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성화 사수 (2)
"어 뭐야, 어디지?"
사람들이 하늘을 살폈다.
분명히 목소리가 들렸지만 사마에트는 없었다.
"왜 보이지 않는 걸까요? 그 덩치가 안 보일 리가 없는데."
진아가 물었다.
"잠시만 기다려 보시죠.“
상원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네?"
진아가 반문하는데 사마에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제는 너희를 지키는 신들이 새하늘의 목소리를 전할 것이니, 귀를 기울이도록 하여라.”
“어 무슨 말이지?”
“그러게요?”
수험자들은 사마에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 했다.
다음 순간, 수험자들의 손등에 새겨진 시험의 표식이 파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수호신이 자기 화신들에게 직접 말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이 수호신을 대하는 태도는 제각각이었다.
"예? 그게 무슨 말인가요?"
놀라는 사람도 있었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으며
"아니 젠장!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버럭버럭 고함을 치는 자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진아는 무릎을 꿇고 앉아 묵주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세 번째 시험 <성화 사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지상을 시기한 이들이 다시 돌아와 지상을 걸을 것입니다. 그들로부터 성화를 지켜내야 합니다.]
상원처럼 수호신이 없는 자들은 시스템 메세지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세 번째 시험, 시작되었군. 얻어야 할 아이템이 둘, 그리고 작업해야 할 인물이 셋.’
짙은 그림자가 지상에 드리워졌다.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휘영청 밝히고 있던 거대한 보름달이 하현달로 그믐달로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월식... 인가?"
"월식? 월식이 저렇게 빨라요?"
사람들이 수군댔다.
마침내, 그림자가 완전히 달을 잡아먹었다.
초라한 별빛들만이 하늘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불안이 서울역 광장을 덮쳤다.
꼴깍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잠시 후, 달이 다시 밝아지기 시작했다.
달은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아아."
누군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세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잠깐의 월식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단순한 해프닝으로 여길 수 있는 일이면 좋겠지만.’
하지만 달랐다.
다시 나타난 달은 음침한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별이 총총한 하늘 한가운데 떠 있는 거대하고 새파란 보름달은 마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악마의 눈 같았다.
사람들은 달을 올려다보며 오싹한 느낌이 등골을 훑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이거 확실히 무슨 일이 일어나긴 일어나려나 봅니다."
문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주기도문을 외우는 진아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으악!"
광장 한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사람들이 비명이 들려온 쪽을 보았다.
꿈틀거리는 그림자가 나이 든 남자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에이 썅!"
남자가 소리치며 그림자를 밀어냈다.
그리고 하얗게 빛나는 주먹을 꽂았다.
퍽!
얼어붙은 고깃덩어리를 망치로 내려치면 그런 소리가 날 것이다.
그림자가 뒤로 넘어갔다.
'무투 계열 스킬이군.'
상원이 남자를 보고 생각했다.
수호신을 받아들인 수험자들이 스킬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슨 일이에요?“
다른 사람이 걱정하며 물었다.
"아니 글쎄... 이게 갑자기 일어나서 물어뜯더라니까!"
남자가 짜증 난 듯 소리치며 그림자를 가리켰다.
달빛에 그림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남자가 덮친 그림자, 그건 시신이었다.
서울역 광장에 널브러져 있던 시신들 중 하나.
"좀비? 좀빈가?"
누군가 말했다.
조용한 전율이 광장을 관통했다.
“좀비...? 좀비라고?”
“뭐야, 잠깐만.”
수험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연신 고개를 흔들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가라앉은 이들이 지상을 시기하여 돌아올지니."
문혁이 그 문장을 곱씹고 있었다.
돌아올 것이다, 첫 번째 시험과 두 번째 시험에 가라앉은 자들이.
"으아아아아."
소리에서 악취가 난다면 그런 느낌일 것이다.
가래 끓는 소리 같기도 하고 썩어가는 내장을 토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한숨을 게워내는 것 같은 소리들이 하나둘 쌓였다.
"이런 X발...."
만웅이 뽑아 든 나이프에서 흉흉한 보랏빛이 흘렀다.
“첫 번째 시험과 두 번째 시험에서 죽은 사람이 구 할 구 푼.”
문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크으으으으."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혜경의 눈이 검게 물들었다.
광장 여기저기서 빛줄기가 피어올랐다.
승천자들에게 힘을 받았음을 뜻하는 빛줄기였다.
그리고
"으어어어어어!"
널브러져 있던 시체들이 꿈틀대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자, 준비합시다."
상원이 나직이 말했다.
"맙소사... 주님...."
아연실색한 진아의 두 손끝에 분홍 불꽃이 일렁였다.
"후우."
문혁이 큰 숨을 들이쉬며 록시에게 구입한 유물급 아이템 <별운검>을 뽑아들었다.
"으아아악!"
"끄아아악!"
산 사람들의 비명과 죽은 사람들의 포효가 뒤섞였다.
[세 번째 시험, <성화 사수>가 시작됩니다.]
[밤 동안에는 좀비들이 수험자들을 공격하고 성화를 끄려고 할 것입니다.]
[해가 뜰 때까지 살아남고, 좀비들로부터 불꽃을 시키십시오.]
[가끔 나타나는 특수 좀비들을 조심하십시오.]
세 번째 시험의 시작을 선포하는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그와 함께
“어... 어어?”
성화 근처에 있던 수험자들이 소리를 질렀다.
좀비들이 성화를 향해 어기적거리며 기어가고 있었다.
