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26화 (26/230)

제26화. 황혼 (1)

상원이 암기 천재이긴 해도 회귀 전 만났던 모든 수험자들을 기억하는 건 아니다.

상원이 얼굴을 떠올렸다는 건 전 회차에 상원과 깊이 얽혀 있었다는 의미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저 중년인들은 결코 좋은 쪽으로 얽혀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래도 모르니, 확인은 해보자.'

눈에 띄지 않게, 상원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상원의 바로 뒤에서 걷던 만웅부터 해서, 다른 일행들이 상원을 앞섰다.

그러자 길을 모르는 만웅이 선두에 서게 됐다.

"어... 형님 언제?"

당황한 만웅이 상원을 불렀다.

"이거 왜 갑자기...."

그때였다.

누군가 만웅의 말을 잘랐다.

"계속, 계속 갑시다."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남자가 말을 하고 있었다.

부상 때문일까, 목소리엔 가래 끓는 듯한 소리가 섞여 있었다.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문혁이 물었다.

"안 괜찮지! 그러니까 빨리 가야될 거 아냐!"

남자의 대답은 거의 호통에 가까웠다.

"진짜 저 사람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목소리는 왜 저리 커. 부끄럽게시리."

여자가 핀잔을 주었다.

"아니, 고맙다고는 못 할 망정."

만웅이 눈썹을 꿈틀댔다.

"아이고 총각 미안해요. 저 사람이 경우가 좀 없어."

만웅을 향해 여자가 두 손을 모아 보이며 말했다.

"그래도 이 사람이 길을 진짜 잘 찾아요. 안개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사람이니까, 시키는 대로 따라 가요 우리."

"진짜? 믿어도 돼요?"

만웅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렇고 말고! 이래 봬도 내가 개성이 <길잡이>에 <훤히 보기> 스킬도 있어! 나만큼 길 잘 찾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에이 X팔. 쿨럭 쿨럭..."

남자가 악을 바락바락 쓰다가 피거품을 뱉으며 기침을 했다.

"아이 썅! 거 알았으니까 말 좀 그만해요."

만웅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래, 거 빨리 좀 가자고. 아이고, 아이고 나 죽네."

"엄살 좀 그만 떨어요! 기껏 처치 다 해놨더니 소리만 바락바락 질러가지고 상처는 다 벌어지고. 에이 진짜."

남자를 핀잔 주는 여자의 손에서 하얀 빛이 났다.

그렇게 일행은 안개 속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오른쪽, 그, 그 두 시 방향으로 갑시다."

남자는 거침없이 지시를 내렸다.

부상 때문인지 목소리는 흔들렸지만 태도엔 자신감이 가득차 있었다.

“이야 참 거 내비게이션이 따로 없네. 그런데 두 시면... 이 쪽?”

만웅은 조심조심 걸었는데, 그 속도가 상원이 이끌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느렸다.

“아니 아니 거기 말고! 에이 참 진짜. 아 거 형씨는 내비도 제대로 못 따라가?”

만웅이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게 답답했는지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아이 씨, 길 뭐 잘 못 찾을 수도 있지....”

만웅이 말꼬리를 흐렸다.

“아이고, 거 선두를 바꾸던지... 쿨럭, 쿨럭.”

“아 진짜! 소리 좀 지르지 말라고요!”

흥분한 남자가 또 소리를 치다가 피를 토하자, 여자가 핀잔을 주며 치료 스킬을 썼다.

만웅은 선두에서 진땀을 빼고 있었다.

쿡, 어딘가 시트콤같은 광경에 상원이 살짝 웃었다.

"상원씨."

남자를 부축하고 있던 문혁이 상원을 불렀다.

상원은 검지를 뻗어 입술에 갖다 댔다.

'일단 지금은 그냥 갑시다.'

라는 뜻으로.

남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눈치 빠른 문혁은 상원의 동작을 보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걷기 시작했다.

한동안, 만웅의 진땀과 남자의 각혈 그리고 여자의 치료가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안개 저편에 서울역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성화가 쏘아내는 거대한 빛줄기는 안개 속에서도 선명했다.

"허어."

남자가 빛줄기를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다 왔다, 다 왔어. 저게 저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네."

찔끔, 남자의 눈가에 눈물이 작게 맺혔다.

"이야, 아재 찐이네. 진짜 이 정도면 어디 가서 길 잃지는 않겄수."

만웅이 남자에게 말했다.

