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안개 속으로 (4)
서울역에서 멀어질수록 안개는 점차 짙어졌다.
<동굴적 감각>으로 날카로워진 상원의 시선이 안개 속을 꿰뚫었다.
검은 덩굴들이 서울역 주변의 고가도로와 건물들을 뒤덮고 있었다.
거대한 인공물의 외벽을 덩굴처럼 뒤덮고 있는 것들 하나 하나가 사실은 주술 나무들이었다.
외벽뿐만이 아니었다.
아스팔트와 보도블럭을 뚫고, 땅바닥에서도 주술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끔찍합니다...."
문혁이 신음하듯 말했다.
찰박.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물소리가 났다.
주술나무들이 뿜어내는 역한 습기가 바닥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서울역 주변은 그야말로 기분 나쁜 늪지가 되어 있었다.
“이거... 피냄샌가?”
만웅이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과연, 구름같이 깔린 짙은 안개 속에서 피비린내가 훅 풍겨왔다.
짙은 안개와 진한 피비린내, 불길하기 짝이 없는 조합이었다.
"믿기지가 않습니다. 서울역이 이틀만에 이렇게 됐다니."
문혁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하아... 끝이 없네 이거."
만웅이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혜경을 돌려보낸 후, 일행은 주술 나무를 없애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없앤 주술나무가 얼추 서른 그루는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주술나무는 끝이 없었다.
"후우."
문혁이 큰 숨을 쉬었다.
바윗돌 같은 문혁도, 배짱 좋은 만웅도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그리고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마물들.
지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했다.
문혁과 만웅은 주춤 주춤 발을 디뎠다.
달팽이처럼 느렸지만, 그러나 그들은 확실히 나아가고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그들 앞에서 거침없이 나아가는 상원 덕분이었다.
상원은 망설이지 않았다.
성큼 성큼 나아가는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주술 나무가 있었다.
문혁과 만웅은 상원에게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간, 상원의 발걸음이 멈췄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상원이 안개 속을 쏘아보았다.
상원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시체가 즐비한 사거리였다.
"아이 씨, 무슨 냄새가...."
만웅이 코를 쥐었다.
상원이 시체를 들여다보았다.
'이거...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군.'
시체 여기저기에 할퀸 자국이 수없이 나 있었다.
새타니나 잔나비의 손톱 자국과는 달랐다.
새타니의 자국은 찔린 모양, 잔나비의 자국은 쥐어뜯긴 모양.
그것들과는 달리 이 자국은 날카로운 단검에 베인 듯한 모양이었다.
'늑대인간의 짓이다.'
상원이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거리에는 수험자들과 늑대인간들의 시신이 엉켜 있었다.
“교전이 있었군요. 얼마 안된 것 같습니다.”
시신들을 살펴보던 문혁이 말했다.
“이거 해뜬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여기까지 오셔서들 많이도 죽으셨구만. 뭔 불나방도 아니고.”
만웅이 코 앞에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널린 시신이 적잡아도 십수 구는 될 것 같았는데, 만웅은 별로 놀라는 눈치도 아니었다.
저쪽에서 시신들을 살펴보는 문혁의 얼굴에도 별다른 감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정신이 붕괴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칼을 밥먹듯 휘두르는 뒷세계 싸움꾼, 그리고 사선을 넘나들던 특수부대원이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
전세계 인구의 구 할 구 푼이 죽는 걸 지켜보는 동안, 자연스럽게 변해버린 걸까?
‘아니다. 승천자들이지.’
승천자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피를 보면 발작하는 심약한 이들은 승천 게임의 장기말로 쓰기엔 부적절하지 않은가.
화신들이 보여주는 이상할 정도의 담대함, 이건 수호신들이 그들의 화신들에게 쳐 둔 일종의 정신방벽이다.
화신은 그들의 수호신과 동화되어가면서 평범한 인간으로부터 멀어진다.
백문혁과 김만웅 뿐만이 아니다.
상원은 윤진아와 송혜경을 떠올렸다.
준엄한 불꽃으로 부정한 것들을 태우던 윤진아의 표정을.
늑대인간의 살점을 간식인 냥 씹어먹던 송혜경의 얼굴을.