줌비들이 불꽃으로 들어갈 때마다 불꽃이 조금씩 약해지는 게 보였다.
저 불꽃이 꺼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수험자들은 직감했다.
‘여기서 끝날지도 모른다.’
“이런 썅! 막아!”
“끄아아아!”
수험자들이 악을 지르며 좀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팟!
"컥!"
쏜살이 좀비의 미간을 꿰뚫었다.
전장 한가운데서, 활을 든 문혁이 헐떡이고 있었다.
문혁의 손에 들린 각궁의 시위가 팽팽했다.
록시에게서 산 유물급 보구 <무소 각궁>이었다.
문혁의 수호신 <해안선의 귀신>은 초기자본금을 주며 그걸로 무기를 사라고 했다.
그래야 시험을 모두 마치고 승천할 수 있다고.
그래서 마련한 무기가 <별운검>과 <무소 각궁>이었다.
각궁을 쏘면서 문혁은 낯선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태어나서 활을 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도, 무소 각궁을 드는 순간 활 쏘는 법을 터득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이것 참, 대단하군.'
팟! 팟!
화살 한 발에 좀비가 하나씩 고꾸라졌다.
하지만
"으어어억!"
화살에 미간을 꿰뚫려도, 좀비는 다시 일어났다.
'팔다리를 잘라야 되나.‘
문혁은 무소 각궁을 등에 메고 별운검을 뽑아들었다.
별운검을 양손에 움켜쥔 문혁의 장신이 적진을 향해 쏟아져 들어갔다.
삭! 삭!
양손에 움켜쥔 <별운검>이 순식간에 좀비들의 사지를 토막냈다.
군용무술과 태권도엔 일가견이 있었지만 양손검을 쓰는 걸 배워본 적은 없다.
하지만 문혁은 마치 잘 훈련된 무사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수호신 <해안선의 귀신>이 그의 움직임을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에.
"후우."
문혁이 심호흡을 하며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찐득거리는 핏방울이 아스팔트에 떨어졌다.
[코인 4를 얻었습니다.]
[신앙 4를 얻었습니다.]
코인과 신앙을 얻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승천 시험의 세계에서, 신앙은 스킬을 구입하고 업그레이드하는 자원으로 쓰인다.
[<해안선의 귀신>이 뿌듯해합니다.]
이렇게만 가면 승천하는 데 문제는 없다.
승천, 그게 수험자 백문혁과 그의 수호신 <해안선의 귀신>이 향하는 목표였다.
그때였다.
탕!
'총소리? 여기 총을 쓰는 사람이 있나? 그럴 리가...!'
분명 총소리였다.
문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쓰러져 있는 소녀가 보였다.
그녀를 향해 좀비들이 다가가고 잇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바람처럼 소녀의 곁으로 달려간 문혁이 미친 듯 별운검을 휘둘렀다.
소녀에게 달려들던 좀비들이 낙엽처럼 쓰러졌다.
문혁이 무릎을 꿇고 앉아 소녀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의 배에서 시뻘건 선지피가 울컥울컥 새고 있었다.
'총상이다!'
훈련된 군인으로서, 문혁은 소녀가 누운 자세만으로도 총알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직감할 수 있었다.
문혁이 고개를 돌렸다.
총알이 날아온 곳, 그곳에 낯선 형체가 있었다.
'세상에, 저것도 좀빈가?'
총성이 들려온 곳에는, 다른 좀비들보다 머리 하나는 커 보이는 좀비가 있었다.
문혁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특수 좀비!’
달빛에 드러난 피부가 시퍼랬다.
타이트한 검은 메리야스 아래로 커다란 근육이 울룩불룩 도드라졌다.
그리고, 그의 왼팔 전체가 은색 기계 덩어리였다.
왼팔 끝에 달린 총구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사이보그...?"
문혁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생체와 기계의 융합체, SF영화에서나 보던 그 사이보그였다.
'사이보그가 왜 여기서 나와?'
"그르륵. 그르르륵."
사이보그 좀비가 기계음이 섞인 소리를 냈다.
그의 왼팔을 뒤덮은 복잡한 기계장치들이 움직였다.
철컥,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문혁의 눈에 사이보그의 왼팔이 소녀를 조준하는 장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젠장!"
문혁이 온몸으로 소녀를 가렸다.
“쿨럭! 쿨럭!”
거센 기침과 함께 소녀가 뱉어낸 선지피가 문혁의 셔츠를 적셨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나...!’
빠드득, 문혁은 자기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808 특임단 중사 박문혁, 그의 승천 시험은 아주 높은 확률로 여기서 끝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혁은 눈앞에서 힘없는 소녀가 죽는 걸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해안선의 귀신이 안타까워합니다.]
그의 귓가에 걸걸한 침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탕!
문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한 발의 총성이 들리고 사위가 고요해졌다.
문혁은 조용히 고통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전장을 넘나들며 몇 번 겪어보았던,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을.
‘죽지 않으면 다행이고.’
하지만,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어...?"
문혁은 눈을 뜨고 사이보그를 바라보았다.
사이보그보다 더 큰 거한이 사이보그의 왼팔을 움켜쥐고 있었다.
하늘로 향한 총구에서 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그극!”
사이보그가 괴성을 지르며 저항했지만, 거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이보그를 제압한 거한은 상원이었다.
“역시, 이래서 그렇게 빨리 탈락한 거구만. 그런 수호신을 두고도.”
나직한 목소리.
우지직!
상원이 힘을 주자,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왼팔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