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대강령술사 공략전 (3)
<20층의 흑마술 양초>에 손을 대자, 문양이 빨갛게 빛나기 시작했다.
“너... 그거....”
오디나스가 수십 개의 입으로 말했다.
“흑마술 양초다! 오랜만 아닌가 오디나스.”
상원의 목소리가 온 거리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윽... 그으윽....”
긴 모가지 끝에 매달린 수십 개의 머리들이 꿈틀거리는 꼴이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누가 저걸 보고 나무라고 생각하겠는가.
"너의 존경하는 스승님이 만든 물건 아니냐! 경의를 표해라 오디나스!"
대강령술사 오디나스, 강대한 카이네딘 제국 뿐만 아니라 그 제국이 있던 세계 <아나르>까지 멸망시킨 자.
세상에 다시 없을 천재라고 명성이 자자했으나, 정작 그는 평생을 스승의 그늘 아래 살았다.
그러니까, 오디나스 앞에서 그 스승을 거론하는 건 그를 제대로 도발하겠다는 얘기였다.
정부청사의 숨은 시험에서 흑마술 양초를 얻은 첫 번째 이유가 이것이었다.
“그아아악!”
해골 형상을 한 수십 개의 머리가 사방을 바라보며 포효했다.
강령술을 통해 좀비들에게 힘을 주는 것이었다.
후욱 후욱!
오디나스 주위에 있던 좀비들이 합을 맞추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거친 숨소리 같은 소리를 합을 맞추어 내니, 좀비 떼들이 어엿한 군대처럼 보였다.
그들은 동공이 완전히 탈색된 채로, 입으로는 피가 섞인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상대를 향해 달려들 준비를 하는 광견 같은 모습이었다.
"죽어!"
오디나스의 찢어지는 듯한 단말마와 함께 좀비들이 일제히 상원에게 달려들었다.
"꺄아아악!"
명희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박명희씨!"
상원의 외침에 명희가 고개를 들었다.
좀비들은 명희의 털끝도 건드리지 않았다.
오디나스의 목표는 오로지 상원뿐이었기 때문에.
그토록 증오했던 스승의 물건을 가져온 자가 있는데,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대강령술사 오디나스에게 흑마술 양초는 그런 물건이다.
"끝까지 보세요!"
상원이 명희에게 외쳤다.
상원의 양손에 분홍 불꽃이 맺혔다.
좀비들의 기세는 살벌했다.
'그래봐야 좀비.'
상원이 손을 슥 휘두르자, 수십 마리 좀비가 한 번에 잿더미가 되었다.
'이 정도면 낙원의 성화에 꿇리지 않는 위용 아닌가.'
상원이 씩 웃었다.
성속성 스킬, 그리고 그걸 받쳐주는 40의 술력.
지금의 상원은 성령(聖靈) 계열의 화신 못지않았다.
명희는 그 광경을 멍하게 보고 있었다.
도대체 저 괴물은 무엇인가, 그런 표정이었다.
"성... 직자...."
기다렸다는 듯, 오디나스의 눈이 빛났다.
오디나스로서는 성직자에 대한 대비는 충분했다.
수많은 성직자들을 도살했던 성직자 사냥꾼들이 대기하고 있지 않은가.
거대한 의령수의 주변에 별빛이 내리 꽂혔다.
둥 둥, 북소리가 울렸고, 시체 썩는 냄새가 강해졌다.
시공간을 건너 죽은 이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대강령술사 오디나스>가 특수 좀비 <검은 뱀 기사단>을 소환합니다.]
시스템 메세지가 떴다.
빛줄기가 걷혔고, 그 자리에 검은 갑옷을 입은 전사들이 나타났다.
소환된 전사들이 의령수 앞에 도열했다.
"할리!"
"하!"
날카로운 선창과 일사불란한 후창.
익숙한 광경이었다.
한때는 카이네딘 제국의 자랑거리였고, 이제는 승천 게임의 마물 신세로 전락한 검은 뱀 기사단.
그 수가 상당했다.
'이거... 아까 윤진아가 상대했던 것보다 배는 되겠는데.'
승천 게임의 특수 좀비들을 마음먹은 대로 불러내는 것, 이것이 대강령술사의 능력이다.
성직자를 상대할 때, 검은 뱀 기사단은 무적이다.
