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25화 (25/230)

제25화. 안개 속으로 (5)

사차선 도로 한복판에 자라난 거대한 주술 나무.

똬리를 튼 줄기의 끝에 수십 개는 될 법한 머리가 돋아 있었다.

그 수많은 머리들은 마치 꿈틀대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상원의 목표물 <의령수>였다.

그리고 아이템 <의령수의 심장>은 지금은 얻을 수 없다.

“정말... 끔찍하게도 생겼습니다."

"와 뭔 히드라도 아니고."

문혁과 만웅이 한마디씩 했다.

"젠장, 지금 없앨 게 아니라면... 빨리 갑시다 형님. 진짜 이거 너무 기분 나쁘네."

만웅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세 사람은 의령수를 뒤로 하고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희뿌연 안개 위로 태양이 중천을 지나고 있었다.

"그나저나 상원씨, 저 나무 이름이 의령수입니까?"

"예, 맞아요."

"의령수라고 하면... 삼도천 너머에 있는 나무 아닙니까? 죽은 자의 옷을 매달아 죄의 무게를 재는."

문혁이 골똘한 얼굴로 말했다.

"예, 그렇지요.“

상원이 대답했다.

“문혁씨는 종교나 신화 쪽으로 아시는 게 많은 것 같네요."

의외였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그랬었지.’

수호 계약을 맺기 전, 사마에트가 수험자들에게 목욕제례 이야기를 했을 때.

그 때도 문혁은 종교학적인 이야기를 했었다.

세계 각지의 종교는,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기 앞서 몸을 정화하는 의미로서 목욕제례를 하는 공통의 패턴을 보인다고.

새삼 문혁이 달라보였다.

"아, 전공이 종교학입니다. 비교종교학."

"어...? 대학생이었어? 군인 아니었수?"

만웅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입대하기 전 얘기입니다.“

문혁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야, 가방끈 기시네. 대학도 다니시고."

"이래봬도 석사 수룝니다. 논문은 아직 못썼씁니다만."

문혁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이제 논문 써서 뭐하겠습니까, 심사해 줄 교수도, 학위를 줄 대학도 없을 텐데. 세상이 이 꼴이 될 줄 알았으면... 그냥 좀 놀 걸 그랬습니다.“

학위는, 승천 게임이라는 게 없었던 세상의 가치들 중 하나였다.

새하늘 시험이 시작된 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삶에서 사라져버린 것들.

상원에게는 너무나도 오래된 것들.

"뭐, 공부 해서 석사님 되고 박사님 됐으면 어쩔거유. 이 세상에서 그런 게 무슨 소용이야?"

만웅이 말했다.

‘맞는 얘기지.’

승천 게임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 하루아침에 세상의 질서를 재편해버렸다.

이 세상에선 화폐도, 학위도, 직업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건, 수많은 사람들의 꿈이 한 번에 사라져버렸다는 얘기다.

마치 문혁의 석사학위처럼.

문혁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승천 게임을 공부해보시죠."

그런 문혁에게, 상원이 툭 던지듯 말했다.

"...예?"

"이거 공부한다고 누가 학위를 줄 것도 아니고 교수를 시켜줄 것도 아니지만... 재미는 있을 겁니다."

상원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상원은 떠올리고 있었다.

볓 한 줄기 제대로 들지 않는 작은 골방에 갇혀, 새하늘교의 모든 경전과 주서들을 외워야만 했던 나날들을.

"형님 뭐 슬픈 생각 하시우? 표정이 왜 그래?"

만웅의 물음에 상원의 생각이 끊어졌다.

'그러게, 요새 감상에 젖는 일이 잦네.'

"아니다. 뭐 어쨌든...."

상원이 짧은 머리칼을 문질렀다.

회귀 전에는 길었던 머리칼, 지금은 짧아진 머리칼.

<기계장치의 신>에게 받은 의체, <신화의 몸>이 새삼 낯설었다.

"문혁씨가 말씀하신 그게 의령수인 건 맞지만. 저 <의령수>는 그 의령수랑은 다릅니다. 이승과 저승이 맞닿는 곳에 있는 나무라는 상징성, 그 정도는 비슷합니다만."

"합니다만...?"

