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5화 (15/230)

제15화. 성화 사수 (1)

새하늘 시험대의 수험자와 마물들은 <스킬>을 쓴다.

개중에는 수호신의 '권능'을 받아야 쓸 수 있는 스킬들이 있으며, 그를 <성현>이라 한다.

만웅과 겨루면서 상원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스쳤다.

'수호신이 없는데 성현도 베껴 쓸 수 있는가?'

의문을 풀기 위해 만웅의 장단에 맞춰 주면서 시스템 메세지가 뜨기를 기다렸다.

그러기를 얼마간, 몇 개의 시스템 메세지가 연이어 울렸다.

[성현 <야인의 결투장>을 익혔습니다.]

[수호신이 없어 스킬이 보정됩니다.]

[성현 <야인의 결투장>이 스킬 <결투장>으로 변경됩니다.]

'좋아.'

그 메세지를 보고 상원은 놀이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상원에게 배를 맞고 몇 미터를 날아가 쳐박힌 만웅.

전의를 상실했는지 권능 스킬을 거두고 도망치려고 했다.

'누구 맘대로.'

상원이 스킬을 썼다.

[스킬 <결투장>을 사용합니다.]

[결투 대상을 지정합니다: 수험자 김만웅]

[결투장이 설정되었습니다. 멋진 승리를 기원합니다.]

상원을 중심으로 반투명한 녹색 막이 펼쳐졌다.

막은 빠르게 범위를 넓혀 도망치는 만웅을 집어 삼켰다.

"으, 으어...."

만웅이 두 손으로 장막을 두드렸지만, 장막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만웅아."

저벅 저벅, 상원이 만웅을 향해 걸어갔다.

만웅에겐 그 모습이 저승사자처럼 보일 것이다.

만웅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한테 아까 칼 들이댄 거, 대가는 치러야 되겠지?"

상원이 만웅 앞에 섰다.

상원과 장막 사이에서 만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채로 떨고만 있었다.

상원이 무릎을 굽히고 만웅 앞에 앉았다.

"만웅아."

상원이 만웅의 턱을 잡았다.

"니가 아까 말한 것처럼, 뭐 손목이나 발목으로 해도 좋을 것 같고. 아니면 눈이랑 귀는 두 개 씩이니까, 그 중에서 하나로 할까?"

상원이 검지를 뻗어 만웅의 귓볼을 만졌다.

"으... 으으으... 잘못했습니다."

만웅이 눈물 콧물을 쏟았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또 성정이 너무 고와서 그렇게 잔인한 짓은 못하겠고."

상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혁과 진아가, 창훈 부부가, 그리고 만웅의 똘마니들이 상원과 만웅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잔혹한 일이 또 일어나려고 하나.

그들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너 이거 있잖아. 사실은 이게 발단 아니었냐?"

상원이 만웅의 고간에 손을 얹고 말했다.

"사,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이성을 잃고 우는 만웅을 보며 상원이 차갑게 웃었다.

"이게 없으면 너랑 나랑도 부딪힐 일이 없지 않겠어, 그렇지? 자, 셋을 셀 테니까 마음의 준비를 해. 조금 아플 수도 있으니까."

상원이 만웅의 고간을 움켜쥔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으, 다시는 안그럴게요. 제발, 제발."

"하나."

"으... 제발...."

"둘."

"으... 으아아아...."

"셋!"

마지막 셋에 상원은 고함을 질렀다.

"꺼어어억."

겁만 주었을 뿐인데, 만웅은 거품을 물며 혼절해버렸다.

"허, 거 놈 참. 싱겁기는."

상원이 뻗어버린 만웅을 보고 피식 웃었다.

"야."

상원이 만웅의 부하들에게 외쳤다.

"와서 이거 빨리 수습해가라. 깨면 거 상황 보고 나대라고 말 좀 전해주고."

슬금 슬금, 만웅의 부하들이 눈을 내리깔고 만웅을 수습해갔다.

"하아."

상원이 한숨을 내뱉었다.

김만웅은 조상원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서울 육마귀> 중 하나, <콘크리트 회장> 강상중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강상중이 총애하는 수하가 김만웅이다.

김만웅에게 상원을 각인시켰다는 건, 강상중도 상원을 노리고 움직일 거라는 뜻이었다.

