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3화 (13/230)

제13화. 성역 (4)

"지금까지 잘했다. 열라 잘했어."

다람쥐가 말했다.

"갑자기 웬 칭찬입니까? 무슨 꿍꿍이죠?"

다람쥐를 바라보는 상원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진짜야 너 잘했...ㄷ...아...어."

동영상을 느리게 재생한 것처럼, 갑자기 다람쥐의 동작과 목소리가 느려졌다.

"아...태엽이...ㅋ...ㄴ...ㅣㄹ...야...이것...ㅈ..."

다람쥐가 삐걱거리며 등을 돌렸다.

등에 박힌 커다란 태엽이 상원의 눈에 들어왔다.

태엽이 다 풀린 것일 게다.

"하 나 참, 영감님 가지가지 하시네."

상원은 다람쥐를 주워 태엽을 감았다.

끼리리릭, 끼리리릭.

스무 번쯤 돌렸을까, 이 정도면 충분할거라 생각하며 상원은 다람쥐를 내려놓았다.

찰칵, 찰칵

태엽은 부드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 어 야 잘했어. 똑똑하네, 역시 잘 골랐어. 내 안목은 진짜 탁월해. 빠하하하!"

"암요, 그러시겠죠."

상원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임마. 잘했다고 칭찬해주니까 뭐, 무슨 꿍꿍이냐고? 이 의심쟁이야 그래서 세상 어떻게 사냐?"

"의심쟁이라서, 살아남은 겁니다."

상원의 대답은 싸늘했다.

살아남았다는 그 말에 순간 상원의 눈앞에 기억의 한 장면이 지나갔다.

숨막히는 정적에 둘러싸인 낡은 기도원, 방을 가득 메운 악취.

그리고 대들보에 묶여 흔들리는 수십 구의 시신들.

아버지의 시신은 혀를 길게 빼물고 있었다.

‘살아남았다는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이 정도라니. 젠장,’

47명의 신도들이 죽은 새하늘교 집단 자살 사건은, 상원이 새하늘교를 탈출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트라우마는 쉬지 않고 상원의 목을 졸라댔다.

상원이 자기도 모르게 이를 으득 갈았다.

‘내가 .승천하면 모든 걸 돌려놓을 수 있어.’

"아 그래, 그렇지 불신자 선생. 그 의심이 선생을 살렸지. 50번째 시험까지. 거기선 그렇게 되지 않았지만...."

"그래서."

상원이 다람쥐의 말을 끊었다.

"본론은요?"

"아 거 참... 음, 그래. 거, 그 의체는, <신화의 몸>이라고 하는 물건이야."

'신화의 몸...?'

상원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수천 번은 들여다 본 새하늘교의 경전들, 그 어디에도 <신화의 몸>이라는 물건은 없었다.

"처음 들어봅니다."

"그래, 처음 들어보겠지! 열라 똑똑하신 이 몸이 만든 물건이니까! 빠하하하!"

"아, 네."

한참 웃던 다람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너, 승천자와 수험자의 가장 큰 차이가 뭔줄 아냐?"

'가장 큰 차이?'

시험을 보느냐 즐기느냐?

능력의 범위와 한계?

수십 가지 대답이 머리를 스쳤다.

'그런데 이 질문... 전에 한 번 들은 것 같은데?'

교리강사가 물었던가?

누가 그 질문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걸 물었던 사람이 제시했던 답만은 똑똑히 기억났다.

"승천자는 영생을 하지요."

"빙고."

다람쥐가 대답했다.

"그럼, 승천자는 어떻게 영생을 할까? 걔네들도 존재인 이상 에너지가 필요할 거 아냐. 맛있는 걸 많이 쳐먹어서? 아니면 몸뚱이가 열라 튼튼하니까?"

'그러게?'

승천자는 영생한다.

그 명제를 받아들였을 뿐, 궁금해 한 적은 없다.

승천자는 어떻게 영생을 할 수 있는가?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뾰족한 답은 없었다.

긴 침묵을 깬 건 다람쥐였다.

"그, 이봐. 내가 그렇게 참을성이 많진 않거든? 대답해줄게. 승천자가 영생하는 건, 위업 때문이야."

"예?"

"승천자가 쌓은 위업, 그게 승천자를 살게 한다고."

이게 무슨 소린가.

승천자의 업적이, 어떻게 영생의 동력이 될 수 있지?

"열라 궁금하다는 표정인데, 원리 같은 건 그냥 뭐... 차차 알게 될 테니까. 그냥 이렇게만 알아둬. 승천자를 영생하게 하는 건 위업이다. 그리고, 그 몸도 똑같애."

