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황혼 (4)
꾸루루룩.
안개 저 편에서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비둘기? 비둘긴가?"
"웬 비둘기야?"
시험이 시작된 이후, 서울역 주변의 그 수많은 비둘기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짙은 안개에 어울리지 않게 비둘기 소리라니.
웅성대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곧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안개 속에서 광장을 향해 날아오는 작은 그림자를.
꾸루루룩.
울음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짐작한 대로 그건 비둘기였다.
흔하디흔한 비둘기.
다만 도심에서 보는 것들보다는 더 작고 꼬질꼬질했다.
비둘기가 곧장 상원을 향해 날아와 상원의 널따란 어깨 위에 앉았다.
"아이고, 우리 투자자님."
비둘기가 꽥꽥 소리를 질렀다.
높낮이가 분명하고 걸걸한 목소리.
그건 성전 상인 록시의 목소리였다.
상원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투자가 효과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하는 비둘기는 록시의 전용 메신저, <성전 상인의 전서구>다.
<전서구>는 록시가 고객과 원격으로 소통하기 위해 만든 도구였다.
록시와 고객 간의 무전기랄까.
승천 게임의 세계에서 성장하는 건 수험자들만이 아니다.
록시나 골리야스, 레힌도프 같은 상인들도 독점 물품을 팔고 상단을 꾸리며 유통망을 구축하면서 성장해간다.
'회귀 전엔 록시가 전서구 만든 게 여섯 번째 시험이었던 것 같은데. 전속 계약을 맺은 보람이 있다.'
회귀 전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성장세였다.
'이 정도면 브라이싱크론 지갑의 두 번째 기능 개방도 머지 않았군.'
브라이싱크론 지갑의 두 번째 기능은 대부분의 상인들이라면 꿈도 못 꾸는 것이었다.
오직 성전 상인 록시와 전속 계약한 투자자에게만 개방되는 기능.
상원이 록시와 전속 계약을 맺고 그에게 투자를 결심한 이유 중 하나가 그거였다.
골리야스나 레힌도프 같은,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상인들에 비하면 록시가 살짝 부족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록시에게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바로 상원이 입맛대로 주무를 수 있는 상인이라는 것.
시험을 시작하자마자 만난 상인이 대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었다.
록시를 대상으로 성장시켜 이용하는 게 상원의 계획 중 하나였다.
상원이 어깨를 향해 손을 올리자, 비둘기가 푸드덕거리며 손으로 옮겨갔다.
비둘기가 좌우로 고개를 꺾었다.
'불신자 조상원이 몸소 택한 상인인데, 잘 성장하셔야지 그럼.'
그리고 상원은 깨닫게 되었다.
수험자가 상인을 선택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승천 게임에서 상인과 수험자는 철저한 갑을 관계다.
상인들은 시험을 풀어나가기 위한 보구며 아이템들을 잔뜩 가지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상원이 록시를 '선택'했다는 건, 상원이 승천 게임의 암묵적인 룰들을 하나씩 엎고 있다는 뜻이었다.
'조금 더 맛있게 해보라고.'
기계장치의 신이 했던 말이 스쳐갔다.
'그래요 더 맛있게 해드리리다. 아주 배터져 죽을 정도로.'
"이 비둘기 방금 말한거에요?"
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상원은 낙원의 수문장과 수호계약 할 때를 떠올리며, '진아씨도 비둘기랑 대화하지 않았나요?'라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 대신 고개만 끄덕거렸을 뿐.
"별 일이 다 있네요. 말하는 비둘기라니."
'혜경씨는 두 발로 일어서는 염소도 보셨잖습니까.'라는 말도 하려다 말았다.
"신기하죠 투자자님? 말하는 비둘기."
전서구가 꽥꽥거렸다.
'어제는 등짝에 태엽 꽂은 다람쥐도 봤는데요.'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상원은 씩 웃었다.
