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38화 (38/230)

제38화. 희생 제의 (2)

“잡았다고요? 이걸?”

록시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상원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 진짜 말도 안 된다. 그 발톱 만들어 달라 그랬을 때는 설마 설마 했는데.”

록시와 상원 앞에는 거대한 하늘악어의 시신이 늘어져 있었다.

“우리 투자자님 도대체 정체가 뭐요? 아니 어떻게 3급 마물을 잡을 수가 있지? 거기다가 그런 제조식은 또 어떻게 아는 거유?”

“다 방법이 있지요.”

상원이 대답했다.

“손 좀 주시겠어요 사장님.”

그렇게 말하며 내민 손을 록시가 마주잡았다.

두 사람이 맞잡은 손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상원이 록시에게 제조법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하늘악어의 가죽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 6번 시험의 숨은 시험을 깨기 위해 꼭 필요한 물건의 제조법을.

“야… 이걸로 이런 걸 만들 수가 있다고? 돌아버리겠네 진짜.”

록시가 입을 떡 벌렸다.

“하늘악어 비늘을 이렇게 붙이고… 여기다가 양탄자를 잘라서 이렇게… 허허, 참.”

록시가 손을 꽉 쥐었다.

“이 정도면 성물급이네. 성물급이우.”

록시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여섯 번째 시험 전까지 필요합니다.”

상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원이 록시에게 주문하는 물건은 6번 시험의 히든 미션을 깨려면 반드시 필요했다.

그 히든 미션을 못 깨면 7번 시험에 있는 첫 번째 별도 얻지 못한다.

"되지요?"

“음….”

록시가 눈살을 찌푸리며 턱수염을 쓰다듬고는 품속에서 주판을 꺼내 알을 몇 번 튕겼다.

록시의 눈이 가늘어졌다.

“됩니다.”

록시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 투자자님이 원체 대단하셔서… 시험을 워낙 금방 풀어버리시니까 여섯 번째 시험 전이면 좀 촉박하긴 한데, 가능해요.”

록시가 주판을 집어넣었다.

“예 그럼, 믿겠습니다.”

상원이 웃으며 록시의 어깨를 두드렸다.

“근데 투자자님. 이렇게까지 아등바등하는 이유가 뭐유? 첫번째 시험에서 성성이를 잡더니 세 번째 시험에서 하늘악어를 잡고. 투자자님 실력이면 승천은 문제없을 것 같은데 벌써 성물급까지 필요하신 이유가 있수?”

‘왜긴. 나는 이렇게 안 하면 승천을 못하니까 그렇지.’ 라는 말은 하지 않고, 상원은 그냥 웃어 보였다.

“그냥 욕심인가? 뭐 여튼 알겠수다 투자자님. 걱정 붙들어 매쇼.”

록시가 씩 웃고는 주판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아 그리고 사장님. 조언 드릴 게 하나 있는데요."

상원의 말에 록시의 눈이 빛났다.

그 자존심 센 록시가 상원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상인은 평범한 수험자들보다도 승천 시험에 대해 훨씬 많이 알고 있다.

그래서 수험자가 상인에게 조언을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상원은 달랐다.

첫날밤에 천 코인을 손에 쥐고 있는데다 알려지지 않은 제조법마저 알고 있는 수험자를 어떻게 평범한 수험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좀 있으면 안경 쓴 작은 여자가 거래를 하러 올 겁니다."

"그 수험자 윤진아 말이지요? 알고 있습니다. 그 양반 뒷배가 낙원의 수문장이지요? 콧대 더럽게 높은."

록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낙원의 수문장쯤 되는 고위 승천자들과 상인들의 관계는 미묘하다.

고위 승천자들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다.

상인들을 깔보는 것은 물론 거래를 하면서도 자기들의 지위를 이용해서 상인들을 찍어 누르려고 든다.

그래서 고위 승천자들의 씀씀이가 큼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은 고위 승천자들과의 거래를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상원은 록시의 표정에서 그런 꺼림칙함을 읽었다.