"그럼! 그랬잖아 내가, 나 우리 산악회에서도 항상 선두에 길잡이였어. 지금도 내가 몸만 성했으면 여러분들 다 끌고 여기 왔어. 그럼 30분도 못 돼서 여기 와가지고 아이고 살았다, 아이고 살았다 할 거라고. 그래, 그러니까 우리 총재님도... 으악!"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남자의 수다를 끊은 건 여자의 손가락이었다.

피를 토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건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의 손가락은 남자의 옆구리를 무자비하게 찔렀다.

순간, 더없이 순박하게만 보였던 여자의 눈에 살벌한 냉기가 감돌았다.

그 찰나를 상원은 놓치지 않았다.

"아이 참, 이 사람이 말이 좀 많죠? 다들 피곤하실텐데... 가서 다들 좀 쉬셔요."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총재님이라는 그 세 글자가 발설된 건 심각한 일일 텐데도.

'고단수네. 저 연기는 좀 배우고 싶네.'

상원은 되돌아 생각해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연기를 했던 걸 기억했다.

<낙원의 수문장>에게 본인이 <독생자>라고 했던 일이라던지.

'앞으로 연기를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상원은 언젠가 연기 관련 스킬을 배울 일이 있으면 꼭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요 아저씨. 몸 관리 잘 하슈. 피 그만 쏟고."

만웅이 남자에게 말했다.

"아이 그래요. 수고했어. 다들 몸 잘 챙기고, 그... 우리 모두 지치지 말고! 두 번째 밤에도 무사합시다!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화이팅이나 한 번...."

"아이고 요새 젊은 사람들은 그런 거 싫어한다니까! 빨리 갑시다 좀. 총각들 고마워요! 우리 같이 오래 가요. 호호호."

주먹을 쥐어 보이는 남자의 등짝을 세게 때리고는, 여자가 남자를 부축하고 돌아섰다.

"잠시만요."

그 때, 상원이 돌아서려는 그들을 불렀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시죠. 저는 조상원입니다."

상원이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며 말해다.

"아... 그래요. 반가워요. 저는 박명희고요. 여기 이 아저씨는 원강수라고 해요.”

말하기 시작할 땐 떫떠름했던 그녀의 말투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 네. 명희씨, 강수씨.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그려 그려. 총각... 이 그렇게 쎄다며? 앞으로 우리 잘 좀 도와줘요. 우리도 얹혀 가야 되겠어 소 등의 쥐 마냥... 하하! 쿨럭 쿨럭... 에이 X팔.”

크게 웃은 강수가 피를 토했다.

“아이고, 몸조리 잘 하시고요. 우리 오늘 밤도 잘 헤쳐나갑시다.”

그리고 돌아서면서, 상원은 한 마디를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하나 된 기쁨이 함께.”

“어...?”

던지듯 말하고서,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의 원강수와 박명희를 두고 상원은 돌아섰다.

“갑시다.”

문혁과 만웅을 데리고, 상원은 불꽃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 * *

"아... 정신 없었습니다."

멀어지는 명희와 강수를 보며 문혁이 이야기했다.

그들의 실루엣이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그런데 상원씨, 왜 갑자기 길 안내를 그만두신 겁니까?"

"어 그러게? 뭐야, 뭐유 갑자기 형님?"

문혁의 물음에 만웅도 눈을 크게 뜨고 상원을 보며 물었다.

"확인해야 할 게 있었습니다."

상원이 대답했다.

"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크게 중요한 건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셔도 혼란스럽기만 할 거라."

상원이 만웅과 문혁을 보았다.

둘 모두 안개 속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상처 입고 마물들의 체액을 뒤집어써 옷도 엉망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저를 믿어주시고. 일단은 두 분 모두 씻고 불 곁에서 몸을 회복하시죠. 곧 밤이 올 겁니다."

대답을 마친 상원이 안개 속에 비치는 서울역의 실루엣 너머에 걸린 뿌연 태양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서쪽 하늘이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저 빛깔이 분홍색에서 연보라색을 거쳐 남색이 되면, 좀비들로부터 불꽃을 지켜야 하는 두 번째 밤이 시작될 것이다.

"두 번째 날에는 첫 번째 날엔 없던 패턴이 추가됩니다. 첫 번째 밤보다 조금 더 어려울 겁니다. 부디 조심하시길."

상원은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까딱 숙이고는 불꽃을 향해 걸었다.

"총재님."

상원은 조용히 그 세 글자를 입속에서 굴려 보았다.

지독한 단어라서일까, 상원은 저 먼 곳에 묻어뒀던 기억이 서서히 살아나는 걸 느꼈다.

폐허가 된 광장 위에서 수백 가지 스킬을 쏟아내며 숱한 수험자들을 도륙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서울 육마귀 중 하나, <하나교>의 총재인 <새하나의 증인> 유성희였다.

