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황혼 (3)
서쪽 하늘은 이제 보라색을 띄어가고 있었다.
밤이 되면 자기를 따라 의령수로 올 것.
상원은 하나교도들에게 지령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래요, 이따 봐요."
"하나된 기쁨이 함께하길."
돌아서는 상원의 뒤로 하나교도들의 인사가 들려왔다.
상원은 성화의 둘레를 따라 걸었다.
집채만큼 커다란 성화 곁에서 수많은 수험자들이 쉬고 있었다.
어떤 이는 입으로 피를 쏟고 있었고, 또 어떤 이는 팔 끝을 지혈하고 있었다.
성역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적어도 좀비가 되어 다시 일어나는 꼴은 면했군.'
그렇게 성화 둘레를 따라 조금 걸어가니 낯선 풍경이 나타났다.
수험자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대체 저게 뭔지 모르겠네."
"그러게... 성역에서 저런 짓을 해도 되는 건가?"
웅성거리는 수험자들, 그로부터 저 멀리 사람이 누워 있었다.
누워있는 사람의 주위엔 기둥 같은 것들이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게 뭔지, 상원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저걸 시킨 게 상원이니까.
검은 숲의 목자 때문에 앓고 있는 창훈, 그리고 상원이 혜경에게 주문한 주술나무들이었다.
수험자들이 웅성거리는 이유도 짐작은 갔다.
주술나무를 없애는 게 시험의 목푠데, 그 주술나무가 성역 한가운데서 타고 있으니 누군들 좋게 볼리 없는 것이었다.
'그걸 끄려고 했다간... 좋은 꼴은 못 봤을 테고.'
그 곁에서 혜경이 불안한 눈으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남편을 지키는 아내의 손끝엔 검은 손톱이 흉흉하게 돋아 있었다.
상원은 수험자들을 헤치고 들어갔다.
"어... 어어? 거기 가면 안되는데?"
"쯧쯧, 무슨 일을 당하려고 저러다."
주변에서 만류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상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의 반응으로 보아, 창훈의 곁에 함부로 다가간 수험자들은 곤죽이 되었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상원을 제외하면 지금 서울역에 혜경을 상대할 수 있는 수험자는 없다.
늪 속의 늑대인간들처럼 잡아먹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크르릉!"
남은 거리가 열 발자국 남짓 될 정도로 다가가자, 혜경이 경계하며 이를 드러내보였다.
그러기를 잠시.
"어... 상원씨?"
혜경이 표정을 풀었다.
비죽 솟았던 손톱이 손끝으로 들어갔다.
상원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창훈 곁에서 타오르는 주술나무를 살펴보았다.
주술나무의 두 눈구멍, 그리고 이마에 새겨진 세 개의 표식이 보랏빛을 내며 타들어갔다.
연기가 가늘어서 향을 태우는 것 같은 모양새였는데, 냄새도 진한 향과 같았다.
상원은 창훈의 곁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아 상태를 살폈다.
창훈은 쌕쌕 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거미줄처럼 얼굴을 가득 덮었던 검은 핏발은 거의 가라앉아 있었다.
상원은 조심스럽게 창훈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비 맞은 듯 축축했던 이마는 보송하게 말라 있었고, 펄펄 끓는듯 한 열도 거의 없어져 있었다.
'효과가 괜찮다. 이 정도면... 네 번째 시험이 끝날 때까지는 걱정 없겠네.'
상원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잘 된 건가요?"
혜경이 물었다.
"아까보다 상태는 훨씬 낫습니다. 잘해주셨어요. 이 정도면 네 번째 시험이 끝날 때까지는 걱정 없을 겁니다."
초반부에는 이 정도 간단한 처치로도 시험 두 개는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시험이 진행될수록 검은 숲의 목자를 억누르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열세 번째 시험만 끝나면 당신이랑도 안녕이다, 검은 숲의 목자.’
상원이 혜경을 보며 생각했다.
"아... 다행이에요."
혜경이 눈가를 닦았다.
남편을 보는 그녀의 눈빛에 안도와 불안이 함께 담겨 있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사흘이죠...? 사흘 만에 세상이 이렇게 돼버리고...."
