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대강령술사 공략전 (1)
검푸른 밤이 황혼을 밀어냈다.
햇살이 떠난 하늘에 별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성이다."
누군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짙은 먹구름 아래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는 비처럼, 별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별이 지는 하늘은 멸망한 세계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달이 뜨기 전까지는.
어느새 새파간 보름달이 하늘에 휘영청 했다.
"볼 때마다 너무 기분 나쁘네 저거."
"어우, 정말.“
수험자들이 웅성거렸다.
새파간 달빛을 받아, 지상의 것들도 파란 빛을 내뿜었다.
그 불길한 푸른 빛에 수험자들이 몸서리를 쳤다.
"꿈이면 좋겠습니다."
문혁이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유성우가 거세지고 있었다.
떨어진 별들이 하늘에 남긴 하얀 꼬리가 마치 사선으로 떨어지는 소나기 같았다.
그 별빛과 함께, 잊혀진 이들이 이 땅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들이 한 번 추방당했던, 새하늘 시험의 땅으로.
[세 번째 시험, <불꽃 지키기>의 두 번째 밤이 시작됩니다.]
[좀비들로부터 불꽃을 지켜야 합니다.]
두 번째 밤을 선포하는 메시지가 떴다.
시스템 메시지를 듣고, 상원은 역사(驛舍)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 형님 어디 가세요?"
"확인할 게 있어서."
만웅의 물음에 짧게 대답하고, 상원은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
평상시 성역(聖域) 서울역의 사람들은 두 군데에 모여 있었다.
한 곳은 성화(聖火)가 있는 서울역 동편 광장, 다른 곳은 역사 북쪽에 바로 붙어있는 대형 마트였다.
사람들은 성화 곁에서 쉬거나, 마트에서 먹고 씻었다.
굳이 폐허뿐인 역사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록시가 물건을 파는 중이라, 역사 안에는 사람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별빛이 전기가 끊긴 역사 안을 어슴푸레하게 비추고 있었다.
상원이 품속에서 작은 카드지갑을 꺼냈다.
록시와 전속 계약한 투자자만이 살 수 있는 물건, 유물급 보구 브라이싱크론 지갑이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카드지갑일 뿐이지만, 아공간(亞空間)과 연결되어 있어 상당히 많은 물건을 수납할 수 있다.
웬만한 전공서적만큼 커다란 상원의 손이 지갑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손을 더듬을 필요는 없었다.
어떤 물건을 꺼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상원의 손에 그 물건이 잡혔고, 상원은 그걸 지갑 밖으로 꺼냈다.
은은한 보랏빛을 띤, 무너진 건물의 기둥이라고 하는 게 적절할 정도로 거대한 양초였다.
매끈한 표면엔 피처럼 새빨간 색으로 부정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상원은 손가락을 뻗어 양초의 표면을 문질러보았다.
양초를 따라 흐르는 귀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상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사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상원이 사람 없는 곳을 찾은 건 지갑에 넣어둔 양초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정부청사 20층과 연결된 악마의 제단에서 얻은 <20층의 흑마술 양초>.
피우면 주변에 저주란 저주는 있는 대로 뿌려대는 흉악한 물건이다.
'회귀 전엔 이거 많이 썼었지.'
상원이 양초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흑마술 양초>를 얻기 위한 정부청사 공략은 회귀 전엔 고작 3층에서 그쳤다.
그렇게 얻은 <3층의 흑마술 양초>로도 사선을 몇 번 넘겼다.
회귀 후엔 20층을 간단하게 돌파했고, 그렇게 얻은 <20층의 흑마술 양초>는 <3층의 흑마술 양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런데 그걸 쓸 일이 없었네.‘
상원이 받은 <신화의 몸>은 그만큼 엄청난 물건이었다.
세 번째 시험에서 능력치 총합 150.
상원이 시험을 치르는 데, 흑마술 양초의 디버프 같은 건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의령수의 심장을 얻으려면 흑마술 양초가 반드시 필요했다.
의령수의 귀신을 다시 만나러 갈 시간이 되었다.
회귀 전에 수많은 사선을 넘었지만, 의령수에서 만났던 오디나스는 특별했다.
50번째 시험까지 가는 동안, 그와 같은 압박감을 느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사실 오디나스는 그렇게 강한 것도 아니지만, 세 번째 시험에 배치해놓기에 괴물인 건 맞지.'
생전의 트라우마가 찾아오는 느낌이었다.
상원이 큰 숨을 들이쉬었다.
폐 끝까지 공기가 찼다.
'상원아, 힘든 일이 있을 땐 이렇게 숨을 쉬어 봐. 후욱, 하고 크게.'
누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누나 얼굴이 스쳐가면서 입 끝에 쓴 맛이 도는 것 같았다.
파하 하고, 상원이 그 커다란 폐에 들어찼던 숨을 한 번에 내뱉었다.
'이제 가야 한다.'
상원은 지갑에 양초를 집어넣고 건물 밖으로 나섰다.
저 멀리, 죽은 이들의 군세가 성화를 향해 꿈틀대며 몰려오고 있었다.
서울역의 수험자들이 성화를 에워쌌다.
그들의 얼굴에서, 단 하나의 좀비도 성화에 뛰어들지 못하게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읽혔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문혁이 쥔 별운검의 칼날에 예리한 빛이 감돌았고, 만웅의 나이프에선 보라색 검기가 일렁였다.
혜경의 손끝에는 검은 손톱이 돋았고, 진아의 손끝에는 파란 불꽃이 춤추었다.
[특수 좀비들이 이 땅에 강림합니다.]
퉁 퉁
먼 곳에서 가느다란 회색 빛줄기들이 땅에 내리꽂혔고, 북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연속해서 들려왔다.