"뭐야, 반응이 왜 이렇게 시원찮아? 인간미 없게시리. 하기사 뭐 우리 투자자님 인간미 없었던 게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이제 시험 시작한 지 3일짼데. 어제 오늘 일 맞는데요."
"에이 뭘 또 그런 걸 따지시고 그래 참."
전서구가 걸걸한 목소리로 너스레를 떨었다.
회귀 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
'심장에 말뚝을 꽂아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이 독사 같은 장사꾼도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네.'
"그래서, 무슨 용건인가요?"
가벼운 미소와 함께 상원이 물었다.
"본론부터 하시자고? 아이고 참, 성격도 급하시기는."
그렇게 물은 전서구가 구루루룩 소리를 내고 안개 속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서서히 걷히는 안개를 뚫고 록시가 나타났다.
까만 얼굴과 대조를 이루는 푸른 눈동자가 광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타고 다니는 키 큰 낙타가 푸르륵 흘린 침이 광장 바닥에 떨어졌다.
"투자자님, 물건 준비됐수다."
록시가 호쾌하게 외쳤다.
* * *
커다란 천막 꼭대기에서 요정이 날아다니며 밝은 빛을 내뿜었다.
텐트 내부는 저번에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눈에 띄게 밝아지고 깔끔해져 있었다.
상점의 인테리어는 상인의 역량을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다.
전서구가 보여줬던 것처럼, 천막의 인테리어도 록시가 빠른 속도로 성장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자, 투자자님."
록시가 널따란 테이블 위에 아이템들을 늘어놓았다.
사람 팔뚝만 한 날카로운 짐승의 발톱들과 화살촉처럼 생긴 비늘들.
발톱은 <늪지 늑대인간>의 아종인 <늪지 광견>의 발톱, 그리고 비늘은 <바늘 구렁이>의 아종인 <화살 구렁이>가 주는 아이템이었다.
"늪지 광견의 발톱 여섯 개, 그리고 구렁이 화살촉이 세 개. 다 해서 이백 하고 칠십 골드."
상원이 물건을 집어 꼼꼼하게 살폈다.
충분히 날카롭고 단단한지, 부서지진 않았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독기는 충분한지.
상원은 발톱 끝부분으로 검지를 눌러보았다.
작은 생채기가 났고 곧 검지가 저려왔다.
'의체가 이렇게 저릴 정도라면 효과는 충분한 것 같다.'
"좋네요. 질은 확실하군요."
"그럼, 그럼. 성전 상인 록시라니까."
록시가 두 손을 포개 쥐며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충분하다. 아니, 오히려 기대한 것 이상이네. 계획엔 차질이 없겠다.'
물건의 질에 만족감을 느끼며 상원이 록시에게 말을 걸었다.
"록시, 상품 중에 <판금 장갑> 있지요? 유물급."
"아 그럼요 그럼요."
대답한 록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투자자님은 그걸 어떻게 알고 계셔? 설마 전에 카탈로그 한 번 보셨다고 그거 다 외운 거에요?"
"그건 신경쓰실 것 없고."
상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제조식을 알려드릴테니까, 그대로 만들어주세요."
상원의 말에 록시가 눈이 빠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제... 조식?"
어떻게 일개 수험자가, 수호신도 없는 수험자가 그걸 알고 있냐는 표정일 것이다.
"우리 투자자님 도대체 정체가 뭐유? 혹시 개성이 <장비 과적>이나 <기가 막히는 아이템빨> 같은 거라도 돼요?"
"그렇지는 않고요."
상원이 록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록시가 손을 마주잡자 두 사람의 손이 파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록시와 상원 간에 정보가 오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호기심에서 감탄으로, 그리고 경악으로.
손을 쥔 록시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이걸... 이렇게 만들 수가 있다고?"
록시의 말에 상원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름발이 대장장이>나 <강철 용광로의 주인>도 이런 건 모를 거요. 돌겠네."
빛이 꺼졌다.
"그래서, 투자자님. 이건 언제까지 필요하슈?"
