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성역 (5)
"아 투자자님, 이것 보셔야지. 저번에 구해달라고 했던 거."
록시가 커다랗고 허름한 나무 궤짝을 열고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하나는 짐승의 발톱으로, 길이 40cm 정도로 보였다.
다른 하나는 파충류의 비늘이었는데, 세모꼴에 끝이 날카로워 화살촉처럼 보였다.
세 번째 시험의 첫 번쨰 밤이 끝나기 전까지 구해달라고 했던 물건, <늪지 광견의 발톱>과 <구렁이 화살촉>이었다.
모두 상원이 세 번째 시험을 계획대로 풀어나가는 데 필수적이 물건들이었다.
"오."
상원이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
"생각보다 빨리 구하셨네요."
둘 모두 상위종에게서 나오는 전리품들이라 구하기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걸 고려해서 첫 번째 밤이 끝나기 전까지 구해달라고 했던 거였는데.
"그럼요. 성전 상인 록시, 능력은 확실하지! 하하하!"
록시가 호탕하게 웃었다.
"아 물론, 우리 투자자님이 쾌척하신 자금 덕을 톡톡히 봤지요."
록시가 상원의 팔뚝을 두드리며 말했다.
"각각 얼마죠?"
"봅시다."
록시가 물건을 들고 천막 한 쪽 구석으로 갔다.
그가 향한 곳엔 커다란 여기저기 녹슨 천칭(天秤)이 있었다.
어찌나 커다란지 저울대 위에 황소 한 마리를 통째로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록시가 한 쪽 저울대에 물건을 올리고, 다른 쪽에는 작은 금속 조각들을 올렸다.
가로장이 흔들리길 몇 초, 곧 저울이 멈췄다.
"발톱은 이십 코인, 화살촉은 오십 코인이면 되겠네요."
록시가 눈금을 읽으며 말했다.
"음, 그럼. 록시. 물건들을 좀 더 구해다 주세요."
"얼마나요?"
"발톱은 다섯 개, 화살촉 두 개. 이렇게 더 구해주시면 되겠네요."
"좋습니다. 그럼 다 해서 발톱 여섯 개에 화살촉 세 개, 이렇게 해서."
"값은 찾을 때 한 번에 치르겠습니다. 언제까지 될까요?"
"이 정도면 첫 번째 낮은 끝나야 드리겠는데요. 첫 번째 밤 끝나기 전에 필요하신 거 아니었나?"
"계획이 좀 바뀌었습니다."
"아 그래요?"
"네, 우리 사장님 능력이 너무 출중하셔서.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투자처를 참 잘 고른 것 같네요."
상원은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아, 하하하! 그렇죠 그렇죠!"
록시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자, 사장님."
상원이 록시의 손을 잡았다.
"이 돈, 지금 당장은 쓸 데가 없습니다. 한 번 제대로 굴려 보시죠."
마주잡은 오른손이 빛났다.
록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코인을 한번에요?"
"그럼요."
상원이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제가 사장님 믿으니까요."
성원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이렇게 거래를 쌓고 투자를 늘려야 브라이싱크론 지갑의 다른 기능들을 열고 록시의 특산품을 구입할 수 있다.
<일곱 별의 왕관>을 얻을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선 이것들이 모두 있어야 한다.
"아... 네, 알겠습니다."
꿀떡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거래 성립, 3,076코인을 지불합니다.]
남김 없는 투자.
성전 상인 록시가 후에 어떤 존재로 거듭나는지 알고 있기에 가능한 투자였다.
'떡상할 주식을 미리 아는 기분이 이런 거겠지.'
상원이 씩 웃었다.
"자 그럼, 사장님. 다음 거래 하셔야죠. 다음번에 뵐 때까지 건강하시길."
"예, 예 그럼요."
상원이 몸을 돌려 천막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아 투자자님."
록시의 말에 상원이 발을 멈췄다.
상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록시, 그 피도 눈물도 없는 자의 눈에 걱정이 스며 있었다.
