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성화 사수 (5)
"아라, 아이!"
"하!"
<흑사 백인대장>의 외침에 방패병들이 대답했다.
다시 창끝에 회색 기운이 맺혔다.
회색 빛덩어리였음에도 오히려 주변의 빛을 끌어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성속성에는 상극인 마(魔)의 기운.
마의 기운을 갈무리하는 저 창이, <카이네딘 왕국>의 마도공학의 정수, <만투아의 창>이었다.
상원은 <만투아의 창> 끝에 맺힌 회색 기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발론!"
<흑사 백인대장>이 발사 명령을 내렸다.
팟! 팟!
마의 기운이 광선이 되어 날아왔다.
<낙원의 수문장>이 빙의한 윤진아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공격이었다.
성속성의 스킬은 저 광선에 반드시 뚫린다.
"피해라, 수험자! 뭐하는 거냐!"
진아의 몸에 깃든 <낙원의 수호자>가 외쳤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낙원의 수문장. 저건 반드시 피해야 된다고.'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상원은 피식 웃었다.
상원의 몸 여기 저기, 회색 광선이 박혔다.
하지만 단지 옷에 구멍이 숭숭 뚫렸을 뿐, 상원은 상처 하나 없었다.
"발론!"
두 번째 발사 명령에 이어, 다시 광선이 날아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다.
아무 효과도 없었다.
<만투아의 창>이 뿜어내는 회색 광선은, 피할 필요가 없다.
안 아프니까.
'옷이야 뭐 갈아입으면 되지. 사이즈 맞는 거 찾기가 좀 힘들긴 하겠지만.'
상원이 누더기가 된 옷을 보며 생각했다.
"너... 너는 대체?"
<낙원의 수문장>이 당황해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의아할 수밖에 없다.
최상급 신령에 손가락 안에 드는 성령인 <낙원의 수문장>, 그가 빙의한 화신을 궁지에 몰아붙인 공격이 저 하찮은 수험자에게는 통하지 않았으니까.
'도대체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게 궁금하겠지.'
상원이 <불신자>라서 광선이 무효화되는 건 아니었다.
<검은 뱀 기사단>이 쏴대는 저 광선은 무기인 <만투아의 창>의 기능이지 스킬이 아니니까.
광선이 상원에게 타격을 주지 못하는 건, <만투아의 창>이 오로지 성속성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이기 때문이었다.
성속성 스킬이나 성령이 깃든 화신을 상대하는 덴 그만한 무기가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냥 조금 아픈 레이저일 뿐이지. 피부과 가서 점 빼는 것도 이것보단 아프겠다.'
더구나 상원의 의체는 단단하기로는 짝이 없다.
<만투아의 창>이 아무 효과도 보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방패병들이 동요하는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지천사의 불씨>를 수십 번 던져도 꼼짝하지 않던 견고한 방진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만투아의 창>은 성직자와 성령을 상대로는 무적이었다.
<카이네딘 제국>의 강인한 소드마스터들과 다재다능한 마법사들을 손쉽게 상대했던 대륙 최강의 무력 집단 <미스미엘 교단>.
그 <미스미엘 교단>의 성직자들과 성기사들마저도 <검은 뱀 기사단>에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데도.
분명히 상대는 성속성 스킬을 사용하는 성직자인데, 성직자를 사냥하기 위한 무기가 안 먹힐 수가 있는가.
'안 먹히지. 나는 성직자 같은 게 아니니까.'
흔들리는 방진을 보며 상원은 생각했다.
물론 <검은 뱀 기사단>과 <흑사 백인대장>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
불이며 얼음, 어둠 같은 다른 속성들과는 달리 성(聖)은 익히고 다루기가 지극히 까다로운 속성이었다.
성속성 스킬을 자유로이 다루는 건 수험자 본인이 성직자이거나 아니면 성령을 수호신으로 두고 있거나 둘 중 한 경우뿐이었다.