다람쥐의 말에 상원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러니까... 위업을 쌓으면 강해진다고요?"

"오케이!"

다람쥐가 외쳤다.

"니가 쌓을 위업들이, 너를 강하게 만들어 줄 거다."

"아까는 마물 잡는 걸로는 안 강해진다면서요?"

"야, 너는 마물 때려잡는 게 위업 같냐? 웹소설도 몬스터 때려잡는 것만 주구장창 나오면 지겨워서 때려 치겠다."

"허, 그럼 뭐, 기상천외한 방법이라도 써야 되나요? 암흑용 모가지를 엄지발가락으로 뽑는다던지 태고의 거수를 빨래처럼 짠다던지?"

다람쥐가 벙찐 얼굴로 상원을 쳐다보았다.

"어? 빠하하하하! 야 그거 좋다, 진짜로 한 번 해봐라!"

'내가 말을 말지.'

상원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근데, 불신자 선생. 잘 생각해봐. 어떤 수험자가 <일곱 별의 왕관> 같은 걸 얻을 생각을 하겠어."

상원이 다람쥐를 쳐다보았다.

다람쥐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다람쥐의 말에 상원은 지난 길을 돌이켜보았다.

그리고, 의체를 받고 얻은 것들 - 흑마술 양초, 성성이의 시신, 그리고 지하의 문과 안대까지.

이것들 모두가 <일곱 번째 왕관>을 얻기 위해 없으면 안되는 것들이었다.

"<시공간의 계승자>나 <외눈 현자> 같은 괴물딱지들을 수호신으로 둬도 두 번째 시험에서 3급 마물한테서 나오는 재료를 얻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 <일곱 별의 왕관>을 얻는 거 자체가 비교될 수 없는 위업이지."

"그러니까 제가 <일곱 별의 왕관>을 얻는 과정이 이 몸을 강하게 만들어준다는 거군요."

상원의 대답은 나직했다.

"크흐, 그래. 그 몸 가지고 <일곱 별의 왕관> 써서 자네 승천하면 나는 권좌 얻는거고."

다람쥐가 씩 웃으며 말했다.

"누구 기준에서 위업입니까?"

당연한 물음이다.

7급 마물인 암흑용의 모가지를 엄지발가락으로 뽑는 건, 누군가의 입장에선 위업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하의 수호자>나 <태초의 대족장> 같은 진짜 괴물들한테는 일도 아니다.

"뭐,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마. 일반 수험자 기준에서 생각하면 돼."

다람쥐가 고개를 돌렸다.

상원도 다람쥐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사마에트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참 거, 아줌마 표정 살벌하기는. 나 이제 가야 되겠다 더 있다간 아줌마한테 뒈지겠어. 이것 좀 뽑아봐 불신자 선생."

다람쥐가 등을 돌려 태엽을 들이댔다.

상원이 태엽을 뽑았다.

태엽을 뽑은 자리엔 어떤 자국도 없었다.

다람쥐가 주저앉았다.

"아 그리고, 이거 하나 알아둬라. 이 세계엔 말이야, 생각보다 사이코패스가 많아."

"예?"

"뭐, 그렇ㄷ...ㅏ...ㄱ...."

다람쥐가 쓰러졌다.

상원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위업을 통해 강해진다, 승천자들이 그렇듯이.

'도대체 뭐야 이 몸.'

상원은 의체관리시스템을 로딩했다.

초록색 빛이 상원의 손등에서 뿜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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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체 관리 시스템]

접근이 허가된 정보들만 표시됩니다.

레벨 1 (86%)

성능: 괴력 50, 용력 50, 술력 30

스킬: 마나 삼키기, 동굴적 감각, 지하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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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이 허가된 정보들만 표시됩니다.'

그 문장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수수께끼의 발명품, 청소부에게 쫓기는 신세, 그리고 <승천계시록> 어디에도 없는 단서.

'<기계장치의 신>, 도대체 뭐야 당신은?'

상원은 다람쥐를 내려다보았다.

"뀨룩?"

정신을 차린 다람쥐가 재빨리 어디론가 사라졌다.

상원은 다람쥐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 * *

"이제 슬슬, 장사할 맛이 나겠네."

상원의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상원이 고개를 돌렸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벽안의 남성, 성전 상인 <록시>가 서울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계셨수? 우리 투자자님."

상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도 보니까 수호신 맛집이더만. <낙원의 수문장>에 <해안선의 귀신>에. <검은 숲의 목자>가 여기서 화신 골랐다는 건 아주 소문 쫙 났습디다."