'저 자가... 저런 눈을 할 줄 알았나...?'
상원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몸 조심하쇼."
록시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우리 투자자님, 뭐 중간에 어떻게 한 건진 모르지만 어쨌든 그 정도 코인을 턱턱 벌어다 주시니 별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록시가 상원을 향해 걸어왔다.
"세 번째 시험부터는 진짜 장난이 아니요. 이제는 개나 소나 수호신이 있으니까."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자기네 수호신 이름값을 높이려고 목숨을 걸 거요. 그게 무슨 말인지 아슈? 이제부턴 잘 도망치면 끝나는 달리기 시합이 아니란 얘기요."
그렇다.
새하늘 시험의 수호신과 화신은 쌍무계약관계다.
수호신은 화신에게 능력을 주고, 그 대가로 화신은 수호신의 명성을 드높인다.
수호신의 명성을 드높이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수호신이 전사라면 화신은 열심히 싸울 것이고, 수호신이 대장장이라면 화신은 열심히 물건을 만들 것이다.
'다른 화신들 뒤통수 치게 만드는 놈도 있고.'
상원의 머릿속에 강상중을 비롯해 몇몇 화신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얽히고설키며 화신들은 승천을 향해 나아간다.
그게 새하늘 시험이 굴러가는 방식이다.
어쨌든.
"난 솔직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소. 수호신을 고르지 않는 거... 어째서요?"
록시가 상원의 오른손 손등을 보면서 말했다.
보통의 수험자라면 수호계약의 낙인이 새겨져 있어야 할 손등을.
"수호신 없이 나아가는 거, 그게 위업이라면 위업이지 않겠습니까?"
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허."
록시가 헛웃음을 뱉었다.
* * *
"투자자님, 몸 조심하슈."
딱
록시가 손가락을 튕기자 커다란 천막이 주먹만 한 크기로 말렸다.
상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장사 좀 더 하러 가겄습니다. 물건은 걱정하지 마시고."
야구공 마냥 천막을 던졌다 받았다 하며, 록시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광장으로 향했다.
"성전에 장사치라."
상원 곁에 누군가 서 있었다.
백문혁, 그가 굳은 얼굴로 멀어지는 록시를 바라보았다.
문혁의 말에 상원이 피식 웃었다.
그의 눈에 띄지 않을만큼 작게.
'<해안선의 귀신>, 그래 그 대쪽같은 양반이라면 그럴 법도 하지. 성전에 장사치가 돌아다닌다는 것부터가 맘에 들지 않겠군.'
상원이 문혁의 굳은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문혁씨. 혹시 활 쏠 줄 아세요?"
"예? 아... 닙니다, 사격이야 자신있습니다만."
"그럼 타협을 좀 보셔야 되겠네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차차 아시게 될 겁니다."
그때였다.
"야!"
악을 쓰는 것 같은 고함.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며 상원을 부르고 있었다.
"너 이 새끼."
김만웅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서 씩씩대고 있었다.
그가 쥔 나이프에서 보라색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흘러나왔다.
"오, 김만웅이! 바지 갈아입으셨네? 아까 것보다 그게 더 낫다 야."
상원은 일부러 껄렁껄렁하게 말했다.
그래야 강상중을 낚을 테니까.
두 번째 별을 얻기 위해선 강상중을 제거해야 한다.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만웅이 이를 갈며 다가왔다.
그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X발, 너는 곱게 못 뒈질 줄 알아라."
"잠깐."
상원과 만웅 사이에 문혁이 끼어들었다.
"그만하십쇼."
만웅이 날카로운 눈으로 문혁을 쏘아보았다.
그 때
"새끼야, 기다려라. 넌 다음이다."
만웅에게서 반투명한 보라색 기운이 튀어나왔다.
만웅을 중심으로 구형으로 퍼져 나온 기운이 문혁을 밀어냈다.
"무슨...?"
문혁이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기운이 상원을 삼켰다.
문혁과 달리 상원은 밀려나지 않았다.