‘그러면 반드시 자신을 노출하게 된다.’

그 때 강상중을 친다.

"감사합니다."

혜경이 상원에게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상원도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혜경 옆에 있던 창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저 부부에게도 정이 든 것 같다고 상원은 생각했다.

* * *

하늘의 서쪽 가장자리가 노란 빛으로 물들어갔다.

상원은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로서 24시간이다.

회귀한 지.

그 사이에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고작 하루라니.'

앞으로 이런 하루하루를 얼마나 더 견뎌야 한다는 말인가.

상원이 한숨을 뱉었다.

그때, 쾌청한 하늘로부터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이렇게 맑은데 웬 함박눈이야?"

"아이고 뭐 이젠 땅에서 갑자기 온천이 솟아나도 안 이상하겄수."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말했다.

어느새 눈은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서울역 광장 한 편에서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크리스마스지. 화이트 크리스마스긴 하네.'

상원이 피식 웃었다.

트리 곁 벤치에 창훈 부부가 앉아 있었다.

그들의 함박웃음이 천진했다.

'참, 일반적인 모양새는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상원이 창훈 부부를 보며 생각했다.

혜경의 품에 안겨 있던 죽은 딸은 일곱살 쯤 돼보였다.

창훈과 혜경은 일곱 살 짜리 아이의 부모 치고는 아주 어렸다.

그리고 키도 체구도 혜경이 창훈보다 훨씬 컸다.

그런데 왠지 그 모양새가 그렇게 낯설지가 않았다.

'기분 탓인가. 저 가족을 너무 오래 봤나.'

상원이 생각하는 찰나, 혜경과 눈이 마주쳤다.

혜경이 창훈에게 무언가 말하더니 상원에게 다가왔다.

* * *

"정말 신세 많이 졌어요.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고맙다는 말씀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상원 옆에 앉은 혜경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세요."

상원이 대답했다.

송혜경, 짙은 쌍꺼풀과 오뚝한 콧날이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런 외모는 새하늘 시험을 진행하는 데 불리한 조건이었다.

주변에 항상 김만웅 같은 잡배들이 꼬일 것이니까.

"그런데 아까, 그 깡패랑 싸우실 때요. 오빠가 정신 놓고 있던데... 그건 뭔가요?"

"아 그건, 스킬이란 겁니다."

"스킬... 요? 게임에 나오는 그런 거요?"

"예, 그런 걸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어머, 세상에."

혜경이 놀란 얼굴로 입을 벌렸다.

"아니 그런 건 무슨 게임이나 소설에 나오는 건줄 알았는데."

"믿기지 않으시죠? 저도 그렇습니다."

상원이 대답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현실입니다. 적응하고, 살아남아야지."

상원이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크리스마스네요."

"네, 크리스마스입니다."

"상원씨, 메리 크리스마스."

혜경이 살짝 웃었다.

"아 그나저나 상원씨도, 수호신이 없나요?"

"네?"

"아니 웬만한 분들은 수호신이 있으신 것 같은데. 저기 그... 백문혁씨랑 윤진아씨도 그렇고. 근데 우리 남편은 수호신이 없다더라고요. 참 그게 왜 그런 건지."

혜경의 물음에 상원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었다.

"정말입니까?"

"예... 예. 뭔가 잘못됐나요?"

갑자기 달라진 태도에 혜경이 놀라며 물었다.

‘잘못됐지.’

한창훈은 <검은 숲의 목자>가 잡아먹을 제물로 선택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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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 입에서 발음조차 어려운 말이 튀어나왔다.

<검은 숲의 목자>라는 칭호 뒤에 가려진, 그 존재의 진짜 이름이었다.

그 말에 혜경이 으르렁거리며 물러섰다.

상원의 눈빛이 혜경을 꿰뚫었다.

"너 설마, 저 가족을 통째로 먹어치울 생각이냐?"

"으으으...!"

그 순간, 혜경의 눈이 새까매졌다.

영롱한 흑진주처럼 그녀의 눈이 까맣게 빛났다.

마치 그녀에게 인장을 내린 염소의 눈처럼.

혜경이 두 손으로 상원의 목을 졸랐다.

"크윽, 큭!"

상원이 그녀의 손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큰 체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힘이었다.