하지만 오디나스의 계산은 틀렸다.
눈앞의 상대, 조상원은 물리력만 110인 물리 깡패니까.
"검은 뱀 기사단? 소용없다, 오디나스."
상원이 <하늘의 불씨>를 해제하자, 손끝의 불꽃도 사그라들었다.
낙원의 수문장이 지켜볼 때처럼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잘 봐라."
상원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방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슨...!"
숫자만 많아졌을 뿐, 패턴은 같았다.
검은 뱀 기사단은 철저히 성직자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병종.
힘 대 힘 싸움에선 맥을 못 추는 게 당연했다.
거기다 공략도 간단하다.
지휘관만 제거하고 나면 나머지는 오합지졸이 된다.
2미터를 훌쩍 넘는 거구가 검은 갑옷으로 이루어진 방어선을 간단히 뛰어넘었다.
방어선을 이룬 전사들이 하늘을 나는 상원을 멍청하게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툭
날듯이 방어선을 뛰어넘은 상원이 그 속도를 그대로 실어 지휘관의 머리통에 주먹을 날렸다.
빡 하는 소리와 함께 몸통에서 떨어져나간 머리통이 땅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그으... 네놈...."
빠드드득
오디나스의 수십 개 해골 머리가 일제히 이를 갈았다.
그 소리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으으윽!"
명희는 아예 두 귀를 틀어막고 땅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오디나스가 포효했다.
그러자 상원의 주변으로 빛줄기들이 내리꽂혔다.
그와 함께 시스템 메세지가 떴다.
[<대강령술사 오디나스>가 특수 좀비 <키메라 병단>을 소환합니다.]
"그르르릉!"
빛줄기가 걷히자, 상원 못지않은 근육질 덩치에 짐승의 머리와 발톱을 한 수인(獸人)들이 나타났다.
수준 높은 마도공학을 자랑하는 카이네딘 제국의 강력한 모루, 키메라 병단이었다.
"그아아악!"
날카로운 포효를 내지르며 근육질의 거구들이 일제히 상원을 덮쳤다.
"생각해낸 게 고작 이거냐?"
상원의 손끝에 분홍색 불꽃이 맺혔다.
성 속성 스킬 <하늘의 불씨>.
검은 뱀 기사단에겐 전혀 먹히지 않지만, 키메라 병단에겐 다르다.
덩치가 크고 이빨이 날카롭다고 해봐야 좀비.
더구나 세 번째 시험에 배치될 정도의 좀비라면 열화판 성속성 스킬만으로도 충분하다.
상원이 손끝에 맺힌 분홍 불꽃을 던졌다.
휙 하고 날아간 불꽃이 수인에게 작렬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수인은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시체 타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오디나스!"
상원의 외침에 수십 개의 머리가 목을 굽혀 상원을 내려다보았다.
빈 눈동자 속에서 검푸른 귀신불이 이글거렸다.
"이정도 까지 해도 모르겠냐! 이것들은 나한테 안통해!"
"너... 뭐냐...."
오디나스의 목소리에서 의문이 읽혔다.
"뭐긴, 수험자지!"
대답한 상원은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역시, 너는 네 스승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구나!"
"으으윽...!"
<아나르>의 사람들은 존재조차도 잘 몰랐던, 대강령술사 오디나스의 스승.
이게 오디나스의 발작버튼이다.
"닥쳐!"
오디나스가 포효했다.
그 포효에 주변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끄아아악!"
털썩, 박명희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정신차리세요!"
박명희에게 날듯이 달려간 상원이 명희의 뺨을 두드렸다.
그녀의 동공은 힘없이 벌어져 있었고 입가로 침이 줄줄 흘렀다.
사지는 주체가 안 되는 듯 경련하고 있었다.
오디나스의 포효에 정신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총재님을 위한 일입니다! 여기서 포기하실 겁니까!"
상원이 명희의 두 어깨를 붙잡고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명희의 눈빛이 돌아왔다.
"총재님을 위해서."
명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결연하게 말했다.
상원은 뒤를 돌아보았다.
오디나스가 빙의한 의령수의 거체가 미친 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건 더 이상 나무라고 할 수 없었다.
분노한 다두사(多頭巳) 그 자체였다.
"이 벌레 같은 놈이!"