'이걸 벌써 쓴다고? 김만웅이 약이 단단히 올랐구만.'
보라색 막의 정체는 김만웅의 <성현>, 상원은 이 스킬을 본 적이 있다.
만웅의 수호신, 그 신칭은 <자칭 협객>이었으며, 성현의 이름은 <야인의 결투장>이었다.
주 효과는 스킬 사용자와 결투 상대방으로 지정된 대상 외의 수험자나 마물을 공간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어디, 손목부터 시작할까, 발목부터 시작할까?"
김만웅이 나이프로 상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만웅아. 잠깐만."
상원이 피식 웃으며 만웅을 향해 걸어갔다.
"너 이 새끼, 뭐하는 거야?"
주춤, 만웅이 물러났다.
"구경꾼이 많아야 재밌지. 따라 와라."
두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로, 상원은 만웅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 광장에는, 수많은 화신들이 모여 록시와의 거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상원은 막 바깥을 둘러보았다.
보라색 막 바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만웅과 상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라색 빛이 감돌았다.
저게 <협객의 결투장>의 부가 효과다.
주변 수험자들을 구경꾼으로 만드는 것.
문혁도, 진아도, 창훈도 멍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만 빼고.
<검은 숲의 목자>의 화신, 송혜경.
"오빠, 뭐해? 정신 좀 차려봐."
웬만한 정신계 스킬은 그녀에게 먹히지 않는다.
창훈의 어깨를 흔들어도 그저 멍하게 결투자들을 바라볼 뿐 반응이 없었다.
"흐흐, 그래. 니 말이 맞다."
주변을 둘러본 만웅이 나이프를 고쳐 쥐었다.
"싸움은 구경꾼이 있어야 할 맛나지."
"그래, 만웅아."
상원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들어와라."
"너 이 새끼. 그 혓바닥 썰어버릴라니까."
만웅이 달려들었다.
그 사이 물약을 있는 대로 들이켰는지, 만웅의 동작은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민첩했다.
핏
나이프를 흐르는 보라색 기운이 명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상원은 사이드스텝을 밟으며 칼날을 피했다.
슥, 티셔츠 옆구리가 잘렸다.
'이 정도면, 괴력이랑 용력 다섯 개씩은 먹은 건가. 자칭 협객, 통이 크시네.'
정확히 급소를 노리고 날아드는 나이프.
그걸 피하는 상원의 동작은 간결했다.
"이익!"
바싹 약이 올랐는지 만웅의 표정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만웅의 나이프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상원을 비껴갔다.
그러기를 몇 합, 만웅의 동작이 조금씩 느려졌다.
"이런 X발!"
만웅이 발악하듯 외쳤다.
사뿐 사뿐, 그 거구의 몸짓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가볍게 움직이는 상원.
그의 눈이 빛났다.
'그래, 됐다.'
틱
칼등이 상원의 기둥 같은 팔뚝을 스쳤다.
"만웅아."
상원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여기까지만 하자."
툭
상원이 만웅의 배를 살짝 쳤다.
"컥!"
그 한 방에, 만웅이 붕 날아서 땅에 쳐박혔다.
만웅이 놓친 나이프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윽... 뭐 이런...!"
만웅이 부들부들 떨며 상원을 쳐다보았다.
만웅의 눈에 불신이 어려 있었다.
저게 과연 인간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저벅 저벅
상원이 만웅을 향해 걸어갔다.
주춤거리며 물러나던 만웅이 몸을 돌려 도망쳤다.
팟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던 보라색 막이 사라졌다.
"어, 어어?"
"뭐였지 방금?"
<협객의 결투장>에 잡혀 있던 구경꾼들이 정신을 차리고 웅성거렸다.
그리고
퉁
만웅이 무언가에 부딪혀 쓰러졌다.
반투명한 초록색 장막이 만웅의 앞을 막고 있었다.
"어...? 어?"
만웅이 두 손으로 장막을 더듬었다.
장막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꼴사납다 만웅아."
상원이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