"내일 새벽 네 시 전까지면 됩니다."
"새벽 네 시라."
록시가 천장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충분하지. 충분하고말고."
록시가 두 손을 모아 쥐었다.
"걱정 붙들어 매시고. 물건은 이따 새벽에 드리리다. 확실하게."
"알겠습니다, 사장님."
‘이제 <하늘악어>를 잡을 물건도 준비됐다.’
씩 웃으며, 상원은 천막을 나섰다.
* * *
"일은 다 보셨습니까."
커다란 성화 곁에 있는 록시의 천막, 그 앞으로 수많은 수험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줄을 서 있던 문혁이 상원에게 말을 걸었다.
문혁 뒤에 서 있던 만웅이 손을 흔들었다.
상원도 손을 흔들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회귀 전에는, 동맹 관계인 이들은 있었지만 동료라 할 만한 사람들은 없었다.
'물론 지금도 동료라 칭하긴 이른 것 같긴 하지만.'
전직 특수부대원 백문혁.
상원이 그를 동료로 삼으려고 생각한 건 그의 수호신이 해안선의 귀신이라는 초특급 승천자이기 때문이다.
강상중의 수하 김만웅.
상원의 그를 곁에 두고 있는 건 언젠가 김만웅의 고용주인 콘크리트 회장, 강상중을 치는 데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의도로 친해진 이들은 없다.
그건 윤진아나 송혜경도 마찬가지다.
친구 만들기는 승천 게임에서 하기엔 너무 한가한 짓 아닌가.
하지만 곁에는 두어야 한다.
언젠가는 이들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이들의 힘까지 모두 짜내야 일곱 별의 왕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여태껏 살아오면서 친구 같은 건 만든 적 없다. 앞으로도... 없겠지 아마.'
씁쓸한 기분에 상원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문혁과 만웅에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얘들아, 인사드려라."
"안녕하십니까 형님."
만웅 뒤에 서 있던 어깨들이 허리를 숙였다.
"허."
자기 동생이면 상원에게도 동생이라고 했던가.
'김만웅이, 참 재밌는 캐릭터였네.'
커다란 어깨들의 인사는 주변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그런 거 안하면 안됩니까."
원치 않던 이목이 집중되자, 문혁이 안절부절 못하며 말했다.
"아이, 이런 게 다 애정표현이지 애정표현. 우리 문혁이 동생은 이런 거 별로 안좋아하나봐?"
"아니, 그 허 참."
문혁이 머리를 문질렀다.
"호칭은 그렇게 정리하셨나보네요?"
"거... 아닙니다."
문혁이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우리 나이 까보니까, 내가 한 살 형이더라고요. 내가 아홉, 우리 문혁이 동생이 여덟."
만웅이 코를 슥 문질렀다.
'당신이 스물 아홉살밖에 안됐었어?'
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나저나 우리 형님은 뭐 무기 같은 거 안 사요? 우리 형님 센 것 같긴 한데, 그 주먹질만 하시는 거 보면 솔직히 내가 좀 안쓰러워서. 내가 좀 사드려?"
"그런데 만웅아 너 은근슬쩍 말이 좀 짧아진 것 같다?"
"아니, 아니. 형님, 그게 아닙니다."
만웅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험상궂은 만웅이 허둥지둥 대는 꼴이 우스워 상원은 피식 웃었다.
"됐다. 무기는 주문했어."
"아 그래요?"
"그래. 저번에 말한 것처럼 오늘 밤은 어젯밤보다 어려울거니까 준비 잘 하고."
만웅과 문혁을 보며 이야기하고 나서 상원은 고개를 돌렸다.
줄 저 편에 있던 하나교도들, 원강수와 박명희가 상원과 눈을 맞췄다.
상원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도 알았다는 뜻으로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역을 둘러쌌던 자욱한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이제 만나러 가볼까, 대강령술사 오디나스.'
황혼이 서쪽 산의 저편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