시험이 시작된 지 이제 고작 이틀, 시간으로 치면 48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겨우 세 번째 시험의 첫 번째 낮인데도 그들은 벌써 보통 인간에서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수호신이 그들을... 아니, 아니다.'
수호신이 없는데도 인간으로부터 멀어진 자가 있다.
조상원, 그 자신.
승천 게임이 시작되기 전만 해도 평범한 - 가정사가 비범하긴 했지만 어쨌든 평범한 삼십대 초반 청년일 뿐이었다.
그랬던 자신이, 50번째 시험까지 겪으면서 사람처럼 생긴 마물도 아무렇지 않게 찢어 죽일 수 있게 되었다.
‘이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건가.’
시험 그 자체가 상원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승천할 때가 되면 자신은 어떤 존재가 되어있을 것이란 말인가?
그렇게까지 해서 승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니다.’
상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새하늘교의 집단자살, 상원의 잘못으로 일어난 그 일을 뒤집을 방법은 오로지 승천 뿐이었다.
승천해서 모든 과오를 되돌려놓는 것.
그 죄책감을 내려놓기 전에는 쉴 수 없다.
상원이 저도 모르게 이를 악 물었다.
“어, 상원씨. 잠깐 이리 와보시겠습니까? 이것 좀 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만.”
문혁이 상원의 상념을 끊었다.
“무슨 일이지요?”
상원이 문혁에게 다가갔다.
문혁이 시신을 뒤집고 있었다.
늑대인간의 손톱에 난자당한 시신, 그 등에 이상한 물체가 박혀 있었다.
문혁이 물체를 뽑았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핏물이 튀었다.
문혁은 얼굴에 튄 피를 덤덤하게 닦았다.
날카로운 송곳 모양에 길이는 20cm 정도 되었는데, 표면에는 뭉툭한 쪽을 향해 톱날이 서 있었다.
“뭐야 그거? 꼭 바늘같이 생겼네? 무지 크긴 하지만....”
"맞아."
상원이 문혁에게서 바늘을 받아 쥐었다.
“바늘이다.”
만웅의 말에 대답하며 상원이 안개 속을 쏘아보았다.
‘방향을 제대로 짚어온 게 맞군.’
상원의 첫 번째 목표물 <의령수>, 그리고 의령수를 지키는 마물이 근처에 있었다.
그때였다.
차르르르
안개 저 편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쇳조각들이 연이어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아이 씨 뭔 소리야.”
만웅이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질렀다.
금속질의 마찰음이 이어졌다.
그러다 순간, 침묵이 일행을 덮쳤다.
그리고
"피해요!"
상원이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
문혁과 만웅도 반사적으로 몸을 던졌다.
파파팟!
순식간이었다.
시신의 등에 박혀있던 것과 꼭 같은 모양의 바늘이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날아와 박혔다.
몸을 날려 착지한 문혁이 안개 속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빙그르르 구르며 화살을 날리는 모양새가 썩 멋졌다.
하지만 문혁이 쏜 화살은 힘없이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상원의 눈엔 보였다.
허공을 가르는 화살, 그리고 그 쪽에서 주술 나무를 기어오르고 있는 커다란 마물이.
"<바늘 구렁이>!"
상원이 씹어뱉듯 말했다.
2급 마물 <바늘 구렁이>.
전체적인 형태는 비단구렁이와 흡사했다.
7m쯤 될 것 같은 몸뚱이는 놈이 기어오르고 있는 나무줄기만큼이나 두꺼워 보였다.
그 굵다란 몸체를, 살벌한 바늘들이 뒤덮고 있었다.
은색 바늘들을 가라앉힌 모양새가 마치 가시를 세우기 직전인 고슴도치 같았다.
차르르르
쇳조각들이 부딪히는 소리는 구렁이가 바늘을 세우는 소리였다.
'온다!'
"문혁씨, 잠깐만 칼 좀 빌려주세요."
"예."
상원이 문혁에게서 별운검을 받아들었다.
군인이 전장에서 무기를 넘기다니, <해안선의 귀신>이 상원을 꽤나 신뢰하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별운검... 오랜만이네.'
손잡이에 단단히 감긴 쇠가죽의 느낌이 익숙했다.
<록시>가 파는 유물급 보구, 별운검.
상원도 회귀 전 초반을 이 별운검으로 풀어갔었다.
"후!"
상원이 별운검을 양 손에 단단하게 쥐었다.
