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희생 제의 (4)
"모두 비켜요."
진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기괴한 광기가 담겨 있었다.
진아의 말에 수험자들이 비켜섰다.
수험자들 사이를 걸어가는 진아의 두 손에 분홍 불꽃이 이글거렸다.
<낙원의 수문장>의 성현 <지천사의 불씨>였다.
"원래 저기서 연기가 났나?"
만웅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지천사의 불꽃이 매캐한 회색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진아에게 찍힌 <희생의 낙인>의 영향이었다.
스킬에 낙인의 마기(魔氣)가 담긴 것이다.
"하아아아."
진아가 살짝 손짓을 하자, 그녀의 손끝에 맺혀 있던 불씨가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 새타니 떼를 집어삼켰다.
쾅!
불덩이는 땅을 살짝 흔들 정도로 강하게 폭발했다.
폭발에 휩쓸린 새타니들은 순식간에 재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아아, 재밌네."
진아의 볼에 옅은 홍조가 나타났다.
마물들을 잿더미로 만들면서, 진아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입술을 깨물었다.
불덩이를 살짝 던지는 손짓과 몸을 살랑 흔들며 걷는 걸음이 요염했다.
"사람이... 확 변한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상원 곁에 다가온 만웅과 문혁이 물었다.
"별 일 아닙니다."
상원이 대답했다.
"그런데 갑자기 진아씨가 희생제물이 된 건..."
"계획된 일입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어두운 표정으로 묻는 문혁의 말에 대답하고, 상원은 태성을 보았다.
태성은 아직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진아를 보고 있었다.
손녀뻘 되는 젊은이를 희생시켰다는 죄책감과 일이 그렇게 되도록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이 태성을 뒤덮은 것 같았다.
"어르신."
상원이 커다란 손으로 태성의 손을 잡았다.
"말씀드렸지요. 이번 시험에선 서울역의 그 누구도 희생되지 않을 겁니다."
태성이 상원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상하군."
태성이 읊조렸다.
"이상해. 근거를 모르겠는데, 젊은이가 하는 말은 왠지 믿음이 가요."
상원의 두 눈을 주시하는 태성의 눈빛이 깊었다.
"맞아요 영감님. 우리 형님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걱정 붙들어 매요."
만웅이 코를 슥 문지르며 말했다.
"고맙다."
상원은 만웅의 어깨를 살짝 토닥였다.
그리고 아직도 멍한 표정으로 진아를 보고 있는 수험자들을 향해 돌아섰다.
"희생 제물이 악마문에 들어가기 전까지 악마들이 계속 쏟아져 나올겁니다. 코인이랑 신앙 버실 분들은 따라오시면 됩니다."
상원이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어... 그래?"
"저, 저 갈래요."
그 말에 수험자들 몇몇이 손을 들고 나섰다.
"아 그런데."
제지의 뜻으로 상원이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저기 휘말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분들만 오십시오."
상원이 진아를 가리켰다.
윤진아, 능력치 총합 60짜리 괴물이 악마들을 무참하게 도륙하는 현장을.
쾅!
또 한 번, 악마의 힘이 담긴 성스러운 불꽃이 무지막지한 폭발을 일으키며 마물들을 집어삼켰다.
수험자들이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젠장... 저거 휘말리면 그대로 잿가루가 되겠구만."
만웅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난 자신 없수."
"저는 가겠습니다."
문혁이 <무소 각궁>을 빼어 들고 말했다.
문혁의 수호신 <해안선의 귀신>은 나름 명궁 소리를 듣던 승천자였다.
그 화신인 백문혁의 활 솜씨는 남부럽지 않았다.
"좋습니다. 가시죠."
그 말과 함께 상원은 진아의 뒤를 따라 걸었다.
문혁을 비롯한 몇몇 수험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 * *
앞을 가로막는 새타니와 그슨대들을 거침없이 쓸어버리면서, 진아는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서울역 지하에 들어왔다.
