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희생 제의 (3)
"끼에에에에엑!"
어린아이만한 분홍색 마물들이 지하로 가는 에스컬레이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말라붙은 몸에 커다란 머리통, 날카로운 이빨이 촘촘히 박힌 아가리와 긴 손톱이 돋은 손가락.
첫 번째 시험 때 인류의 구할을 쓸어버렸던, 1급 악마종 <새타니>였다.
새타니들은 세 번째 시험의 두 번째 밤에 서울역 지하에 열린 악마문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 수가 두 번째 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런 썅!"
"하앗!"
수험자들의 대오 최전선에 선 만웅과 문혁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새타니들이 몇 마리씩 죽어 나갔다.
원거리 공격에 능한 수험자들이 뒤에서 스킬을 쉴 새 없이 쏟아 부어댔다.
네 번째 시험까지 온 수험자들에게 1급 마물인 새타니들은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새타니들 사이에는 덩치가 크고 까만 것들이 섞여 있었다.
<마력 삼키기>를 쓰는, 새타니들의 상위종 그슨대였다.
"그어어어업!"
그슨대들이 마나 삼키기를 쓸 때마다 수험자들 몸에서 피어난 파란 연기가 그슨대들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수험자들의 마력을 삼키는 것이었다.
마력을 빨린 수험자들은 급격하게 지쳐갔다.
서울역의 수험자들은 한 명 한 명이 강했고 나름대로 서로 손발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여 만든 단단한 방진에는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상원의 눈에는 그게 보였다.
하지만 상원은 걱정하지 않았다.
생각해둔 작전이 있기 때문이었다.
4번 시험은 그 작전대로만 하면 문제없이 깰 수 있다.
다만 작전을 실행할 타이밍이 문제였다.
"상원씨, 슬슬."
상원 옆에서 새타니들을 도륙하던 진아가 말했다.
그녀의 손에서 피어나는 분홍색 불꽃은 3번 시험을 깰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해져 있었다.
3번 시험을 깰 때 진아의 능력치 총합이 19였다.
지금 그녀의 능력치 총합은 40.
말 그대로 괄목상대할만한 차이였다.
그 정도의 성장은 진아는 물론이거니와 그녀의 수호신인 낙원의 수문장이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 상원의 말을 순순히 따랐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상원이 스스로를 <독생자>라고 지칭한 것, 그게 낙원의 수문장이 상원을 따르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낙원의 수문장으로서는 그게 거짓말인 걸 간파할 방법이 없었다.
수험자 조상원의 정보는 어떤 승천자도 열람할 수 없으니까.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아니오, 아직입니다."
상원은 한발 물러서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원은 나설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이전에는 고려하지 않았던 변수, 스스로 희생했던 오태성의 수호신, 청낭의 신의 때문이었다.
'여기서 타이밍을 잘 잡으면 청낭의 신의도 우호 관계로 만들 수 있다.'
승천자들 사이에도 격의 차이가 있으며, 영령에서 신령 그리고 주신으로 올라갈수록 격이 높아진다.
청낭의 신의는 비록 그 격은 영령급이었지만 그 특기인 치유에 있어서는 신령급과도 맞먹는 존재였다.
기회가 닿는다면 우호 관계로 만들어 놓아야 할 승천자였다.
"끄아아악!"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만웅의 부하 하나가 엎어져 있었고 새타니 떼들이 그 위를 수북하게 덮고 있었다.
"이런 X발!"
만웅이 미친 듯 나이프를 휘둘러 새타니들을 도륙했다.
"준배야! 괜찮냐!"
"으으... 형님...."
만웅의 부하 준배는 새타니들에게 물어 뜯겨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제... 젠장! 문혁이 동생! 나 잠깐 빠진다!"
"알겠습니다."
만웅이 준배를 안고 성화를 향해 뛰었다.
준배가 쓰러진 건 방진이 무너졌음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았다.
곧 새타니와 맞붙은 전열 여기저기서 수험자들의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끄으으...."
수험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원에게는 훤히 보였다.
상원이 이미 한 번 겪은 일이었으니까.
'한 명만 바치면 끝난다.'