특수 좀비들이 시험장에 소환되는 소리였다.
진아의 표정이 굳었다.
낙원의 수문장이라는 최상급 성령(聖靈)을 수호신으로 두고도 그와 상극인 좀비들에게 험한 꼴을 당했다.
구겨진 자존심도 자존심이거니와 죽음에 직면했던 트라우마까지 한 번에 그녀를 덮쳤을 것이다.
혜경이 진아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진아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얼굴까지 창백해진 채로 그녀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상원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 진아의 앞에 섰다.
상원의 커다란 그림자가 진아를 덮었다.
진아가 상원을 올려다 보았다.
상원은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상원의 널따란 손은 진아의 가녀린 어깨를 한 번에 감쌌다.
"진아씨."
상원이 진아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떤 상태일지 짐작은 되었다.
그녀의 수호신인 낙원의 수호자는 무리한 강림과 부상의 여파로 침묵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기도해도 수호신이 응답하지 않는다.
캄캄한 길을 조명 하나에 의지해서 걷는데 갑자기 조명이 꺼져버린, 그런 느낌 아닐까.
굳건한 윤진아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이럴 때가 좋은 인상을 남기기 쉬울 때다.
상원은 준비해둔 말을 꺼냈다.
"진아씨도, 진아씨의 수호신도, 이런 시험 정도는 충분히 이겨내실 수 있습니다."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믿음을 잃지 마세요.“
상원이 힘주어 말했다.
사실 하나마나 한 말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그런 하나마나 한 말이 필요할 때가 있다.
지금처럼.
또륵, 하고 진아의 볼 위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진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의 분홍 불꽃이 강해졌다.
‘이 정도면 일을 맡길 수 있겠다.’
두 번째 시험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을.
무투계인 만웅이나 문혁에게 맡길 일은 아니다.
창훈 때문에 불꽃을 떠나지 못하는 혜경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자정이 되면, 메세지가 들릴 겁니다. 그러면 진아씨는 저 계단 위, 아까 저희가 올라왔던 에스컬레이터 앞으로 가주세요. 거기를 막아주시면 됩니다."
결연한 표정으로 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실한 진아의 눈에 의문은 없었다.
믿음과 의문은 친하지 않다.
독생자를 사칭한 게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상원씨, 진아 아직 몸도 안좋은데."
"아니야 언니."
걱정이 담긴 혜경의 말에 진아가 답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나,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는 말에 힘이 실려 있었다.
"할게요 상원씨. 자정에, 에스컬레이터 앞으로."
"예, 자정에 에스컬레이터 앞으로."
자정이 되면 서울역 지하에 문이 열린다.
지옥으로 통하는 문이.
지옥문을 통해 쏟아져 나온 새타니와 그슨대들이 에스컬레이터를 올라올 것이다.
회귀 전 회차에선 그걸 제대로 막지 못해서 성화가 꺼질 뻔 했다.
그러면 낙원의 성화고 뭐고 할 것 없이, 성역 서울역에 귀속된 수험자들은 모조리 탈락했을 것이다.
그 때를 생각하니 등골을 타고 서늘한 냉기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그 땐 윤진아가 없었지.'
성(聖)속성 능력자인 윤진아는 악마나 언데드와는 상극이었다.
그런 윤진아가, 첫째날 밤에 <검은 뱀 기사단>을 상대하다 탈진해버렸다.
이번엔 상원이 적절한 시점에 윤진아를 구했고, 게다가 혜경이 진아를 잘 간호한 덕분에 그럭저럭 싸울 수는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됐다.
'운이 좋다.'
의령수까지 해결하고 지옥문까지 관리하기엔 시간이 빠듯했지만, 진아가 회복된 덕에 시간을 조금 벌게 됐다.
"저는 다녀올 데가 있습니다."
상원이 진아와 혜경, 문혁과 만웅을 보며 말했다.
"불꽃 걱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잘 막아주실테니까."
"잘 갔다오슈 형님."
만웅이 코를 슥 문질렀다.
"그래."
상원이 만웅의 어깨를 툭 두드리자, 만웅이 씩 웃었다.
"여긴 걱정하지 마시고. 상원씨 몸 조심하십시오."
"걱정 하나도 안되는데. 그래도 조심하세요."
문혁과 혜경이 웃으며 말했다.
상원도 같이 웃고는, 성화 곁에 서 있는 수험자들을 둘러보았다.
수험자들 틈에서, 상원과 눈을 마주친 박명희와 원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의령수를 해결하기 위해, 상원은 역사를 거쳐 서부 광장으로 나왔다.
서부 광장엔 수험자라곤 없었고, 오로지 좀비를 뿐이었다.
저 좀비들 너머에 의령수가 있다.
저벅 저벅
누군가 상원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슴푸레한 별빛만이 흔들리는 역사의 커다란 어둠 아래로 박명희가 걸어오고 있었다.
"하나된 기쁨이 함께."
"하나된 기쁨이 함께."
두 사람은 손을 모아 인사했다.
"이제 갈겁니다 아이님."
박명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가 좀 나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아까 봤죠? 지혈 정도는 충분해요."
명희의 말에 상원이 웃었다.
'굳이 그 능력까진 필요 없을 것 같지만, 모를 일이지.'
"네, 감사합니다 아이님."
좀비들이 득시글거리는 광장을 본 박명희가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저기를... 다 해치고 가야 하는 거지요?"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꼭 가야... 하겠지요?"
"우리의 더 높은 하나 됨을 위한 일입니다."
명희의 목소리는 떨렸고, 상원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잘 따라오세요."
상원이 좀비 떼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의 손끝에서 <하늘의 불씨>가 분홍 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의령수의 심장, 이번에는 반드시 손에 넣는다!’
그렇게, 세 번째 시험의 두 번째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