서울역 지하의 공기는 어느새 매캐한 유황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벽에는 횃불들이 타고 있었고 어디선가 불경한 웅얼거림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상원이 숨은 시험을 치르러 들어갔던 정부청사처럼, 서울역 지하도 악마에게 잠식된 것이었다.
"이게... 이게 서울역입니까."
문혁이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이 공간도 악마들에게 잠식된 겁니다."
상원이 대답했다.
익숙했던 공간이 마경(魔景)이 되자, 공간이 뿜어내는 공포감이 배가되었다.
서울역 지하에 들어선 수험자들은 어느새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심지어 사선을 수없이 넘었던 문혁마저도.
지금 지하에 들어선 수험자들 중 움츠러들지 않은 사람은 단 둘뿐이었다.
상원과 희생의 낙인이 찍힌 진아.
"너무, 너무너무 재밌어."
서울역 지하가 마경이 되었든 말든, 진아는 즐겁게 웃으며 마물들을 학살하는 데만 집중했다.
쏟아져나오는 마물들은 진아 앞에 서자마자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그슨대들의 <마력 삼키기>도 진아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급 마물의 스킬 정도로 영향을 받기엔 진아의 마력량이 터무니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저 정도면 코인과 신앙을 정말로 긁어모으겠다.'
상원이 진아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 추세라면 진아는 이번 시험에서 천 코인은 가뿐하게 벌 수 있었다.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어. 다행이다!'
낙인을 받은 수험자가 제정신을 유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상원은 최악의 경우 직접 윤진아를 제압하는 방법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진아는 아주 잘 버티고 있었다.
이 추세라면 윤진아가 1시간을 버티는 건 문제 없었다.
윤진아를 이 추세로 키워 나가야 다섯 번째 별을 얻을 가능성이 열린다.
다행히도, 진아는 상원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고 있었다.
"하아!"
진아가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불덩이를 마구 던져댔다.
쾅! 쾅!
격렬한 폭발음과 함께 어두운 복도가 우릉우릉 울렸다.
새타니와 그슨대들이 재가 되었다.
문혁을 비롯한 수험자들이 스킬을 쏘며 그녀를 엄호했는데, 사실 엄호는 필요 없어 보였다.
그렇게 진아의 독주가 이어졌다.
* * *
"아니... 서울역 지하가 이렇게 깊었습니까?"
한참 걸었을 때 문혁이 물었다.
그의 말마따나 한참 걸었는데도 어두운 복도와 계단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악마문을 통해서 지옥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상원의 말에 문혁의 눈이 빛났다.
"이 세계는 지옥도 있나 봅니다. 그건 연옥이랑 다른 겁니까?"
"다릅니다. 아시다시피 승천 시험의 연옥은 시험에 떨어진 자들이 가는 곳이고요. 지옥은 악마라고 분류되는 마물들이 사는 곳입니다."
"아. 죽어서 가는 사후세계 같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네."
상원은 문혁의 말에 대답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험자들이 점점 지쳐가는 게 눈에 보였다.
눈은 퀭했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비록 마물 대부분을 진아가 정리했기 때문에 수험자들이 싸워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옥과 이어진 공간이 주는 소름 끼치는 마기가 수험자들의 기를 빼고 있었다.
"돌아가실 분들은 돌아가시라고 하는 게...."
"아니오, 안됩니다."
상원이 단호히 대답했다.
"그대로 뒤를 돌아서 나간다고 해도 서울역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미 이 공간은 지옥에 잠식됐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시험이 끝나면 지옥과의 연결도 끊어집니다. 그 때 나가시면 됩니다. 지금은 안돼요."
상원을 따라온 수험자들이 지친 표정으로 끄덕였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저게 뭐야."
서울역 지하 복도 끝, 거기에 거대한 방이 있었다.
방바닥은 새까만 용암으로 뒤덮여 있었고, 방바닥과 벽 여기저기 마그마가 흐르고 있었다.
유황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건... 그냥 불지옥이잖아."