수험자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살벌했다.
그때, 수험자들의 얼굴을 경악으로 물들이는 시스템 메세지가 떴다.
[<희생 제물>을 뽑는 표 1개가 행사되었습니다.]
메세지와 동시에 새타니들이 멀찍이 물러났다.
"이런 젠장...!"
"뭐야? 썅, 뭐야!"
수험자들이 서로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등을 맞대고 싸우던 전우가 자기를 배신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누군가가 배신을 했다.
"젠장! 누구야! 누가 이딴 짓을...!"
만웅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얼굴을 붉혔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문혁은 착찹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문혁은 아는 것이다.
한 번 퍼진 불신의 씨앗은 무서운 속도로 자라난다는 걸.
[<희생 제물>을 뽑는 표 1개가 행사되었습니다.]
[<희생 제물>을 뽑는 표 1개가 행사되었습니다.]
[<희생 제물>을 뽑는 표 1개가 행사되었습니다.]
우후죽순처럼 시스템 메세지가 떴다.
"그만 해요! 그만 해요!"
누군가 울면서 소리를 질렀지만, 그런다고 시스템 메세지가 멈추지는 않았다.
이제는 수험자들 스스로가 제어할 수 없는 광기가 서울역을 엄습한 것이었다.
이대로 누군가가 희생 제물로 선택되어서 네 번째 시험이 끝난다고 한들, 수험자들 마음속에 피어난 불신의 씨앗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불신의 씨앗을 심는 게 네 번째 시험의 첫 번째 목적이었다.
그때였다.
"모두! 모두, 그만하시오."
오태성이었다.
그 마른 몸에서 어떻게 그런 목소리가 나오는지, 오태성의 외침은 쩌렁쩌렁했다.
"내가 들어가겠소."
태성을 바라보는 수험자들의 눈이 흔들렸다.
"어차피 오래 살지도 못할 몸이오."
태성의 얼굴에 회한이 어렸다.
"어르신!"
"괜찮소. 괜찮아."
문혁의 외침에 태성은 쓸쓸하게 웃 어보였다.
상원의 눈에는 그 모습이 회귀 전과 겹쳐 보였다.
아직 표를 행사하지 않은 수험자들의 손이 덜덜 떨렸다.
진짜로 오태성을 희생시킬지, 양심의 가책이 그들을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아니오."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광장에 가득 퍼졌다.
상원이었다.
"서울역의 제물은 어르신이 아닙니다."
수험자들이 의아한 얼굴로 상원을 보았다.
"무슨...."
뿔테안경 아래 태성의 미간이 구겨졌다.
"제가 갈 거에요."
상원 옆에 서서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사람.
그녀는 윤진아였다.
"아니, 자... 잠깐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수험자들의 목소리에서 그들이 느낀 당혹감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아가씨…!”
태성이 입을 벌리고 진아를 쳐다보았다.
진아는 수험자들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상원를 쳐다보았다.
“계획대로 하시면 됩니다.”
상원의 단단한 목소리에 진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하늘을 보았다.
“나는 <낙원의 수문장>의 화신 윤진아.”
어떻게 그 작은 체구에서 그런 위엄이 나올 수 있는지.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수험자들은 절로 움츠러들었다.
“나는 성역 <서울역>의 제물. 성역을 위해 이 몸을 바칩니다.”
진아가 말을 마치자 별이 총총한 밤하늘에 갑자기 벼락 폭풍이 일었다.
번쩍이는 섬광이 온 광장을 뒤덮었다.
그리고 뒤이어 하늘에서 거대한 회색 불기둥이 쏟아져 진아를 덮쳤다.
쿠오오오!
굉음을 내며 회오리치던 불기둥이 사라졌다.
불기둥이 사라진 자리에 서 있는 진아의 이마에 커다란 표식이 생겼다.
녹은 아스팔트같이 검고 끈적끈적한 낙인, 그것이 희생 제물의 이마에 새겨지는 <지옥의 낙인>이었다.
승천 시험을 떠받치는 다섯 마신 중 하나, 모든 악마들의 군주 <세상 끝의 불꽃>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는 뜻이었다.