"예 맞습니다. 그분한테 잘 대해주세요. 나중에 아주 든든한 거래처가 될 겁니다."

상원이 웃으며 말했다.

"낙원의 수문장이 거래처가 된다고요? 에이 참. 우리 투자자님이 뭘 모르시나 본데, 그 양반이 성깔이 얼마나 더럽냐면..."

"안 그럴겁니다."

상원이 록시의 말을 끊었다.

'이번에는 내가 콧대를 확실히 꺾어 놨거든.'

"마침 저기 오네요."

저 멀리서 진아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물리력 10에 술력 20."

그녀는 상원이 말했던 조건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잘 대해주세요 록시. 말씀드린 대로, 물건은 6번 시험 전까지 부탁드립니다."

"에... 알겠수다."

상원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 록시를 뒤로 하고 돌아섰다.

* * *

상원은 성화 곁에 앉아 록시와 대화하는 진아를 지켜보았다.

진아에게서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 빛이 차례로 뿜어져 나왔다.

각각 괴력, 용력, 술력 물약을 먹고 능력치가 올랐다는 뜻이었다.

상원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횟수를 세어 보았다.

물리력 15에 술력 25, 지시한 것 이상이었다.

지옥문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를 지키면서 코인을 예상보다 많이 모은 모양이었다.

'낙원의 수문장이 협조적인가 보군.'

그녀와 거래하는 록시의 표정이 밝았다.

아까 낙원의 수문장과 거래하라고 했을 때 얼굴에 떠올랐던 꺼림칙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이 정도면 문제없다.'

그리고 상원은 고개를 돌려 불꽃 곁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교도 원강수는 지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고, 박명희는 멍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다른 수험자들이 옷을 갈아 입혀주었는지 깨끗한 새 옷차림이었다.

성화의 힘으로 외상은 거의 회복한 상태였지만, <원혼 군주의 절규> 때문에 입은 내상까지 회복하려면 며칠은 더 누워 있어야 할 것이다.

성현 <성년의 징표>를 통해 그녀와 연결되어 있는, 서울 육마귀 중 하나 유성희도 그녀와 같은 신세가 되어 있을 것이다.

유성희의 개성 <그물 금자탑의 정점> 때문에 절규의 효과를 몇 배는 더 받았을 테니까.

의령수의 심장을 얻고 유성희도 견제했으며 하늘악어의 시체까지 얻었다.

3번 시험에서 목표했던 것들을 모두 얻었지만 상원의 마음은 개운하지만은 않았다.

'시험이 끝나면 바로 다음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 승천하기 전까진... 마음이 계속 무겁겠지.'

상원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상원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성화 곁에 누워있는 사람들 사이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인자한 얼굴로 지친 수험자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침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저 사람... 누구더라?'

상원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50번 시험에 다다르기까지 마주쳤던 수험자가 너무 많았다.

그런데도 기억에 남는다는 건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뜻이었다.

상원은 켜켜이 쌓인 기억들을 더듬어 나갔다.

그러다가 상원은 노인의 얼굴을 발견했다.

'아.'

지금 서울역에 모인 수험자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사내.

원래대로라면 4번 시험의 '희생 제물'은 저 노인이었다.

'인연 하나 만들 수 있는 기회다.'

상원은 일어서서 노인에게 다가갔다.

노인은 박명희의 옆에 앉아 그녀의 맥을 짚는 중이었다.

"쯧쯧... 뭐에 당했길래 사람이 이 지경이 되나."

노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노인이 상원의 인사에 답하며 일어섰다.

그 찰나의 순간, 상원은 노인이 자기를 아래위로 훑어본 것을 느꼈다.

인자한 눈매 아래 눈빛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날카로웠다.

'예사 사람이 아니다.'

"반갑습니다. 오태성입니다."

상원은 태성이 내민 손을 잡았다.

뼈마디가 툭툭 불거진 손이 단단했다.

"저도 반갑습니다. 조상원입니다."