록시가 쾌활하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 투자자님이 누굴 모셨는지를 모르겠더라고? 얼마나 잘나신 승천자를 수호신으로 모신 거요? 우리 투자자님 정도면 뭐, 잘 나가는 분으로 모셨겠지 특급으루다가?"

상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 그래요? 그저 그런 분으로다가 한 건가? 왜 그러셨대?"

록시가 물었다.

상원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 잠깐만. 어? 투자자님. 뭔 소리유 그게?"

록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상원은 표정 없는 얼굴로 록시를 올려다보았다.

"계약을... 안했어?"

끄덕.

상원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아... 아이 씨, 뭔 소리요 이게 지금? 아니, 고갱님? 정신이 있수 없수?"

소리를 지르는 록시에게, 상원이 왼손을 내밀었다.

"에이 썅 진짜 이런 멍청이를 갖다가 투자자라고... 응?"

록시가 상원의 손을 잡은 순간, 록시의 말이 끊어졌다.

록시의 눈이 휘등그레졌다.

"얼마야 이게... 삼천? 삼천 코인? 당신,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록시의 말이 덜덜 떨렸다.

'상인 입 막는 덴 코인이 최고지. 뻔하기는.'

상원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수호신이 있든 없든, 승천자든 수험자든 마물이든, 상인에게 중요한 건 코인 아닙니까?"

상원이 웃으며 말했다.

"어, 어어? 아, 하하! 하하하하! 맞습니다, 맞지요! 오로지 중요한 건 코인뿐이지. 신앙은 단명이고-"

"코인은 영원한 것이지요."

"맞아요, 맞아! 좋아, 그래서 우리 투자자님. 이번엔 필요하신 게 뭡니까?"

록시가 주머니에서 작은 천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곧 커다란 천막이 두 사람을 감쌌다.

"이번에 맡길 건 이겁니다."

상원이 품에서 브라이싱크론 지갑을 꺼냈다.

"공간이 좀 필요한데 괜찮지요?"

"이 천막 보기보다 넓어요. 충분합니다. 우리 투자자님이 <인식의 경계>나 <네 발 달린 밤> 같은 걸 꺼내 놓으실 게 아니라면."

록시가 너스레를 떨었다.

"예, 그렇다면."

'이걸 보면 좀 놀랄 거다.'

상원의 검지와 중지가 브라이싱크론 지갑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주섬주섬, 상원은 바둑돌을 찾듯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지갑에서 거대한 물체가 튀어나왔다.

피범벅이 된 성성이의 시신 두 구가.

시신을 꺼냄과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퉷, 에이 씨."

피를 뒤집어쓴 록시가 욕을 뱉었다.

"뭐야 이게... 어, 성성이? 성성이잖아요 이거? 맞죠? 세상에, 이걸 어디서 구하셨대?"

록시가 시신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설마 이것들, 두 번째 시험에서 나오는 그것들이우?"

끄덕.

"어떻게 하셨수?"

"영업기밀입니다."

상원이 웃으며 말했다.

록시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말이 돼? 수호신도 없이 두 번째 시험에서 3급을 잡았다고? 어, 어... 에이 씨. 뭐 여튼 인정. 우리 투자자님은 수호신 같은 거 없으셔도 될 것 같어."

록시가 박수를 쳤다.

"이거 무두질 가능하죠?"

"좀만 기다리쇼. 아주 깨끗하게, 털뭉치로 만들어 드리리다."

"삯은요?"

"삯? 글쎄, 사실 이거 상태가 워낙 엉망이라 좀 받긴 해야 될 것 같은데. 그래도 우리 계약사항이 있으니까, 최저가로 갑시다. 두 구 다 해서 이백 코인."

"그래요, 좋습니다."

상원이 대답했다.

록시가 상원에게 바가지를 씌울 일은 없다.

그게 둘 사이의 계약이니까.

상인에겐 목숨보다 중요한 게 계약이다.

‘좋아, 착착 진행되고 있다.’

20층의 흑마술 양초와 성성이의 털뭉치, 그리고 지하를 드나들 수 있는 힘.

첫 번째 별에 다가가기 위한 계획들이 차근차근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상원은 록시와의 거래를 이어갔다.

* * *

"이런 X발 새끼."

천막 바깥에서 김만웅이 천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프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형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놈 진짜 장난 아니던데."

"닥쳐 새끼들아."

만웅이 만류하는 부하들에게 외쳤다.

"X발, 제깟 놈이 쎄봐야 신보다 쎄겠어?"

만웅의 오른쪽 손등에서 계약의 인장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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