"너... 는... 누구."

잔뜩 쉰 목소리가 혜경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물리력 100의 상원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힘, 이게 <검은 숲의 목자>의 능력이었다.

이대로라면 <검은 숲의 목자>에게 완전히 씌어버린 혜경이 상원의 목을 부러뜨릴지도 모른다.

"흥."

상원이 피식 웃었다.

혜경이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오이소프, 르 리기어 이여 니 시응 나사오."

상원이 단숨에 내뱉은 말.

"으악!"

혜경이 단말마를 내뱉으며 손을 풀었다.

상원이 목을 문지르며 혜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검은 기운이 빠졌다.

"놀이터에 트럭이랑 만두랑 화장해... 어... 어? 어, 언니. 아빠? 아빠... 나 놓고 가지마."

다시 정신이 나가버린 혜경이 비척거리며 남편에게 돌아갔다.

상원이 멀어지는 혜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보? 혜경아? 혜경아!"

창훈의 고함이 들려왔다.

자기를 바라보는 창훈을 향해 상원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부디 무사하길 바랍니다."

상원이 나직이 말했다.

'그나저나 이 주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네.'

<검은 숲의 목자>를 화신에게서 잠깐 몰아내는 주문.

마지막으로 외워본 게 몇 년, 아니 십 년 하고 몇 년 전일까.

잊어버릴 리가 없다.

<새하늘교>에 들어갔을 때, 상원이 가장 처음 배운 주문이 이것이니까.

* * *

"끄아악! 끄아아아악!"

촛불 몇 개가 흔들리는 어두운 방.

그 방 가운데서 쇠사슬에 묶인 여자가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재갈을 물린 입에서 흘러나온 침과, 쇠사슬이 살갗을 파고들어 흘러내린 피와, 마구 싸지른 대소변이 바닥에 엉겨 붙어 있었다.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이 절을 하며 기도했다.

통성기도가 방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오이소프, 르 리기어 이여 니 시응 나사오."

여자를 마주하고 앉은 어린 상원, 그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오... 오이소프..."

말 대신 눈물만 줄줄 흐를 뿐이었다.

"다시. 오이소프, 르 리기어 이여 니 시응 나사오."

억센 손이 상원의 뒤통수를 들이밀었다.

“똑바로 보세요 상원 군, 상원 군이 <검은 숲의 목자>를 인도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 계획의 핵심입니다.”

여자의 얼굴이 상원의 코앞에 왔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이 주문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워야 합니다. 그래야, 상은 양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등 뒤의 목소리가 말했다.

상원이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항상 상원을 향해 따뜻하게 웃어주던 얼굴.

이제는 가족마저 알아보지 못하고 울부짖는 얼굴.

"누나."

상원이 흐느끼며 여자의 볼을 만졌다.

* * *

상원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깜빡 잠이 든 것 같았다.

'그 부부 만난 뒤로... 옛날 생각을 많이 하게 되네.'

상원이 몸을 풀며 생각했다.

눈은 그쳤고 검푸른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했다.

"와 세상에, 하늘에 별이 저렇게 많았나."

누군가 얘기했다.

"우와, 별똥별이다."

또 누군가 외쳤다.

창훈과 어느새 정신을 차린 것 같은 혜경도 하늘을 보고 있었다.

주문은 효과가 있었다.

한동안은 <검은 숲의 목자>가 송혜경을 완전히 삼키지는 못할 것이다.

한창훈도 안전할 것이다.

당분간은.

하늘에 유성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잊혀져간 이들이 다시 돌아와 하늘을 날더이다.]

<승천계시록>에 쓰여있던 말.

왜 그 문장이 생각이 난 걸까.

"나무의 자식들아."

그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서, 섭리의 집행자 사마에트가 수험자들을 부르고 있었다.

‘세 번째 시험... 이제 시작이구나.’

일곱 별의 왕관을 얻기 위해 세 번째 시험에서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의령수의 심장>, 그리고 <하늘 악어의 비늘뼈>’

승천 시험에 대한 모든 지식이 상원의 머릿속에 있었고, 회귀 전 겪었던 과거가 방금 일처럼 생생했다.

“문제 없다.”

각오를 다지며 상원이 몸을 일으켰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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