인사를 하며 상원은 박명희를 살짝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몸 여기저기에 젓가락 크기는 될 법한 장침이 꽂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참 당해도 아주 흉악한 것에 당한 것 같애요. 저 정도 침 안 꽂으면 차도가 없겠더라고."

태성이 명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침술에 조예가 깊으신 것 같습니다."

"얼마 전까지 한의사였어요."

"그렇다고 이런 스킬에 당한 것까지 치료하실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뭐 수호신 덕분이죠. 이 분 받아들이고 나니까 뭘 어떻게 해야될 지 보이더라고."

'역시.'

상원이 눈을 반짝 빛냈다.

시험 전에 한의사였다고 침으로 수험자들을 고칠 수 있는 건 아니다.

스킬에 당한 수험자를 고칠 수 있다는 건 침술과 관련된 수호신을 받았다는 뜻이다.

"신칭이 어떻게 되십니까?"

"<청낭의 신의>라고 합니다."

"!!"

상원이 눈을 번쩍 떴다.

영령급 승천자, 청낭의 신의.

치유 계열 승천자 중에서는 알아주는 강자다.

수준 높은 치료사가 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그런데도 네 번째 시험에서 탈락했다.

화신 오태성이, 자기가 최연장자라는 이유로 희생 제물이 되기를 자원했기 때문에.

상원은 오태성에게서 백문혁의 얼굴을 보았다.

'청낭의 신의도 그렇고 해안선의 귀신도 그렇고. 본인들이 강하면 뭐하나 화신들이 알아서 나가떨어져 버리는데.'

상원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문제라도...?"

"아니오, 아닙니다. 어르신."

상원은 부드럽게 웃으며 두 손으로 태성의 손을 잡았다.

"어르신, 부디 주위를 살펴가면서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 허허.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프면 언제든지 찾아주세요."

상원은 넉살 좋게 웃는 태성을 뒤로 하고 계단 위로 올랐다.

태성은 침통을 들고 커다란 성화 곁에 늘어진 수험자들 사이를 바삐 돌아다녔다.

태성뿐만이 아니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상이 심한 사람들을 챙겼다.

'훈훈하네.'

그러나 그런 광경은 네 번째 시험을 치르면서부터 사라지게 된다.

성역 <서울역>도 그렇게 아비규환이 됐다.

'하지만 이번엔 그렇게 안 될거다.'

회귀 전처럼 서울역이 쪼개졌다가는 두 번째 별을 얻을 수 없게 된다.

상원은 의지를 다지며 일어섰다.

서쪽 하늘로 노을이 졌다.

네 번째 시험이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 * *

"다들 인간적이군요."

계단을 내려가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나타난 집행사 엘가가 수험자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협력과 연대, 박애... 그런 건 승천 시험의 본질이 아닙니다."

알고 있다.

상원은 그걸 뼈저리게 겪었다.

"이제 이 성역은 분열될 겁니다."

엘가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하늘에 먹구름에 드리우면서 스산한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정말, 4번 같은 더러운 시험을 선포하기 좋은 날씨다.'

상원은 하늘을 보면서 생각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꼴을 똑똑히 보십시오."

그 말을 남기고 엘가는 사라졌다.

그와 함께 시스템 메세지가 떴다.

[네 번째 시험 <희생 제의>를 시작합니다.]

[성역 <서울역>의 모든 수험자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집니다.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수험자가 <희생 제물>이 됩니다.]

[<희생 제물>이 <악마문>에 들어갈 때까지 악마문에서 마물들이 소환됩니다.]

서울역의 수험자들을 살아남기 위해서 동료를 죽여야 한다.

"희생 제물?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런 걸 어떻게 골라요..."

사람들이 당혹감에 가득찬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끼기기기기기!"

지하와 광장을 잇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새타니들이 미친 듯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 어떡해요."

"젠장!"

수험자들이 몰려오는 악마들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보았다.

수백의 새타니 떼가 붉은 색 파도처럼 수험자들과 부딪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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