[성현 <귀기(鬼氣)를 담은 연장>을 익혔습니다.]
[수호신이 없어 성현이 조정됩니다.]
[스킬 <살기를 담은 연장>을 익혔습니다.]
[<살기를 담은 연장>을 활성화합니다.]
시스템 메세지가 연속으로 떴다.
만웅의 수호신 <자칭 협객>이 만웅에게 내려준 성현 <귀기를 담은 연장>.
거리의 싸움꾼들이 쓰는 연장에 귀기를 담아주는 스킬.
만웅이 나이프에서 뽑아내는 보라색 검기가 이 스킬의 효과였다.
별운검의 날에서 보라색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상원이 뽑아내는 검기는 그 크기도 색깔도 만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문혁의 별운검은 문혁의 몸에 맞춰 만들어진 물건인지라, 상원이 쥐자 거의 소검처럼 보였다.
하지만 검기를 두르고 나니 그 모양새가 꽤 그럴싸해졌다.
"형님 그것도 할 줄 아시우?"
만웅이 벙찐 얼굴로 물었다.
"배웠다 너한테."
상원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와 함께 상원이 한 마리 범처럼 안개 속으로 돌진했다.
"허 참."
"쉬이이잇!"
만웅의 말은 멀어졌고, <바늘 구렁이>의 소리는 가까워졌다.
파파파팟!
말이 바늘이지 거의 화살에 가까운 바늘뼈가 상원의 정면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흡!"
상원이 숨을 들이켰다.
습한 공기가 단전까지 들어 찼다.
채채챙!
날아오는 바늘뼈를 단 칼에 쳐냈다.
수도 없이 휘둘렀던 검, 수족처럼 다루는 건 당연했다.
거리는 단숨에 좁혀졌다.
육중한 거체에 실린 속력을 그대로 실어, 상원이 바늘 구렁이를 향해 도약했다.
"샤아아아!"
차르르르르
구렁이가 다급하게 바늘을 세웠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찰나의 순간, 보라색 아지랑이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별운검이 구렁이의 미간에 박혔다.
쩍!
머리를 감싼 금속질의 비늘이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푸우우욱!
별운검이 몸통을 세로로 쪼갰다.
[마물 <바늘 구렁이>를 해치웠습니다.]
[코인 50을 얻었습니다.]
털썩 소리를 내며, 주술 나무를 칭칭 감고 있던 커다란 몸뚱이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촤륵
상원이 별운검을 튕겨 칼날을 뒤덮고 있던 체액을 뿌렸다.
"와 진짜, 덩치는 산만해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빨라요?"
뒤늦게 따라온 만웅이 헐떡이며 물었다.
"별 거 아니야. 문혁씨, 잘 썼습니다."
상원은 만웅과 함께 온 문혁에게 별운검을 넘겼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이놈에게 죽은 겁니까?"
문혁이 바늘 구렁이를 보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리고 이 놈이 있다는 건, 제가 찾는 것도 가까이 있다는 뜻이죠."
상원의 시선이 바늘 구렁이가 있던 곳 너머를 향했다.
상원이 그곳을 향해 달렸다.
얼마간 달린 상원의 눈 앞에 거대한 형체가 나타났다.
"이게... 뭡니까?"
"와... X발...."
만웅과 문혁이 신음하듯 말했다.
4차선 도로 한가운데를 무단 점령하고 서 있는 거대한 나무.
주술 나무였지만, 다른 것들과는 달리 해골 머리가 수십 개 달려 있었다.
"<의령수>... 여기 있었군."
거대한 나무를 올려다보며 상원이 씹어뱉듯 말했다.
"젠장, 형님 이거 빨리 없애버립시다. 이거 생긴 게 너무 기분나쁘네."
만웅이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나이프에서 보라색 검기가 피어올랐다.
"아니다."
상원이 만웅을 제지했다.
"아직은 이걸 없앨 때가 아니야."
"아직이라면...?"
문혁이 물었다.
"밤이 되면 저 나무를 찾아올 자가 있습니다. 그자를 만나야 돼요."
대답하며, 상원은 떠올렸다.
<의령수>를 심은 자, <대강령술사 오디나스>.
세 번째 시험에서 반드시 얻어야 하는 아이템 <의령수의 심장>을 주는 히든 미션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