오디나스의 외침과 함께, 의령수의 수많은 목들 중 하나가 쩍 하는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떨어진 목에서 수백 줄기 잔가지들이 자라나 서로 꼬아지며 형체를 만들어나가다, 이윽고 거대한 거미 모양이 되었다.
해골 머리에 거미의 몸통을 한 저것이 오디나스가 의령수를 쪼개 만든 3급 마물 <망령 거미>였다.
"끼에에엑!"
망령 거미가 기분 나쁘게 울부짖으며 상원을 향해 달려왔다.
콱!
상원은 명희를 안고 단숨에 뒤로 도약했고, 방금 전까지 상원이 있던 자리에 망령 거미의 날카로운 이빨이 박혔다.
푸스슥 하고 아스팔트가 가루가 되어 날렸다.
망령 거미가 머금은 강력한 독의 효과였다.
"아이님."
명희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거랑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요?"
명희로서는, 이제까지 보아온 상대들과는 격이 다르다고 느꼈을 것이다.
낮에 의령수를 지키던 바늘 구렁이같은 2급 마물도 지금의 수험자들이 넘볼 수 없는 상대였다.
더군다가 저 놈은 3급이다.
하지만 상원은 아니었다.
<암흑용>이니 <태고의 거수>니 하는, 시험 후반부에 만날 마물들에 비하면 망령 거미는 말 그대로 그냥 거미에 불과했다.
상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명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양 손끝에 하늘의 불씨를 켜고 망령 거미를 향해 돌진했다.
쩍, 110의 물리력과 40의 술력을 동시에 담은 성스러운 주먹이 망령 거미의 정수리에 박혔다.
"끄어어억!"
망령 거미가 잠깐 주저앉았다가, 격렬하게 움직이며 상원을 물려고 들었다.
이 정도 주먹에 단명하지 않았다는 게, 망령거미가 세 번째 시험에서 정상적으로 잡으라고 있는 마물이 아님을 말해주었다.
'아니, 애당초 시험을 정상적으로 진행했다면 여기서 망령 거미를 만날 이유가 없지.'
대강령술사 공략전은 오디나스가 주구장창 소환하는 특수 좀비들을 밤새 상대하는 시험이다.
상원에겐 손쉬운 일이었고, 그에 맞는 보상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상원은 그 정도 보상에 만족하지 않았다.
상원이 얻어야 하는 아이템 의령수의 심장은 그런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다.
빡! 빡!
상원이 거미의 정수리에 주먹을 두 번 더 꽂아 넣었다.
제아무리 강해도 그것까지 버틸 수는 없었는지, 망령 거미의 머리가 부셔져 내렸고 남은 몸뚱이는 검푸른 불꽃에 타 재가 되어버렸다.
"이게 끝이 아니잖아?"
상원이 우렁차게 외쳤다.
"너! 죽인다!"
투두두둑, 몇십 개의 머리가 한 번에 쏟아져 내렸다.
그것들이 땅바닥에서 꿈틀거리다 수십 마리 망령 거미가 되었다.
"끄아아악!"
수십 마리 거미들이 일제히 절규하며 상원에게 달려들었다.
"조심하세요!"
명희가 외쳤다.
'저것들을 모조리 상대하는 건 그렇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상원이 얼굴 근처로 두 주먹을 들어 올리자, 환하게 불타는 주먹이 상원의 얼굴을 가렸다.
전신의 근육이 긴장했다.
그때였다.
"오오오오오오."
아주 굵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됐다!'
상원이 씩 웃으며 광장 한 편을 보았다.
<20층의 흑마술 양초>, 양초가 내뿜는 불꽃의 색깔이 바뀌었다.
양초는 음침한 보라색 빛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오오 하는 목소리는 흑마술 양초가 타면서 나는 소리였다.
모두, 양초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디버프란 디버프는 있는 대로 뿌려대는 그 효과를.
흑마술 양초를 가져온 두 번째 이유는 그 강력한 디버프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였다.
빛을 받은 좀비들과 망령 거미들의 사지가 연보라색으로 물들면서, 움직임이 확연히 느려졌다.
"그... 으으윽!"
오디나스가 침음성을 냈다.
"오디나스! 이제부터가 진짜다!"
뱃심을 가득 담아 외치고 나서, 상원이 잔뜩 느려진 망령 거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