문혁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저건 뭐랄까요, 연옥에서 징발된 넋들을 인도하는 겁니다. 주술 나무가 그런 역할이죠.”

“아.”

문혁이 탄성을 뱉었다.

“의령수는 좀 특별한 주술 나뭅니다. 새하늘 주인이 집어삼킨 세계 중 하나, <카이네딘 제국>의 멸망을 이끈 자들이 주술 나무를 개량해서 만들었죠. 세 번째 시험에 특수 좀비들이 튀어나오는 게 저거 때문인데."

새하늘교의 경전 <승천계시록>에는, 세 번째 시험의 밤에 의령수를 찾아오는 자가 있다고 했었다.

그 계시를 따라 상원은 의령수를 찾아왔었다.

'그리고 꼼짝없이 죽을뻔 했었지.'

상원은 떠올렸다.

새까만 밤, 파란 달빛을 받으며 꿈틀대던 거대한 그림자를.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따가 밤이 되면, 저 나무를 심은 자가 여기를 찾아올 겁니다.”

안개 저 편에서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따 만나야 된다는 게 그놈인가보죠? 저거 심었다는.”

만웅의 물음에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씀만 하쇼 형님. 내가 동생들 데리고 와서 그 친구 담가드릴라니까. 내 동생들이면 형님 동생들 되는 거니까, 편하게 생각하슈.”

만웅이 팔을 걷어붙였다.

“만웅아... 니 동생들이면 그냥 내 동생들 되는 거냐?”

“어? 당연한 거 아니우?”

상원이 피식 웃었다.

‘강상중... 그 뱀 같은 놈이 저 친구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네.’

“그래, 말은 고맙다만 그건 나 혼자 할게. 너네 식구들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에... 알았수.”

만웅이 풀이 죽어 대답했다.

상원은 뒤를 돌아보았다.

의령수의 수많은 머리들이 상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까만 눈구멍마다 불길한 어둠이 들어차있는 것 같았다.

“자, 돌아갑시다. 오늘은 이 정도만 하지요. 가서 좀 쉬고, 밤을 준비해야죠.”

상원이 일행들을 추슬렀다.

세 사람은 안개 속을 더듬더듬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상원씨, 여쭤볼 게 하나 있습니다만."

문혁이 물었다.

"네."

"이 세계엔 연옥이 있는 겁니까?”

상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이들이 거기서 심판을 기다리나요?”

<감마 리전 첨병>으로부터 지키지 못했던 소녀를 생각하는 것일까.

문혁의 눈빛이 아련했다.

“아니오. 새하늘 시험의 연옥은 문혁씨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연옥>, 새하늘 시험에 탈락한 이들이 가는 곳.

"수용소죠.”

상원이 말했다.

“새하늘 시험에서 탈락하면 그 넋이 연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그 넋은 언제든지 시험의 재료가 될 수 있지요. 특수좀비들처럼.”

“아....”

숨을 게워내듯, 문혁이 탄식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죠? 죽지 마세요. 일단 생존이 먼접니다.”

문혁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잠깐만요, 잠깐만!”

다급한 목소리가 일행들의 발을 붙잡았다.

길가에 있는 건물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활을 겨누는 문혁의 동작은 거의 반사적이었다.

“문혁씨 잠깐만.”

상원이 문혁을 말렸다.

저벅 저벅

다리를 저는 듯, 다가오는 발소리가 정상적이지 않았다.

안개를 헤치고 그림자가 다가왔다.

“어? 사람?”

만웅이 말했다.

곧 그림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중년 여자가 부상을 당해 피를 흘리는 중년 남자를 부축하고 있었다.

문혁이 얼른 달려가 남자를 받았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런... 부상이 심합니다.”

문혁이 남자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이제, 이제 돌아갈 거지요? 우리랑 같이 가요 제발."

여자가 문혁에게 말했다.

문혁과 만웅이 상원을 보았다.

그들은 어느새 리더가 된 상원의 뜻을 묻고 있었다.

"그럽시다."

끄덕이는 상원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아이고, 아이고! 총각들...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진짜... 꼼짝 없이 여기서 죽는줄 알았네요."

여자가 상원의 손을 꼭 붙잡고 머리를 조아렸다.

"아니오 뭘. 이 정도 가지고."

상원이 여자의 손을 놓으며 대답했다.