"아무리 지옥에 잠식됐다 그래도 서울역이 이렇게 변하다니."
수험자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방 한가운데는 압도적인 크기의 항아리가 있었다.
우둘투둘한 돌로 된 표면에는 악마들의 불경한 문장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끼기기기긱!"
"께게게겍!"
그 항아리에서 새타니와 그슨대들이 개미떼처럼 꾸역꾸역 기어 나오고 있었다.
"저게 악마문입니까?"
"그렇습니다."
마그마가 흐르는 방 한가운데 있는, 악마를 끊임없이 내뱉는 항아리.
그게 4번 시험의 핵심인 악마문이었다.
4번 시험은 희생의 낙인이 찍힌 희생양이 악마문 안으로 들어가면 끝난다.
'오랜만에 보니까 감회가 새롭네.'
상원이 악마문을 보면서 생각했다.
회귀 전, 상원은 다른 수험자들과 함께 희생양 오태성을 악마문까지 이끌었다.
그리고 오태성이 악마문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걸 지켜보았었다.
'이번에 그걸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네.'
상원이 팔짱을 끼고 악마문을 바라보며 한숨을 뱉었다.
"그럼 이제 진아씨가 저기로 들어가는 겁니까."
"맞습니다."
문혁의 물음에 상원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악마문에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문혁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악마문은 마신 <세상 끝의 불꽃>의 영토인 <지옥>과 현실을 잇는 차원문입니다. 악마문 속으로 들어가면 그대로 악마들의 밥이 되는 거죠. 거기엔 새타니나 그슨대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마물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습니다."
"그런 데로 진아씨를 밀어 넣으시는 겁니까?"
문혁이 이를 으드득 갈며 나직이 말했다.
"제가 말씀드렸지요. 다 방법이 있다고."
상원이 씩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때였다.
"상원씨!"
마물들을 도륙하던 윤진아가 상원을 불렀다.
상원이 진아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지났어요, 1시간."
웃으며 말하는 진아의 눈빛이 탁했다.
제아무리 최고급 성령인 낙원의 수문장이라 해도, 심지가 굳건한 윤진아라 해도 희생의 낙인을 달고 한 시간 동안이나 버티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고생하셨습니다."
진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상원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커다란 상원과 자그마한 진아의 눈높이에 맞게 되었다.
"난 솔직히 말이에요."
진아가 자기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희생의 낙인에서 회색 연기가 맹렬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상원씨 당신,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진아가 손을 뗐다.
그녀의 손바닥에도 새까만 낙인이 찍혀 있었다.
"하세요."
덤덤한 상원의 말에 진아는 망설임 없이 손바닥을 상원의 이마에 갖다 댔다.
상원의 이마에서 살 타는 냄새와 함께 치이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문혁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늦었다.
[성역 <서울역>의 희생양 <윤진아>가 수험자 <조상원>을 두 번째 희생양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메세지에 수험자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기분이 어때요?"
진아가 상원의 이마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에이, 재미없게."
덤덤한 상원의 말에 진아가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자 그럼."
상원이 몸을 일으켜 항아리를 바라보았다.
"갑시다 진아씨."
"그래요."
진아가 배시시 웃으며 상원의 손을 잡았다.
상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문혁이 의혹이 가득찬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상원이 항아리의 표면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항아리 표면의 문장들이 핏빛을 띠기 시작했다.
불경한 노랫소리가 이어졌다.
지옥으로부터 들리는 노랫소리였다.
그 소리만으로도 수험자들이 귀를 막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항아리의 입구에서 뻗어 나온 빨간 손들이 서로 손을 잡은 상원과 진아를 붙잡았다.
"기분 좀 더러우시겠지만 조금만 참으세요. 금방 끝납니다."
"알겠어요."
진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어서 손들이 한순간에 상원과 진아를 항아리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성역 <서울역>의 희생양 <윤진아>와 <조상원>이 악마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끌려 들어가는 상원의 귓전에 시스템 메세지가 울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