"잘했습니다."
상원이 말했다.
4번 시험을 치르는 수험자가 희생 제물이 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가장 많은 표를 받은 것.
두 번째, 스스로 제물임을 선포하는 것.
진아는 두 번째 방법을 택해 제물이 되었다.
상원의 지시대로였다.
"기분이 이상해요."
진아의 목소리가 음성 변조한 것처럼 굵어졌다.
그녀의 눈에서 회색 불꽃이 이글거렸다.
그 모습과 목소리가 마치 악마가 들린 <마인>들 같았다.
낙인의 영향이었다.
"모두 다... 태워버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충동 어린 미소가 피었다.
회귀 전을 포함해서, 상원은 그녀가 그런 미소를 짓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아아아."
진아의 손끝에 피어난 지천사의 불꽃이 회색 기운을 내뿜었다.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거대한 불덩이가 날아가 새타니 무리를 덮쳤다.
새타니 수십 마리가 한 번에 재가 되어버렸다.
불꽃의 크기도 위력도 명백히 강해져 있있다.
"아아. 즐거워요."
진아가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성격이 충동적이고 파괴적으로 바뀌었다.
이것도 낙인의 효과였다.
네 번째 시험이 성역을 결딴내는 방식, 그것은 다른 수험자들에게 떠밀려 희생된 제물을 마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복수심에 가득찬 희생 제물은 순순히 악마문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는 파괴 충동에 잡아먹힌 마인이 되어 낙인으로 버프된 능력치를 바탕으로 다른 수험자들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다른 수험자들은 희생양을 억지로 악마문에 집어넣고, 그렇게 네 번째 시험이 끝난다.
그 과정에서 서로를 적대하고 희생시킨 기억이 수험자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것이다.
"아... 어떻게... 이럴 수가...."
태성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주저없이 자기희생을 택할 정도로 고결한 태성으로서는 손녀뻘 되는 젊은이가 희생하는 상황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참... 어르신도 대단했습니다.'
낙인이 찍힌 오태성은 파괴 충동과 복수심이 자기를 잡아먹기 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악마문 속으로 뛰어들었었다.
'어쨌든.'
상원이 진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진아가 싱긋 웃으며 상원을 올려다보았다.
"진아씨."
"네."
"맘껏 불태우세요."
"그래요, 좋아요."
진아가 깔깔 웃으며 악마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누가 악마고 누가 수험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계획의 시작은 진아를 제물로 만드는 것이었다.
진아 정도로 신앙심이 강하다면, 그리고 낙원의 수문장 정도 되는 성령의 수호를 받는다면 고작 희생의 낙인이 찍히는 정도로 정신이 나가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상원의 예상대로 진아는 낙인에 잡아먹히지 않았다.
그리고 낙인이 주는 능력치 상승 효과는 그대로 보았다.
'집행국 나으리들도 신령급 성령을 배후에 둔 화신한테 낙인이 찍히는 상상은 안해봤겠지.'
이 광경을 지켜볼 집행자들이 부들부들 떨고 있을 생각을 하니 미소가 절로 나왔다.
4번 시험을 시작할 때 진아의 능력치가 물리력 15에 술력 25.
낙인의 버프를 받았으니 지금 능력치는 물리력 25에 술력 35쯤 될 것이다.
그정도 능력치에 상성까지 겹치면, 악마문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악마들을 1시간은 홀로 틀어막을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진아는 1시간동안 코인과 신앙을 미친 듯이 긁어모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일곱 별의 왕관 중 특히 다섯 번째 별을 얻기 위해선 윤진아를 착실하게 키워놔야 했다.
그것도 회귀 전 랭킹 4위인 시절보다도 훨씬 강하게.
"아가씨! 어째서... 어째서요! 어째서... 아가씨가 저런 끔찍한 곳으로 들어가겠다는...."
태성이 울부짖었다.
"아닙니다 어르신. 다 계획이 있어요."
상원이 태성 곁에 다가가서 말했다.
태성이 지친 얼굴로 상원을 올려다보았다.
"4번 시험은, 서울역의 누구도 희생되지 않고 끝날 겁니다."
상원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