혜경이 울먹였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많을 겁니다."
상원의 말에 혜경이 상원을 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안돼요, 상원씨. 제발. 오빠까지 어떻게 돼버리면... 난 정말."
그의 손이라도 단단하게 붙잡고 싶었을까, 혜경이 상원의 손을 세게 쥐었다.
악력이 어찌나 센지, 얼얼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지만."
상원도 그녀의 손을 세게 쥐었다.
정신을 차리라는 뜻을 담아서.
"그럴수록, 혜경씨가 정신을 잘 차리셔야 됩니다. 방금 하신 것처럼, 매 시험마다, 창훈씨를 지킬 방법은 있습니다."
"아... 알겠어요."
혜경이 두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고갯짓에서 굳은 결의가 읽혔다.
'정신을 잘 차린다는 게... 말이 쉽지.'
혜경의 상태는 몹시 불안정했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끝없는 광기의 심연으로 추락해버리는 아슬아슬한 외줄 위를, 그녀는 걷고 있었다.
'이 정도로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검은 숲의 목자가 택한 화신이 맑은 정신을 유지한다는 것, 새하늘교는 그런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었다.
검은 숲의 목자를 수호신으로 삼았는데도 지금 이렇게 대화가 된다는 것, 그 사실 자체가 혜경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검은 숲의 목자....'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잊어 보려고 몇 년을 시도했지만 잊혀지지 않았던 그 이름.
갑자기 오래된 기억이 상원을 덮쳤다.
"아...."
거센 물결에 삼켜진 것처럼, 상원은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알겠지요, 상원 군. 끝까지 살아남아야 합니다. 상은 양에게서. 검은 숲의 목자에게서."
그렇게 말하면서, 교리 강사는 방 한 면을 가득 메운 책장을 가리켰다.
새하늘 시험을 통과할 계획을 가르치던 목소리.
그 계획이 빽빽하게 담겨 있던, 삼백 페이지짜리 공책이 일백 하고 아흔 여덟 권.
그걸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외워야 했던 나날들.
그 기간이 10년이었다.
배설물과 음식물이 썩어가는 냄새로 숨 쉬는 것조차 힘든 어두운 방에서 거의 나가지도 못하는 채로, 상원은 10년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상원이 미치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상원이 정신줄을 붙잡을 수 있었던 건, 방에 갇힌 그의 혈육 때문이었다.
그 방 한가운데서 쇠사슬에 묶여 혼자 낄낄대고 울부짖고 하다가, 아주 가끔 정신이 맑아질 때면 흐느끼며 동생의 이름을 부르던 사람.
조상원의 누나 조상은.
새하늘교에 들어갈 때 그녀의 나이가 열 여덟이었다.
'새하늘교에서 도망칠 때 누나가 스물일곱이었지. 스물일곱이면... 송혜경이 지금 스물일곱이라 그랬던가.'
왜 자꾸, 혜경에게서 누나 생각이 날까.
검은 숲의 목자 때문인가, 아니면...
"상원아."
상원의 이름을 부르던 누나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왠지 혜경의 목소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그만하고 싶어."
뚝 뚝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산발한 머리카락에 가려,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상원은 손을 뻗어 상은의 머리칼을 걷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을 때,
"!!"
헉 하고 숨을 뱉으며 상원은 물러났다.
머리칼 아래 있는 얼굴은, 상은이 아닌 혜경이었다.
두 눈이 새까맣게 물든 혜경이 으르렁거리며 상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 * *
"상원씨? 상원씨?"
혜경의 목소리에 상원은 정신을 차렸다.
"아, 아...."
"왜 그래요? 갑자기 멍하게...."
"아닙니다. 죄송해요."
상원이 짧은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몸은 새하늘교에서 도망쳤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군.'
상원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혜경씨. 어렵더라도... 힘내주세요. 창훈씨를 위한 일이니까."
상원이 창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요, 언니는 잘 해낼 거에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그들의 대화에 끼었다.
윤진아가 혜경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세 번째 시험의 첫 번째 밤, 그녀의 수호신인 낙원의 수문장이 그녀의 몸에 강림했었다.
