽃이라는 작자가 워낙 괴물이라 웬만한 승천자들은 여기엔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거죠. 그놈을 상대해서 본인이 소멸하느니 차라리 화신을 버리고 다음 시험을 기약하는 게 나으니까."
꿀꺽, 진아가 침을 삼켰다.
"낙원의 수문장은 그러지는 않을겁니다만."
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녀의 두 손 끝에서 분홍색 불꽃이 이글거렸다.
"저는... 쓸 수 있네요...."
"낙원의 수문장이 대단해서 그런 겁니다."
"아아."
진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곧 그녀의 몸 주위에서 분홍 오오라가 피어올랐다.
낙원의 수문장이 그녀에게 응답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낙원의 수문장이 재수없을 정도로 콧대가 높긴 해도... 의리는 또 끔찍하게 지킨단 말이지.'
상원이 너울거리는 오오라를 보며 생각했다.
그때였다.
"키이이이이익!"
"인간! 인간이다!
어느새 수많은 마물들이 인간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린아이만한 덩치에 몸뚱이가 새빨간 새타니들, 그리고 그 사이에 사람 키만한 마물들이 노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상원이 정부청사에서 만났던, <유황불 화살>을 쓰는 2급 마물 <이매>였다.
심지어는 덩치가 집채만 한 개들도 있었다.
3급 마물 <지옥의 번견>이었다.
"이런... 스킬도 못 쓰는데 하필 이럴 때...."
"크으으윽!"
수험자들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크윽!"
진아의 두 손에 불꽃이 일었다.
진아가 마물들을 향해 불꽃을 쏘려는 걸 상원이 제지했다.
의구심이 담긴 눈빛으로 진아가 상원을 쳐다보았다.
상원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진아씨. 지금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
"여기는 마신의 영토고, 여기서 마물들을 죽여 봐야 마물들이 더 몰려올 뿐입니다. 낙원의 수문장이 대단한 승천자라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진아씨가 함부로 나섰다간 수호신의 안위마저도 담보할 수 없게 됩니다."
진아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지금은 안됩니다. 강해지십시오. 약한 이들의 손을 잡아줄 수 있을 만큼 강해지세요."
상원은 진아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도 언젠가 지옥의 한복판에서 홀로 마물들을 상대할 만큼 강해질 것이다.
그녀를 그만큼 강하게 만들어놓지 않으면 상원은 일곱 별의 왕관을 얻을 수 없다.
어쨌든 그건 나중의 얘기다.
지금은 여기서 나가야 한다.
"이제 여기서 나갈 겁니다."
상원이 브라이싱크론 지갑에서 긴 안대를 꺼냈다.
끝없는 지하에서 2급 마물 지하 마녀를 잡고 얻은 <지하 마녀의 눈가리개>였다.
지하의 문으로 열리는 포탈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 포탈을 보려면 안대를 써야 한다.
상원이 눈가리개를 맸다.
"진아씨, 반드시 지켜줘야 할 게 있습니다."
"뭔가요?"
"절대로, 절대로 뒤를 돌아보면 안됩니다. 아시겠죠?"
"네."
진아가 상원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눈가리개로 눈을 가려 눈앞이 온통 새까맸다.
그 새까만 공간 한 구석에 노랗게 빛나는 포탈이 보였다.
"절대 돌아보지 마세요."
상원이 진아의 두 손을 잡고 포탈을 향해 몸을 던졌다.
지옥과는 전혀 다른, <끝없는 지하>의 눅눅한 한기가 엄습해왔다.
두 사람의 뒤로 코를 찌르는 냄새와 함께 강렬한 폭발음과 수없는 수험자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 * *
상원과 진아는 걷고 있었다.
'분명히 눈가리개로 눈을 가렸는데.'
그런데 상원의 눈에 풍경이 보였다.
남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공간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그리고 상원과 진아가 걷는 바닥은 마치 새까맣고 맨들거리는 뱀의 비늘 같았다.
'이거... <지하의 수호자>의 짓이군.'
상원이 침을 꿀꺽 삼켰다.
회귀 후 처음으로 끝없는 지하에 갔을 때, 상원은 하마터면 마신 지하의 수호자와 눈을 마주칠 뻔 했다.
다시 끝없는 지하에 오는 건 그녀의 사정권에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이 여기로 돌아오긴 했지만... 이 공기 이 압박감 진짜 무시무시하구만.'
그때였다.
"상원씨."
진아의 부름에 하마터면 상원은 뒤를 돌아볼 뻔 했다.
으드득, 상원이 이를 갈며 걸음을 재촉했다.
"진아씨... 절대로 뒤돌아보면 안됩니다."
저 멀리 보였던 차원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차원문 건너편에서 분홍빛 불꽃이 넘실거렸다.
차원문이 성화 바로 옆에 열린 것이다.
'오호라!'
상원의 머릿속에 새로운 계획이 섰다.
골치아픈 변수를 처리할 계획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