그러니 <흑사 백인대장>이 상원을 성직자로 판단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나를 성직자로 판단하는 거,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로군.'
그렇게 생각하며 상원은 윤진아에 깃든 <낙원의 수호자>를 바라보았다.
무방비 상태의 윤진아, 망연하게 앉아있는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이럴 수가. 어떻게 된 것이냐. 어떻게 너는 아무렇지도 않지?"
<낙원의 수문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애써 위엄을 지키려 하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상원이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잘 봐두어라, 어린 아이야."
상원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연기엔 소질이 없군.'
누가 봐도 어색한 연기였다.
하지만 <낙원의 수문장>은 그런 데 신경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
도대체 그 누가, 새하늘의 어떤 승천자가 그 지고한 <낙원의 수문장>을 '어린 아이'라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아아."
<낙원의 수문장>은 그저 멍한 얼굴로 상원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그가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 상원은 <검은 뱀 기사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검은 뱀 기사단>의 대응은 신속했다.
"아!"
"하!"
<흑사 백인대장>의 지휘에 방패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방진을 재구축했다.
조금 전의 우왕좌왕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검은 뱀 기사단>은 다시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꿈틀거리는 한 마리의 커다란 뱀 같았다.
'역시, <검은 뱀 기사단>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검은 뱀 기사단 쪽이 운이 없었다.
성직자와 성기사를 상대로 무적에 가까우면 무슨 소용인가.
달려드는 적은 물리 깡패인데.
'그래도 일단 연출은 해야지.'
상원이 두 주먹에 불꽃을 실었다.
[스킬 <하늘의 불씨>를 발동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뜨면서, 상원의 두 손이 불타기 시작했다.
물론, <검은 뱀 기사단>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이 스킬의 용도는 공격이 아니었다.
<낙원의 수문장>으로 하여금 상원이 성 속성 스킬을 써서 <검은 뱀 기사단>을 제압한 것처럼 믿도록 하는 것.
<하늘의 불씨>의 용도는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거면 충분했다.
훌쩍
상원은 방진 사이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창을 뛰어넘었다.
방패병들이 멍청하게 고개를 들었다.
육중한 거체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상원이 움직이는 자리를 따라 분홍 불꽃의 잔상이 남았다.
빡!
허공에 뜬 상태로 날린 발차기에 방패병 하나의 모가지가 떨어져나갔다.
방패병들 뒤로 착지한 상원은 <흑사 백인대장>을 향해 총알처럼 돌진했다.
애초에 신속하게 움직이는 적을 상대하려고 만들어진 병단이 아니었다.
상원의 속도에 <검은 뱀 기사단>은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했다.
"아이..."
<흑사 백인대장>의 명령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의 불씨>가 담긴 파란 주먹이 흑사 백인대장의 가슴팍에 꽂혔다.
팡!
분홍 불씨를 사방으로 쏟으며, <흑사 백인대장>은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아아!"
<낙원의 수문장>의 장탄식이 들렸다.
<검은 뱀 기사단>을 지탱하는 지휘 체계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 뒤로는 그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상원의 동작 한 번 한 번에 사방으로 분홍 불꽃이 튀었다.
윤진아를 죽음의 위기에 몰아넣었던, 카이네딘 제국의 자랑 <검은 뱀 기사단>은 그렇게 승천 시험장에서 퇴장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섭리의 집행자여!"
<낙원의 수문장>이 외쳤다.
우르릉-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난데없는 천둥이 울렸다.
섭리의 집행자 사마에트가 그의 말에 반응했다는 뜻이었다.
"수험자 명부의 열람을 요청한다!"
'수험자 명부 열람'.
말 그대로, 사마에트가 가진 수험자 명부를 보는 행위였다.
수험자들에겐 요청 권한 자체가 없으며, 승천자들이 요청한다고 해서 사마에트가 그걸 다 들어주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낙원의 수문장>쯤 되는 귀족이라면 사마에트가 그 요청을 들어줄 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내가 보는 앞에서 저런 걸 대놓고 외치다니. 그만큼 당당해서 그런 건가, 아니면 그만큼 정신이 없는 건가.'