여자를 내려다보는 상원의 미간엔 내천(川)자 모양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으으으..."

문혁에게 매달린 남자가 신음했다.

"상태가 많이 안좋습니다. 상원씨, 빨리 돌아가죠."

문혁의 말에, 상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누구지? 어디서 봤더라?"

종종거리며 따라오는 여자, 그리고 문혁이 부축한 남자.

어쩐지 둘 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회귀 전에 연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생각에 골몰한 상원, 그 뒤를 따라 걷는 여자의 손등에서 표식이 빛나고 있었다.

* * *

"그래서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지 뭐유."

중년 여자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첫 번째 낮이 시작되고 나서 수험자 수백 명이 안개 속으로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다.

그 중엔 의령수까지 갔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다.

"어디서 뭐가 날아오더니 난데없이 사람들이 쓰러지더라고. 세상에 얼마나 무섭던지."

여자가 몸서리를 쳤다.

앞서 걷는 만웅은 여자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는지 같이 떨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그래서 저 아저씨랑 나랑 건물 속으로 숨었수."

여자가 문혁이 부축한 남자를 가리켰다.

"이 분 응급처치가 꽤 잘 돼있으시네요."

문혁이 말했다.

"웬만한 큰 상처들은 다 처치가 돼 있고, 이 정도면 서울역까지 가는 데 지장은 없겠습니다."

"어휴 그럼, 내가 이래봬도 간호사 출신이야. 그 양반 처치하느라고 아주 진땀을 뺐어요."

여자의 말에 문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수술도구도 없는 데서 어떻게 이런 걸."

"나도 수험잔데 스킬 같은 게 있지 않겠수?"

"아."

문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크르릉!"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안개 속에서 늑대인간이 달려들었다.

"아이고!"

여자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그 순간, 만웅이 여자와 늑대인간 사이로 뛰어들었다.

촥!

만웅의 나이프가 빛나는 선을 그렸다.

"그르르르륵!"

울대를 베인 늑대인간이 피거품을 뱉으며 쓰러졌다.

"아이고, 아이고 세상에."

여자가 눈을 크게 뜨고 손벽을 쳤다.

"총각... 세상에, 엄청나네! 이렇게 강한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어."

"아... 하하하핫!"

여자의 칭찬에 만웅이 크게 웃었다.

“그래요? 아주머니, 진짜로 나보다 쎈 수험자는 못 만나보셨어?”

“아유 그럼요 그럼요. 같이 있던 사람들은 다들 그냥 비리비리해서.”

“하하 이거 참.”

만웅이 코를 문질렀다.

“아줌마 이제 서울역 돌아가는 건 그냥 마음 푹 놓으셔도 돼. 우리 식구들 말이에요, 저기 문혁이 동생도 쎄고, 우리 형님은 아주 그냥... 무적이셔 무적!”

만웅의 목소리가 과장된 듯 컸다.

“동생...?”

문혁이 나직이 물었으나, 못들은 건지 만웅은 그의 말을 무시해버렸다.

“아유 그럼 그럼. 나도 숨어서 벌벌벌 떨긴 했는데, 볼 건 다 봤어요. 저 커다란 총각이 그 뭣이냐 구렁이 해치울 때는 아주 그냥 내가 속이 다 후련하더라니까.”

여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죠? 엄청나지?”

“맞아요 맞아요. 아니 그 커다란 총각은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빠르고 칼도 잘 쓰고 그래요?”

“아, 별 건 아닙니다. 그런데...”

상원이 말꼬리를 흐리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제가 바늘 구렁이 잡는 거, 아주머니께서는 다 보셨나 봐요?”

“아이구 그럼, 세상에 엄청나게 멋있던데? 날랜 게 아주 범 같더만. 그리고 뭐야, 저 칼에서 아지랑이 같은 거 나오는 건 스킬이에요? 이야... 대단해 총각.”

여자의 말을 듣는 상원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 아줌마... 어디서 봤는지 기억났다.’

어느 정도 예상이 되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 건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이 사람들을 어떻게 끼워 넣을 것인지.

두 번째 별을 얻으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몇 개 있었다.

지금 저 사람들을 이용하면 그 중 하나를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다.

상원의 머릿속에 세워진 계획이 수정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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