연약한 진아의 몸은 최상급 신령의 강신(降神)을 버티지 못했다.
진아가 입은 내상은 심각한 수준이어서, 상원은 그녀가 세 번째 시험이 끝나기 전까지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아... 진아씨, 몸은 좀 괜찮으세요?"
"상원 씨랑, 언니 덕분에요. 낮 동안에 언니가 많이 보살펴줬어요. 남편 간호하기도 힘들 텐데."
진아가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 진아야. 아직 몸 안 좋을 텐데 앉아서 쉬고 있지."
앉아있던 혜경이 일어났다.
껑충한 혜경이 진아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아니야 언니."
그렇게 말하며, 진아가 혜경을 끌어안았다.
혜경은 진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키가 작고 마른 진아, 키가 크고 체구가 넉넉한 혜경.
진아가 혜경의 품에 안기자 그 모습이 마치 엄마와 딸 같았다.
"두 분 많이 친해지셨네요."
그 모습을 보며 상원이 말했다.
"우리, 언니 동생 하기로 했어요."
진아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낙원의 성화가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상원의 기억 속에 있는 낙원의 성화는 준엄한 심판 그 자체였다.
승천 게임의 마물들 그리고 수험자들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는 그 오만한 표정.
그게 상원이 알고 있는, 윤진아의 거의 유일한 표정이었다.
"희한한 일이네."
"네?"
"아닙니다."
진아의 물음에 대답하며 상원이 몸을 일으켰다.
상원은, 정확히는 신화의 몸은 일반인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거구였다.
진아는 물론 키가 큰 혜경도 고개를 꺾어 상원을 올려다보았다.
"근데 상원씨 진짜 크시네요. 키가 몇이에요? 2미터 넘죠?"
"2미터가 뭐야, 220은 되겠는데? 우리나라에 이런 사람이 있는 줄 몰랐네?"
"언니 정말? 대박...."
그 사이 정이 꽤 든 듯, 혜경과 진아가 웃으며 잡담을 나누었다.
성화가 비추는 분홍빛 불꽃이 천천히 너울거려서, 왠지 캠프파이어 옆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수험자란 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들인데, 그렇게 정 붙여서 좋을 거 없을 텐데.'
그들을 바라보며 상원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정겹고 평화로운 승천 시험 같은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애당초 그런 게 가능하리라 보지도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그 느낌이 썩 좋았다.
"두 분 앞으로 부디,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상원이 웃으며 말했다.
"예, 상원씨도요. 뭐 상원 씨는 워낙 쎄니까... 하나도 조심 안 해도 되겠지만."
"그래 진아야. 우리는 우리나 잘 챙기자."
혜경이 자리에 앉아, 누워 있는 창훈의 손을 꼭 쥐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을까, 창훈의 입가에도 희미한 웃음이 돌았다.
그때였다.
딸랑, 딸랑.
종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은 고개를 돌려 종소리가 들려온 안개 속을 바라보았다.
안개 속에서 길쭉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낙타를 탄 남자, 성전 상인 록시였다.
'록시가 나타났다는 건... 이제 곧 두 번째 밤이 시작된다는 소리군.'
록시가 재료를 준비해두었을 것이다.
세 번째 시험에서 반드시 얻어야 할 두 번째 물건을 얻기 위해 필요한 재료를.
그건 의령수의 귀신들을 마주해야 할 시간도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의령수, 그 흉한 주술나무에 씌인 거대한 그림자가 상원의 머릿속을 스쳤다.
'오랜만에 다시 보겠네, <오디나스>.'
<의령수의 심장>을 얻으려면 보통 수험자들이라면 불가능한 방법으로 숨은 시험을 깨야 한다.
상원에게도 힘든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의령수의 심장을 얻지 못하면 다섯 번째 별도 얻을 수 없으니까.
일곱 별의 왕관을 얻는 여정은 그런 불가능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수호신이 없어도 승천할 수 있는 칭호, 그런 걸 그냥은 못 주겠다는 거지.’
일곱 별의 왕관, 불신자 조상원이 승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상원은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