상원이 방패병들을 깨부수며 생각했다.
<낙원의 수문장>은 당연히 수험자 명부에서 조상원 항목을 찾아 읽어볼 것이다.
저 놈의 특성은 무엇이고, 어떤 스킬을 쓰며, 그 뒤를 봐주는 수호신은 누구인지.
도대체 누구길래 <낙원의 수문장>이 맥을 못 추는 상대들을 성속성 스킬로 유린할 수 있는지.
일반적인 수험자라면 당연히 긴장할 상황이었다.
<낙원의 수호자>를 속이려는 계략이 모두 드러날 판이었으니.
하지만 상원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한끝발 날린다는 승천자들이 어떤 스킬도 통하지 않는 상원의 수험자 정보를 열람하는 일은 회귀 전에는 수십 번도 더 겪었다.
그리고 정보를 보려는 승천자들이 뭘 보게 되는지도 상원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접근 권한이... 없다고? 이게 무슨 말인가! <섭리의 집행자>!"
아까와는 달랐다.
<낙원의 수문장>의 목소리는 공허히 메아리칠 뿐이었다.
하늘에선 그 어떤 응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럴 리가... 이럴 수는 없다. 어떻게 이런... 설마... 아니다, 아니야. 아니 설마... 계시의...?"
저 혼자 한참을 중얼거리던 <낙원의 수호자>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 때 할 대답도, 상원은 생각해두었다.
상원은 부드러운 미소를 만면에 띤 채로, 최대한 담담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독생자>다."
성령들 사이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존재.
언젠가 도래하여 성령들의 가장 처음이자 끝인 옥좌에 앉을 이름.
물론 사칭이지만 뭐 어떤가.
<낙원의 수문장>이 거기까지 간파할 능력은 없다.
나중에 설령 사칭임을 들킨다 해도, 보통 수험자가 <독생자>가 무엇인지 알 리 없으니 <낙원의 수문장>이 착각한 걸로 넘어가면 된다.
지금은 단지 <낙원의 수문장>이 호의를 보일 정도면 됐다.
그 용도로는, <독생자>라는 이름은 충분했다.
그 대답에 <낙원의 수문장>은 굳어버렸다.
그리고
"아아, 경배하나이다... 경배하나이다."
어느새 무릎을 꿇고 앉은 윤진아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그녀를 둘러싼 불꽃이 옅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몸 안에 든 <낙원의 수호자>가 떠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더 이상은 윤진아의 몸이 버틸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을 경배하나이다."
불꽃이 점점 사그라들다 마침내 사라졌다.
<낙원의 수문장>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남았다.
털썩
윤진아가 쓰러졌다.
상원은 얼른 달려가 두 손으로 윤진아를 받쳐 안았다.
신령급 승천자의 힘을 무리하게 받아 쓴 탓에,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아아, 상원씨."
"좀 괜찮아요?"
진아의 코에서 찐득하고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고마워요."
그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진아는 정신을 잃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이다. 전에는 완전히 폐인이 됐었는데.'
상원은 진아를 반듯이 눕혔다.
주위에선 승천자와 좀비들의 전투가 지속되고 있었다.
'<검은 뱀 기사단>이 정리되었으니, 당분간은 안전할 것이다.'
상원은 진아의 얼굴을 보였다.
전장을 유린하던 낙원의 성화가 지금 상원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녀는 상원에게 목숨을 빚졌다.
그녀의 수호신에게는 본인이 <독생자>라는, 낙원의 수문장으로서는 믿을 수밖에 없는 거짓말을 했다.
이제 윤진아는 상원의 곁에서 싸우게 될 것이다.
그때였다.
<주인의 불꽃>이 뿜어내는, 하늘로 뻗은 불기둥이 흔들렸다.
'더 이상 놔두면 위험하다.'
상원은 진아를 안고 성화 쪽으로 몸을 날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