* * *

승천계시록은 새하늘교의 경전들 중 하나로, 수험자의 시점에서 <새하늘 시험>을 묘사했다.

그 승천계시록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그중 서울에는 여섯 마귀들이 무리들을 이끌고 모여 자기들을 왕이라 칭하더이다.]

자기들을 왕이라 칭하는 여섯 마귀, 그들이 서울 육마귀들이다.

서울의 수험자들은 자기 수호신이 그 여섯을 지칭하는 대로, 그들을 서울 육마귀라 불렀다.

그들 중 둘과는 목숨을 걸고 싸웠다.

하나가 김만웅의 고용주, <콘크리트 회장> 강상중.

그리고 다른 하나가 <새하나의 증인> 유성희.

'유성희랑 붙었던 게... 열두 번째 시험이었던가?'

그 시험에서, 상원은 수많은 수험자과 함께 유성희가 이끄는 하나교와 전면전을 치렀다.

그녀는 독보적으로 강했다.

한 사람이 한 번에 세 개도 보유하기 힘들 것 같은 스킬들을, 그녀는 수백 개나 난사했다.

난무하는 스킬에 죽어가던 수험자들은 한탄했다.

도대체 저 괴물은 뭐길래, 수백 가지 스킬을 한 번에 쓸 수 있냐고.

하나교가 아닌 수험자들 중 그 비밀을 아는 건 상원 뿐이었다.

그 열쇠는 수험자 유성희의 성현, <성년의 징표>였다.

성년의 징표는 징표를 받은 이들의 모든 스킬을 쓸 수 있게 해주는 특성이다.

'정확히는 '거의 모든' 스킬이긴 하지만.'

유성희뿐만이 아니었다.

하나교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들은, 그들의 모든 스킬을 서로 공유했다.

그게 하나교 교주 유성희의 능력이었다.

상원은 안개 속을 함께 걸었던 남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이 하나교도가 아닌지 의심했고, 그래서 원강수가 길을 이끄는 동안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 여자, 내가 바늘 구렁이 잡는 거 봤다 그랬을 때 이상하다 싶었지.'

안개는 짙었다.

웬만한 수험자들은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활 잘 쏘는 문혁이 고작 몇십 미터 밖에 있는 커다란 바늘 구렁이를 맞추지 못할 정도로.

그런데도 박명희는 문혁의 움직임을 보았다.

그것도 꽤 먼 거리에서.

그렇다면 어떻게 그녀는 상원의 움직임을 그렇게 세세히 볼 수 있었는가?

박명희도 <훤히 보기>같은 투시계 스킬이 있을까?

'그럴 리가 없지.'

박명희는 치유계 스킬을 썼다.

그렇다면 세 번째 시험의 첫 번째 낮, 이제 막 수호계약을 하고 스킬을 익히기 시작한 이 때 치유계 스킬과 투시계 스킬을 모두 가지고 있을 확률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희박하다.

‘지금 그거 두 개를 다 가지고 있다면... 괴물이지 그건.’

회귀 전 서울역에서, 상원은 그런 괴물을 본 기억이 없다.

상원은 가능성을 점검했다.

그러다가 박명희의 얼굴을 기억한 것이다.

서울 육마귀 중 하나, 유성희의 신도였던 그녀를.

원강수가 말한 그 세 글자가 쐐기였다.

총재님, 그 세 글자.

새하늘 시험에서 그렇게 불린 수험자는 단 하나뿐.

하나교도인 박명희는 교주 유성희의 성현, 성년의 징표를 통해 하나교도 원강수의 <훤히 보기>를 쓴 것이다.

원강수만큼은 아니겠지만, 그 정도면 그 거리에서 상원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

‘퍼즐은 풀렸다.’

상원은 몰랐다.

회귀 전 서울역에서부터 하나교의 신도를 만났다는 걸.

‘유성희... 지금 쯤은 강남에 있겠지.’

그리고 그녀의 신도들은 서울 곳곳의 성지에서 암약하고 있을 것이다.

회귀 전의 열두 번째 시험, 그때와 같은 일을 또 겪을 순 없었다.

열네 번째 시험에 있을 두 번째 별을 얻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선 유성희의 발을 최대한 빨리 묶어야 했다.

'싹은 잘라버려야지.'

상원은 유성희의 능력뿐만 아니라 약점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상원의 머릿속에 유성희를 묶기 위한 계획이 섰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높은 계단 위에서 상원은 불꽃이 있는 광장으로 향했다.

거기엔 지친 몸을 추스르고 있는 원강수와 박명희가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